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왕상 11:4-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스스로의 사랑을 장담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다. 사람의 사랑은 보잘것없어서 좋을 때는 모를까 식으면 버릴 데도 없다. 솔로몬의 최후는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한 관계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2).” 하신 말씀의 경고를 사사로이 여긴 결과다. 저는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러니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결코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게 사랑이다. 스스로의 다짐과 장담을 그 무기로 삼지만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4-5).” 천하의 그 지혜자가 아무리 수천 편의 시와 격언과 놀라운 일을 행하였으면 무엇하겠나?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한 문장도 안 된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6).”
저는 나름 전략적으로 그리 하였을 것이고 스스로 일러 자신을 장담하며 자부하였을지 모르나 지나치게 많은 이방 여인과 화려한 생활과 말을 많이 두고 살았다. 이는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6-17).” 하나 스스로는 그럴 리 없고, 잘 간수하며 주 앞에서 그 마음이 떠날 리 없다고 하였을 테니. 저가 급전직하(急轉直下)로 후에 자신도 그럴지 몰랐을 것이다.
죄 앞에 무엇도 어떤 위인도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올무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누누이 부탁하기를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켰다 하는 저의 고백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에이, 설마’ 하는 순간에 이미 넘어졌다고 봐야 한다. 우린 그리 생겨먹은 속성을 가지고 산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곧 오늘 우리의 자유는 거저가 아니다. 주께서 피 값으로 사신 것이다. 다시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말씀이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이를 소홀히 여길 때 우린 누구라도 영락없다. 사탄을 이를 노리며 믿는 자의 곁을 맴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하여 스스로를 일러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7-18).” 이것이 우리 형편이고 실제이다.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하여 성경은 부디 이르시기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어제도, 내일도 문제가 아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을 두고 당부하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그럴까? 말씀을 소홀히 하고 이를 마음에 새기지 않을 때 삶은 따라오지 못한다. 앞서 분명히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그런데 누군 전도를 장담하고 믿음의 길로 인도하면 된다고 스스로 자부하는데….
누가 있었다. 저의 부모는 목회를 하였고 주 앞에 온전하기를 그 삶이 치열함으로 알 수 있었다. 저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런 부모의 신앙에 숨이 막힐 것 같다며 일찍이 교회를 떠나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모친은 큰 딸을 위해 죄에서 돌아올 수만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하였고, 이내 큰 딸은 서른 중반에 위암에 걸려 회개하고 돌아왔다. 어미의 마음은 찢어졌고 자신의 기도 때문이란 자책마저 들었다. 그 사이 둘째 딸이 안 믿는 가정의 안 믿는 남자와 교제하였는데, 이를 한사코 반대하여 둘은 헤어졌다가 큰 딸의 여파로 이내 잊지 못해하는 둘째 딸의 사랑을 승낙하여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안 믿는 가정으로 제사는 물론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 부유한 시부모는 자식들의 변변찮은 살림에 분에 넘치는 혼인과 혼수는 물론 결혼 후에도 생활자금은 물론 다니던 직장들도 그만두게 하고 ‘주식’으로 돈을 불리는 요령을 알게 하려 각각 1억씩을 주고 공부삼아(?) 투자를 익히라고 하였다. 당연히 둘째 딸은 결혼을 전제로 저로 주를 영접하게 하여 전도하는 목적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주말이면 시댁과 어울려 다니느라 주일은 뒷전이다.
큰 딸은 저 지경이 되었고 작은 딸은 이 모양이니 그 모친의 마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간장을 태울 뿐인데….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그러니 가장 저주의 위로가 ‘네가 지금 행복하면 돼!’ 하는 소리다. 말로 이 땅에 살면서 행복의 비결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일이다. 마치 아이에게는 참견과 잔소리가 심한 엄마가 없는 것이 행복이고, 청소년 시기에는 자기 하고 싶은 것으로 돈벌이를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그만이란 생각이 함정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나는 그래서 요즘 채널 여기저기에서 유명한 심리학자의 조언을 가장 크게 경계한다. 저가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사람의 문제는 일률적이지 않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으로 못 박아야 한다. 다소 황당한 소리이나 나는 두 아이에게 이를 분명히 하였고 날마다 호소하며 기도하기는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자식이라고 내 의지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 하나 내 의지로 어쩌지 못하고 사는 게 사람인데 하물며…. 그리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세상과 견주고 비교할 것 없다. 그러해서 궁벽한 살림으로 평생을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로 살아도 족하다. 그래봐야 인생은 끝이 있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끝이 있는 것은 두려울 게 없다. 정작 두려운 것은 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알고 있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그런 그의 노년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분명한 결과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그러니 다들 자기 판단과 기준으로 선택하고 사는 것이다. 어쩌겠나? ‘어쩌다 어른’이 되어 운명처럼 주어진 한 생을 사는 동안 ‘인생 뭐 있어?’ 하는 마음으로 안 믿는 자의 판단과 기준에도 일리가 있다는 둥 하면서 적당히 저들을 좇아 자녀를 양육하고 심지어는 죽어라 하고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며 희생한다 한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앞서 어느 모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예로 들었으나 어미의 심정으로야 왜 모르겠나만!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41:9).
