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왕상 8:56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언약궤는 그 자체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의 상징이다. 이를 솔로몬은 다윗의 장막에서 가져가 지어진 성소의 내소 곧 지성소 안에 안치하는 일을 행한다. 솔로몬 제위 11년의 일이다. 7월의 장막절 전, 그것도 성전 완성 한 달 전에 이 일을 행한다. 곧 8월에 성전에 완성되는데, 한 달 전에 우선 지성소를 먼저 완성하고 이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겨 오는 것이다. “열한째 해 불월 곧 여덟째 달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 건축이 다 끝났으니 솔로몬이 칠 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였더라(6:38).” 곧 외형적인 성전 건축이 완공되기도 전에 언약궤를 먼저 옮겨옴으로 비로소 장막절의 의미를 살린다. 장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억하고 가나안에서 안식하게 되었음을 감사절로 기억하는 날이다.
우리의 완전한 안식은 온전히 주를 모심으로 완성됨을 보여준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여기서 시온은 가나안 이방 땅 여부스 족속의 성채이다. 여부스 족속은 가나안 정복에서도 끝까지 그 땅을 차지하였던 족속이다. 당시 가난을 정복할 때 그 땅의 무리들이 더러 같이 섞여 살게 두고 용인하여 동거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었고 덫이 되어 괴롭혔다. 앞서 경고는 있었다.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3).” 이를 저들은 경솔하게 여겼고, 나름 그럴 수 있는 이유들이 있었다.
다윗은 이를 심각하게 여겨 저들 족속을 토벌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였다. 만일 여부스 족속과 같이 천혜의 자연지물을 이용하여 끝까지 저들이 남았다면 오늘의 이와 같은 축복은 없었을 것이다. 곧 죄와의 타협, 용인과 묵인은 우리 영혼을 결국 무장해제 시키며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를 바울은 오늘도 우리 삶이 여전하여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을 기정사실로 보았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에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4:14-18).”
이 놀라운 진리는 수천 년 전의 일이나 오늘이나 여전하여 우리의 참 평안을 해친다. 이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를 알고 믿음으로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민 33:55-56).” 이를 오늘 시편의 정의로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4:2-3).
이는 사실인데 은연중에 우리는 타협한다. 용인하고 이를 ‘사람 사는 세상’으로 이어서 ‘공익’이란 이름으로 막강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은 이에 우리가 성도로서 주 앞에서 싸워야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왕상 8:46).” 이를 바로 잡고 회개하여 주께 기도하는 백성이 되게 하려고,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42).” 이에 솔로몬은 성전 완공 한 달 전에 서둘러 주의 지성소를 먼저 완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곳에 모심이었다.
이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율법으로는 우리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은혜로만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고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다. 그렇다고 은혜가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거하겠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이에 단호하게 말하기를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2-3).”
더욱 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뤄야 하는 사명을 띈다.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곧 우린 자기연민과 싸워야 하고 스스로 허용하게 되는 ‘가벼움’으로부터 놓여나야 한다. 이 정도는 괜찮다 하는 허용이 마치 곰팡이균처럼 우리 영혼을 삽시간에 잠식한다. 이에 자기연민과의 싸움은 때로 침울함과 좌절과 음욕과 우리 안에 크고 작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의 범주를 확대한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교육에 따른 지식으로도, 나름의 성결을 통한 결의와 결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나는 솔로몬이 그래서 서둘러 주의 언약궤를 먼저 지성소에 모셔온 것은 우리 안에 어떤 사정이 있든지 주의 말씀이 함께 하시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가령 누가 문의를 한다. 이런저런 게 마음에 걸리면서 나는 은연중에 피하고자 생각이 먼저 든다. 회피다. 굳이 안할 수 있으면 안할 수 있을 때까지 이를 미루려 한다. 이때 아주 간소한 해결책은 주께 맡김이다. 내 안의 주의 영이 그리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원치 않으시는지 이를 우선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한데 기도도 미루고 회피하는 데 늘 나의 판단이 한몫한다. 이때도 먼저 주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도 나는 죽어라 하고 아침 묵상을 실천한다. 이는 유익하여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 일을 주도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주가 이루신다는 것, 그러한지 아닌지 우리가 어찌 판단할까?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딴청일 때가 흔하다. 이때 말씀을 틀어쥐어야 한다. 놓아주시지 않는 마음을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보잘것없고 사소한 나의 일상에서도 그 결정의 기준은 주를 인정하는 것에서 이뤄진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
누가 오기 시작하고 나는 저를 대하면서 늘 같은 갈등을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문제로 시달린다. 언제쯤 예배로 이끌고 주의 뜻을 전할까, 하는 조바심도 인다. 때를 기다린다는 것, 이는 참 조바심 나는 일이다. 한데 대나무도 꽃을 피우는 데 4년이 걸리고, 밭의 농작물도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니… 나의 싸움은 기다림이다. 동시에 언제든 감행할 수 있는 준비태세다. 이에 기준이 묵상이고 말씀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미디안 광야에서 나른한 영혼으로 방치된 듯 살아가던 모세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은 저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라 하신 것이다. 말이 되나? 저로 가라, 하실 때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 하는 반응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 결국은 말씀으로 저를 일깨우신다. 하면서 이르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14).” 다른 무슨 설명과 근거가 필요하겠나? 저만이 영원한 존재이시고, 독립적이고, 완전하며, 온 우주의 주인 되시며, 절대적인 진선미(眞善美)로서,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일을 행하심이다. ‘나는 나다.’ 하심은 다른 어떤 여지의 무엇으로도 방해가 될 수 없음이다.
