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
왕상 7:5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13:5
솔로몬의 왕궁 건축이 성전 건축 사이에 잠시 언급되는 형식으로 글을 전개가 기록되어 있다. 규모나 그 위용은 왕궁이 성전보다 크고 기간도 두 배 가까이 소요되었지만, 이야기 구조상 왕궁 짓는 설명은 성전을 지어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그 이야기가 단지 열두 구절로 정리되었다. 곧 왕궁은 성소의 부속된 건물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나무궁과 낭실과 재판정과 바로의 딸의 궁 등으로 구성되어 소개된다. 이를 보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앞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5-16).”
사는 데 따른 이런저런 부수적인 것들이 세상을 향하지만 이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세상이 아무리 망망대해 같다 해도 그 물이 새어들면 안 된다. 곧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러니 몽돌이 아무리 바닷가를 뒹굴며 날마다 바닷물에 시달린다 해도 그 속은 어디에도 물이 스미지 못하였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2-23).”
이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일이다. 솔로몬 궁이 건축되는데 13년이 소요되고 그 본체와 규모가 성전에 비해 웅대하다 해도 이는 엄연한 성전의 부속 건물들이다. 본문의 구조가 그리 갖춰진 까닭은 그와 같은 왕궁 역시 하나님의 일을 중심에 두고 사는 성도의 삶을 그려준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 사나 세상에 속한 자로는 아니고, 주어진 하루를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사는 것 같으나 그 이유와 목적은 분명한 것이다. 곧 우리는 예비된 신부처럼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곧 우리 생의 가치는 얼마나 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데 그 가치가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전에 주로 사탄의 공격이 집중되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이처럼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이 마음을 어렵게 할 것이 있다고… 몸은 현실을 받아들이느라 몸서리치듯 불안이 몰려든다. 묵상글을 쓰며 안정제를 먹는다는 게 때론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또한 오전에 주로 혼자 있는데도 두 번 더 쏠려서 그와 같이 의지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낄 때면 어쩔 수가 없다. 오히려 오후께는 서너 시에 한 번 더 오싹하다 만다. 나는 나의 불안이 여러 근심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 이유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 또한 받아들임은 죽는 날까지 나로 하여금 십자가만 바라게 하시려는 것임으로 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를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정도가 있다. 실제로 그리 살아야 한다.
해방되었음에도 여전히 족쇄를 찬 것처럼 자유롭지 못한 것은 길들여진 영혼에 밴 습성 때문이다. 한데 이와 같은 어려움이 도리어 나로 하여금 주 없이 살 수 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이를 우리 주님은 손수 사람의 몸을 입고 당하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여기에 숨은 역설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신 것인데, 나의 육신이나 정신 따위가 그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겠나? 도리어 그의 사랑을 확증할 뿐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이는 내가 한 게 아니라,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의 자녀로 살 때 이루어진 일이다. 이런 나를 위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고로 오늘의 어떤 공격적인 어려움도 주의 사랑을 알게 하는 길이다.
곧 솔로몬의 성전이 아무리 더 웅장하고 화려하다 해도, 그 공사 기간도 성전 건축에 비하면 두 배 이상 들었다 해도 엄연히 부속물일 뿐이다.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아들이 모두 대신하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25-26).”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시간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고 싶다. 고작 두어 시간의 묵상과 하루 일상의 분주한 시간들이 서로 비교가 될 수 없는 규모로 벌어지고, 더 많은 시간이 사적인 데 쓰이는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모든 시간은 이 시간을 위한 부속물일 뿐이다.
이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2-3).”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이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씀을 나는 이제 사랑한다. 그와 같이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아는 사탄은 유난히 새벽에 깨어나 말씀 앞에 앉는 시간이면 극성이다. 이를 실제 몸으로 시달리며 산다는 일은 한편으로는 복이다.
