[묵상글]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전봉석 2022. 7. 9. 04:24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고로 히람과 솔로몬이 친목하여 두 사람이 함께 약조를 맺었더라

왕상 5:12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

 

 

솔로몬이 다윗이 그토록 바라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다. 앞서 하나님은 저를 지원하는 두로 왕 히람의 마음을 여셨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1).” 5장에서 9장까지 이어지는 성전 건축의 과정에서 서로의 사랑과 친목이 위대함을 알 수 있다. 살면서 어느 시점에서 서로 만나 신뢰하고 의지하며 한 생을 같이 걸어간다는 일은 놀랍다. 이에 하나님이 손수 예비하심을 목격하게 된다.

 

가령 동방에서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의 노정(路程)도, 우리의 목적지가 천성을 향해 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0-11).” 곧 서로의 만남이 축복인 경우다.

 

어제 아이가 인사를 왔다. 작년 초에 1차 시험이 끝나고 왔었다가 이번에 온 것이니, 서로가 본 지 족히 1년만의 일이다. 서로가 만나지도 15년은 넘었다. 중1 때였는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지, 군포에서 글방 아이로 팀을 이뤄 수업을 하다 같이 시작한 아이들이 하나둘 그만둘 때도 아이는 꾸준하였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를 같이 드리게 되었을 때, 이듬해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함께 교회를 이루어 오며 오늘까지 신앙을 같이 이어오고 있다. 이번 회계사 2차 시험을 끝내고 찾아온 것이니 꽤 오랜만이다. 마치 바울에게 있어 믿음의 아들 디모데처럼 녀석은 나와 그런 관계다. 아이의 묵상글을 보며 근황을 알고, 공부 중이라 가끔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 기도를 해주는 것뿐. 매 주일 줌으로 예배를 같이 드리기는 하나 어떻든지 1년은 더 해야 하는 시점에서 시간을 낸 것인데… 걸음걸음마다 주께서 늘 함께 하셨다. 서로가 인정한다. 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군대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같이 하였고, 네게 향하신 주의 사랑이 크다. 하고 말하면 아이도 크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주께서 예비하신 길을 같이 걸어간다는 것,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늘 저를 아들처럼 두고 나란히 기도할 때, 나는 이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서 오바댜나 다니엘처럼 이방나라의 고위직으로 일하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으로 드러내며 살기를 위해 기도한다. 하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같이 대화하고 기도하고, 나아가 식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커피를 한 잔 하면서 밀린 이야기까지 하느라 너덧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훌쩍 지났다. 다음 주일부터는 대면예배로 와서 드릴게요. 하는 아이의 말에 나는 어떤 감격인지 고마움인지 울컥, 하기도 했다. 결과가 어찌 나오든, 공부는 계속해야 할 것이고. 2차가 끝난 지금은 나름 여유가 있고, 또한 공황도 많이 나아져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길을 오고 가는 데, 이제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하니 감사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같은 노정을 걷는다는 것은 매우 복되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우리의 겉사람은 건장한 청년이 됐거나 노인이 되었어도 그 시절 함께 했던 기억들이 서로를 신뢰하게 한다. 한 사람을 오롯이 마주하는 일은 귀하다.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도 배우는 게 없다면 더 무엇을 가르치겠나? 하고 반문하였다던 중국의 어느 노학자의 말이 기억난다. 어쩌면 그랬다. 나 역시 묵상글을 써서 이처럼 남기게 된 게 저 아이들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묵상을 서로 나누기로 하는데, 시간과 장소를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서로 블러그에 쓰는 것이다. 나는 그때 아이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꾸준하였고, 아이의 글로 저와 저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짐작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9-10).” 서로를 위하고 함께 주를 바람은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동행한 길의 여정만큼 다채롭다. 또 다른 누가 있는데, 저 아인 얼추 30년은 훨씬 넘는 것 같다. 이젠 저도 마흔여덟 살이라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나 선생님 선생님하며 붙임성 있게 굴던 게 어느새 서로가 이만큼이 되었다. 주일학교 선생으로, 그러다 아이가 자라 대학을 다니면서는 술친구로 서로 나른한 시간을 보낸 적도 있고, 그러면서도 늘 저 애는 나더러 목사가 되라, 목회를 하시라 하고 권하였다. 저의 입버릇이 나로 오늘의 이 길을 가게 한다. 어제는 뜬금없이 집주소를 물었고, 곧 옥수수를 보내겠다며 여름과일도 보낼 테니 종종 무엇이 당도하면 놀라지 말란 문자를 장난스럽게 해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앞서 저 둘은 내가 어찌 살았고 어떤 길을 굽이돌아 오늘에 이르렀는지 다 봤다. 같은 길을 같이 오면서 이제는 서로가 기도의 동역자로 주의 나라를 향해 함께 가는 관계가 되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이는 서로의 복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9).”