이는 절대자 하나님만의 영광으로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이를 찬송함이 우리의 복이다. 오늘 솔로몬이 서둔 까닭도 이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현실은 가혹하여 약속과 다른 삶을 살았으나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곧 우리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7).”
그러니 언약궤를 옮겨 오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나 하지만, 이처럼 주 앞에 내 몸을 굴복시켜 말씀 앞에 앉히는 것, 보다 집중하고 정리하여 단순히 이 시간만을 위한 묵상이 아니기를 바라서 글쓰기로 이를 이어가는 일, 나의 이 사소함이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우선이었다. 어제도 누군가와 글쓰기를 하면서 저의 어려움을 물었을 때 정작 그 앞에 앉는 게 힘들다는 말에, 그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인 것을 설명하였다. 이와 같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곧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은 저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주의 통치의 범주가 우리의 행동반경이나 지식의 정도로는 미칠 수 없이 넓고 깊고 높고 길어서, 우리의 어떤 허물과 죄가 이를 막을 수 없다. 주를 인정하는 것은 그의 아름다우심 곧 구분의 속성, 자비하심을 조화를 바로 붙들고 아는 일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사탄의 어떤 공격도 이를 저지할 수 없다! 이는 주의 영광이다. 속성이며 거룩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는 권고가 아닌 명령이고,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말씀으로 우리의 올무가 되지 않고 덫이 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고전 16:16).” 나는 무엇보다 하루의 중심을 나로 말씀 앞에 앉히는 일로 이를 글로 쓰고 다시 읽으며 시시때때로 묵상할 수 있는 데 주안점을 둔다. 누구에게 권하는 것도 실은 이를 위한 것이었고, 이는 결국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5).” 곧 하나님의 뜻은 아주 간결하고 명료하여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한데 늘 우리의 감사를 앗아가는 것이 ‘저들처럼’, ‘저들과 같이’ 살고자 하는 데서 헛발을 딛곤 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는 동안 이와 전혀 무관하게 살 수는 없으나 허용은 더 큰 범주로 확대되면서 우리의 생활반경을 어지럽힌다. 누구를 대함에 있어 나는 나의 중심을 잃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내가 하려 하는 마음을 자제하고 주가 하시게 하기까지 나는 묵묵하여야 한다. 주말 내내 저이 아이 일로 마음이 쓰여 슬쩍 운을 뗐더니 저는 얼른 그 이야기를 도로 감추는 듯하였다. 더는 묻지 않았고 나는 주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곧 우리의 신실함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나는 미처 마음을 쓰지 못하고 심지어 잊어버리고 지냈는데도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루신다. 이에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어떠하든지 주만 바라고 주를 의뢰하는 것이 가장 선한 일인 것을 알게 된다. 곧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세상은 요지경이라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가 구설수에 오르고 목사가 주의 영광을 가리며, 사이비나 이단이 득세하는 지경에서 나는 저희를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설득하여 주 앞으로 나오게 할 수 없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처럼, 한 영혼을 얻는다는 것은 나를 비롯하여 전우주적인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을 안다. 앎으로 주를 바라고 바람으로 기꺼이 용납하되 허용하지는 않고, 때를 기다리며 주의 역사를 묵묵히 따른다. 나의 따름은 나도 잘 모르면서 그리 되게 하신 이가 또한 풀어 가시며 어찌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는지를…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나는 실패한다 해도 이를 발판으로 언젠가 누구에 의해 주의 역사는 언제든지 멈춤이 없으심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에 조급함은 사라지고 허튼 책임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곧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대가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9: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나는 오늘 솔로몬이 어째서 아직 완공 한 달여를 넘겨놓고 언약궤를 먼저 모셔왔는지를 그리 이해하고 있다. 곧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곧 주가 하신다. 내가 주 앞에 나아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에 오늘 시편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4:1).
본래 우리의 속성은 그러하여서 교회에 대한 반감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할 거였다. 오히려 주님은 역설적으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사람들은 고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는 곧 하나님의 통치라, 죄의 속성으로는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렇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그런 영혼을 돌이켜 주 앞에 세우기란, 인내와 덕으로 오래 참고 기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우리라고 다를 바 있었나?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곧 우리의 이와 같은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곧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판단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그러려니 하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2-3).
오늘 시인은 우리도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면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기도로밖에는 주와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는 성경이 약속하신 일이기도 하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곧 우리에겐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나를 저 앞에 세우셨고, 나로 돌이켜 주 앞으로 오게 하시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기도와 권유와 사랑이 소요되었음을 잘 안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렘 5:4-5).” 그러면서도 다들 나름의 신을 두고 사는 꼴이라,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이에,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4-5).
실은 저들도 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저들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7-8).” 스스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 떤다. 행여 나는 어떠한지.
하여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나도 내 의지로 행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그 한계 앞에서 절박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7).
곧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결국 우리의 가장 큰 값은 오래 참음으로 이루어질 터,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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