누구와 대화할 때면 나는 의사가 아닌 환자여서 감사한다. 저와 같은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내가 겪으며 몸소 체험하는 일이어서 감히 저를 다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감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누가 묻기를 왜 나으려 하지 않느냐 하는데, 난들 왜 이를 구하지 않았겠나?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 기도는 그만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이고 의이다. 이를 고통 중에 있는 상대에게는 차마 말로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늘 나의 기도는 내가 이제 보는 것을 저는 듣기를 바라고, 내가 듣는 것을 저 또한 보게 되기를 간구한다. 우린 더러 하는 일에 분주하여 감사를 잃곤 하는데,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많은 것보다 그 하나로 족하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1-22).” 하여 나는 누구를 위해 묵상을 하고 글을 쓰고 이를 남기지 않는다. 수시로 나의 양식을 삼고자 하는 일이다. 나아가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물론 저들이 내가 본 것을 듣고, 내가 들은 것을 함께 보고 주를 갈망하기를 구한다. 그럴지만 더 엄밀하게는 날 위해 준비하고, 쓰고, 정리하는 동안 주의 내주 임재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주시는 바 열어 보이시는 주제를 찾아, 초안을 잡고 구성을 하고, 성령이 함께 하심을 느낀다. 주석을 뒤져보고, 관련 있는 누구의 서적이나 설교를 찾아 읽거나 듣는 동안에도 주가 함께 하심을 느낀다. 더욱이 가장 우연 같으면서 필연적인 일은 한 주간에 듣게 되는 어떤 이의 사연과 만남과 그의 현실이 고스란히 설교의 예제가 되어 이해를 돕는다.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뒷받침은 삶에 있다. 그럴 때 저절로 무릎을 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저이의 이야기가 이 구절의 말씀이었구나! 하는. 누구와의 만남이 다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싶은.
말씀을 준수한다는 일은 내가 임의로 굳은 결심을 가지고 이행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나의 몸의 어떤 어려움과 연약함도 누구에게는 오히려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다. 때론 감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전에 같으면 자존심도 있고, 이를 숨기고 내색하지 않으려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고 살려 했다면 이젠 굳이 가리지 않는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이 말씀을 자주 곱씹는다.
나는 수없이 구하고 또 바랐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어릴 땐 그 하나님이 나는 참 무능하고 싫었다. 그런데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는 것을 어느 순간에 알게 되면서, 세상을 마주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 또한 전에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게 현실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안 믿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믿음으로 받기에도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다. 한데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이것이 첫 번째로는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분명히 어렵고 고통스러울 일인데, 이것으로 도리어 기뻐한다. 그것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이다. 이를 일일이 열거하기는 구차한 게 많아 생략한다. 하지만 믿는 사람이면 다 아는 공통의 내용이다.
또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누구와의 말문을 트는 데, 이젠 나의 외형적인 모습과 실제 살아왔던 암울한 시간들이 저의 마음을 열게 한다. 희한하게도 상대의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은 나도 저와 같다는 데서다. 내가 먼저 방어태세를 풀면 이는 가장 확실한 선제공격이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 두 번째로는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는 좀 어폐가 있는 소리다. 나도 실은 얼마나 정직하게 감사하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나의 약함으로 나의 이 이른 아침 시간에도 나는 절박하다. 나의 약함으로 나의 절박함이 나로 저의 영혼의 사연을 두고 허투루 잊지 않게 한다.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내 속이 볶여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직업적인 상담사나 직업적인(?) 목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유별난 감정이입 때문이다. 이를 이제는 주가 주신 나만의 특별한 권능으로 생각한다.