 

그렇게 곁을 지키며 함께 하던 아이가 먼저 하늘나라로 간 일도 있다. 저 또한 초등학교 5, 6학년쯤이었나? 어린 것이 당돌하게도 왜 신학을 안 하냐? 목사가 되시라. 하며 날 위해 자신은 금요철야예배를 가서 기도를 한다며, 당시 술 담배를 그렇게 좋아하는 일개 글쓰기 선생을 두고 그렇게 마음을 썼다. 아이는 유독 바른 말을 잔소리처럼 하곤 하였다. 그러다 내가 기어이 신대원을 하게 되고 목사가 되었을 때, 한걸음에 달려와 축복해준 아이도 저 아이였다. 성실하여 공부도 잘 하던 애라, 원하던 서울대 연대를 다 떨어지고 숙대를 갔다가 법학을 전공하고, 로스쿨로 진학하며 모 외국차량 법부법인 일원으로 일하며 스위스에도 파견나가 있다 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주께 기도를 부탁하던 사이였는데, 서른쯤이었을까? 갑자기 흉부에 무슨 종양이 생겼다더니 몇 년을 병상에 누워 지내다 홀연히 주의 부르심을 받고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며칠을 울다, 지금도 저의 생전 날 위한 기도하던 이 길을 간다. 

 

믿음 안에서 서로의 친목이 이처럼 위대하다. 기도하게 되고 함께 하는 그 노정을 귀히 여기며 복되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듯 날 위해 기도하며, 주의 길에서 곁을 같이 하는 사람으로 새 힘을 얻는다. 어제도 반가운 방문과 함께 누구를 그리워하다, 내가 너무 늦게 돌이켜 그 사이에 잃어버린 누구누구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서로가 모든 일에서 함께 기도하는 사이란 값지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나는 오늘 솔로몬에게 있어 주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서 히람과 같은 동역자가 있다는 데 새삼 회상에 잠긴다.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강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 사역을 감당하는 일은 의지가 되고 격려가 크다. 더욱이 슬픔을 두고 이를 기꺼이 토로하고 서로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놀랍다. 서로의 기도로 염려를 떨쳐낸다. 서로의 기도로 주의 평강에 거한다.

 

어제 오전에도 아이가 오기 전에 누구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이번에 대학에서 성적이의신청과 정정과정을 겪으며 공황이 왔던 이후 평소 하던 마약류 관련 강의를 나왔는데 진정이 안 돼 결국 안정제를 먹었다는 말이었다. 괜찮다! 생은 늘 그런 날도 있고 그런 날도 있다. 하고 위로하며,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때마다 우린 주를 의지한다. 서로가 있어 기도로 새 힘을 얻는다. 기쁠 땐 같이 기뻐하고 슬플 땐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사이가 복되다. 그리하여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와 같이 서로가 같은 길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27-28).” 말씀은 그때 우리의 등불이 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말씀이 서로를 하나로 연결한다. 특히 주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갈 때 그 기다림에 대하여,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

 

이와 같은 기다림의 시간에 함께 앉아 주를 바라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럴 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서로에게 용기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겸손은 덕목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내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왕상 5:6).” 이는 당대 주변국을 평정하고 있던 오늘 솔로몬의 겸손한 말이다. 명령이 아닌 요청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것, 겸손으로 몸을 낮추는 일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요즘 같은 시절에 서로가 아무리 친해도 얼마나 또 허세와 허풍으로 쩌는지, 행여 약점이 될까 하여 거짓으로 꾸미는 모습도 많다. 그러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덕목이 되는 세월이다. 서로에게 꿀리지 않게! 그러나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눅 14:10).” 가령 나는 저들이 나를 위함에 있어 나보다 월등히 나음에도 스스로 낮추어 섬기는 것임을 잘 안다. 이는 나를 나 이상의 존재로 여겨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우러나는 마음이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 7:22).” 나의 비루하고 연약함에 대하여는 저들도 잘 아는 바, 그럼에도 나를 높이는 까닭은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하는 일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목사 고시를 두 번이나 떨어지고 낙심하고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아이가 바리바리 무얼 싸가지고 글방으로 온 적이 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이의 이야기다. 아이는 대뜸, 그래서? 그렇다고 그만두실 건 아니죠? 하고는, 하나님은 40년을 넘게 거절당하면서도 쌤을 기다리셨는데 겨우 두 번 떨어졌다고 설마 관두실 건 아니죠? 하며 책상 위에 가지고 온 떡이며 음료수를 잔뜩 풀어놓았다. 아마 내가 목사안수 받을 때 자신은 외국에 파견나가 못 올 거라며… 어린 것이 나보다 믿음의 어른이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성경의 언어는 참 진귀하다. 어찌 우리를 한 몸으로 두고 각 지체로 연결 지은 것인지!? 누구나 누구에 대해 할 말은 많다.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하면서 오늘까지 후원헌금을 끊지 않고 하는 이도 있다. 때마다 먼저 내 것을 챙기는 이도 있다. 내가 참으로 빚이 많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 묵상은 이와 같아서 파생되어 성경의 말씀이 내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읽혀진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이를 오늘 시편으로 이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장한다. 곧 서로를 위하고 의지하는 것은 각자 그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체험한 결과다. 주를 의지하고 강구하는 것,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11:1).

 

세상적으로도 친구가 있었다. 분명 서로의 위로도 격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차원은 다르다. 저들의 위로는 신앙에서는 황당하다. 가령 누군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현실도피라며 자기가 하는 일에 같이 합류하기를 권하기도 했다. 또 누구는 돈으로 도움을 주려 하였고, 그런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저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 그것도 가장 궁핍할 때에 난데없이 신학을 하겠다고 하니… 친구들로서는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충고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들은 내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하였다. 지금도 저들은 나의 오늘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딱 그 심정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럴 때 오히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사는 데 가장 귀한 선물이 친구이고, 가장 걸림이 되는 것도 친구이다. 이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지금도 가장 상처를 주는 이도 친구이다. 언제가 한 친구는 아이 문제로 힘들어하다 내게 보냈다. 같이 서너 달을 글을 쓰고, 친해지면서 나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권하였다. 그럴 때 누구보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친구가 나서서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고 하며, 그럴 거면 ‘제대로 된 교회’로 보내겠다고 하며 아이도 더는 보내지 않았다. 나는 심히 속상하고 슬펐다. 어려운 현실은 우리 영혼을 어둠으로 이끌기도 한다. 교회를 할 거면 제대로 된 교회를 하란 말에 나는 한동안 주눅이 들었고, 눈물짓기도 했다. 저는 나의 친구다. 오래 되고 아주 잘 안다고 여기던 사이다. 그때 주님의 위로였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2-3).

 

어디로 터를 삼고 사는지가 중요하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면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더러는 외형적이 것에 마음을 두다 흔들려 넘어질 때도 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애꿎게 마음이 상할 일이 아니다. 이젠 그리 여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4).

 

주를 모신 우리의 몸이 주의 전이고, 비록 세 들어 작은 공간에서 모여 몇 명의 인원이 예배한다 해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에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렘 23:23).” 나는 누구에게 오라 하지 않는다. 저가 있는 곳에서 저가 할 수 있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될 거다. 교회를 넓혀도 주가 하실 일이고, 누굴 더 오게 할 것도 주가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내 자리를 지킬 뿐이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3).”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5-6).

 

불의한 목적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일에는 내가 나서서 발람의 길을 따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하면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고로, 묵묵히 주만 바라며,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그리하면,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