가령 저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의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체로 부모는 자식 이야기로, 아이들은 부모 이여기로, 저들의 문제는 각각 서로의 연관된 이야기로 파생된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데도, 자꾸 아픈 데 손이 가듯 마음이 쓰여 주께 구하고 저를 아뢴다. 저는 말하고 난 뒤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갔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의 말이 던진 여운으로 여전히 출렁거리며 진정할 수 없다. 기어이 약물을 먹고 진정시켜야 할 때도 있다. 의존할 대상이 내겐 필요하다. 그러니 주밖에 이런 이야기를 누가 알아줄까? 직업적으로 상담사가 되지 못하게 하심은 그 때문이다. 상대해야 하는 일이 나를 먼저 죽을 것처럼 힘들게 한다. 나는 그런 말을 사무적으로 듣고 적어두고 잊고 지낼 자신이 없다. 내차 마음을 찌르고, 내가 지쳐 주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내 안의 어떤 들볶임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우습지만 그저 그러려니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내가 아는 나는 냉정하다. 누가 어디서 죽었다는 말에도 그러려니 하고 만다. 그런데 내내 저의 말과 표정과 그 떨리던 눈빛까지도 생생하게 자꾸 기억이 나서 죽겠는데, 이를 주께 아니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까? 저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나를 살려주세요, 하고 빈다. 그러니 난, 나의 나 된 것에서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121:5-8).
이것이 세상에는 함정이 될 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주를 찾는 길라잡이다. 주의 안식을 맛보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더는 못 견디겠어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면 알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상대적으로 더는 개의치 않는 것들이 늘어가는 것이다. 더는 나로 내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긴다. 그것으로 힘들어 한탄하기도 하지만 그래서도 일찍 내려놓는다. 더는 가는 길을 멈추고 주저할 수 없다. 달려갈 길을 다하기까지 달음질을 멈출 수 없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를 노인 바울은 감옥에 갇혀 빌립보교회를 향해 전하는 서신에 썼다.
세상적으로야 가당치 않고 한심하기까지 한 일이지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 곧 나는 나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주가 쓰시고자 하면 이는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는 데 감복한다. 누가 어떤 어려움을 토로할 때, 나는 저의 어려움 너머의 주의 선하심을 짐작한다. 도리어 괜찮아요, 잘 지내요, 하는 자들의 가면을 보면 오싹해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주가 이루시는 일이다. 나는 다만 그의 도구이고 증인이다. 나는 이를 알면서 자주 안도한다.
자식 일에 또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에 대해서도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곧 나는 오늘 솔로몬 성전의 외형적인 규모와 그 공사기간이 아무리 성전건축보다 과하다 해도 이는 모두 부속물일 뿐임을 묵상한다. 글의 구성도 의도적으로 성전 건축 사이에 왕궁 건설을 13절 정도 언급하고 이어 성전건축과 그 기물에 들인 것을 열거하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그리 읽게 된다. 범사에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115: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면 모든 포함이 무엇을 우선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시편은 이에 따른 기간,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고 묻는 가운데 우리의 절실함을 부각시킨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1).
때론 힘에 겨워, 또 다시 이 길이 맞나 싶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침묵에서 오히려 간절함을 배가 된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때론 이 터무니없는 고통을 호소하며 이에 낫기를 구하고 문제 해결을 바라지만,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그것으로 오히려 나를 주 앞에 바로 세우시고자 하는,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2).
우리가 이를 주께 묻고 주 앞에 절규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복이었다. 내 부친의 사업 실패와 생을 포기하고자 했던 절박함이 돌리어 주의 부르심과 그 사명을 받는 자리가 되었던 것처럼, 또는 누구의 병마로 생사의 기로에서 고통 중에 주를 부르다 주가 맡기시는 일을 감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일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하나님의 일의 전개는 우리의 구상과 계획을 언제나 초월하신다. 고로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정작 나는 누구에게 참 평온하다. 얼굴이 좋아졌다. 하는 말을 들을 때면 그 숨은 뜻을 이제는 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4).
정작 나의 두려움은 내가 어떻게 될까가 아니라, 나로 내 원수 마귀가 이를 악용하여 누군가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까 하는 것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이를 아시고 주님은 기도를 명하시고,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 일로 성령이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신다. 이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다른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먹고 사는 일 전에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이 있음이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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