사람, 그 입의 말에 절반도 미치지 못하고 사는 게 신뢰고 사랑이다. 스스로 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희생의 전제인 부모의 사랑도 헛되다. 하여 나는 모진 표현을 쓴다면 나의 부모의 사랑을 이제는 존경한다. 저들은 나를 버렸다. 자신들의 책임에서 놓아버렸다. 그렇지 않고는 주의 길을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니면 장애를 둔 아이의 엄마로 평생을 찌들어 살아야 했을 텐데, 특히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나에게는 없다. 누구보다 여린 여인이다.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한데 저를 그리 냉정하게 한 것은 주를 신뢰함이었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의 것이라! 하는 심정으로 우리 사 남매를 주 앞에 맡겨버렸다. 상대적으로 강인한 모습과 달리 나의 부친의 마음이 모질지 못하였다. 내가 어릴 때 그토록 속을 썩이고, 몹쓸짓을 하고 다니며, 심지어 가출도 여러 번 할 때 아버지는 돌아앉아 울기도 여러 번 하였다고 한다. 한데 나의 모친은 ‘죽은 자식 치고’, ‘없는 자식 치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과 겨루듯 들이댔다.
뒤늦게 들은 고백이지만, 그러는 나의 어머니는 일평생을 교회 마룻바닥이 닳도록 기도를 쉬지 않았다. 주 앞에서 운 눈물이 대해를 이룬다. 주께 아뢰며 주 앞에 두려워 떨며 아뢰었던 말들이 그 바다를 다 메울 정도로 가득하시다. 오늘의 나는 순전히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 덕분이란 걸 이제는 안다. 내가 아주 어릴 땐 나보다 여려서 내가 조금만 슬퍼하면 나보다 열배는 더 슬퍼하던 여인이다. 그게 싫어서 나는 세상 사람이 다 알아도 엄마만 모르면 된다고 할 정도였다. 한데 그런 나의 모친이 일절 내가 밖에서 놀림을 당하든지, 집에 들어오지 않든지, 주 앞에 그야말로 맡겨버리고,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만 전념하여 사모로서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 차갑고 모질기는 어떤 위인보다 야멸치다. 부친은 버럭, 했다가도 눈물짓곤 얼른 화해를 하는데, 모친은 한 번 아니다 하면 그만이었다. 가끔 아내는 어머니와 나 사이가 데면데면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손위 처남은 상대적으로 효자라.
하여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하신 주님의 말씀은 여러모로 함의하고 있는 뜻이 깊다. 결코 괜한 소리가 아니다. 잘한다고 굴면 잘해서 문제고, 못한다고 굴면 못해서도 문제인 게 가족이다…. 하나님보다 우선하게 되는 게 가족이고 보면, 모든 것으로도 언제든지 그러할 수 있다. 하여 성경은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렘 12:6).” 곧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가 아니면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 그저 행복하고 서로 사이좋게 잘 사는 게 우선이라면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게 낫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33:12).
누구라도 그게 아니면 죄 앞에 당당할 수 없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늙은 바울은 죽기 직전까지 행여 자신이 이를 놓칠까 하여 얼마나 노심초사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살았는지 모른다. 부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목회를 수십 년을 하고 은퇴를 하면, 저는 남다른가? 부친의 동료였고 나도 아는 목회자 몇 분의 노년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이는 평생을 일궈 온 주의 사역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자기 사욕에 빠져 심지어는 교회 돈 30억을 횡령하여 교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해 쫓긴다. 더 끔찍한 경우는 뒤늦게 평생을 붙들고 씨름하였던 복음을 버리고 피복음이 어떻고, 무슨 구원파가 어떨고 하며 쓸려가서, 평생을 자신이 잘못 알고 사역을 했다며 자책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누구는 노년에 사는 일이 비루하여 어디 대형몰 바닥청소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고 하니. 이와 같은 소식에 나는 눈물겹고 두렵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6).” 하시는 오늘 솔로몬의 노년에 대한 평가는 남의 말 같지 않다. 나는 아닐 거라 말할 수가 없어서 마음을 졸인다. 행여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하는 바울의 심정을 알겠다. 그러니 저는 늙어서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오늘 이 길을 바르게 가고 있다면 이와 같은 두려움이 떠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저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하는 따위로 세상 사람들의 이치나 판단, 심리요인이나 무슨 성경테스트니 운세 따위에 귀를 기울이다는, 저가 믿는 자이든지 안 믿는 자이든지, 다른 신을 섬기는 자이든지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이든지… 그저 세상적으로 훌륭하고 일리가 있다 싶으면 옳거니 하고 여기는 자들에게 성경은 경고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런데도 에이 설마, 할 텐가? 스스로는 괜찮다고 자부할 텐가?
앞서 내가 기억하는 부친의 친구 목회자들은 자주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같이 새벽예배를 공유하고, 어떻게 하면 주 앞에서 주가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할까 하고 필사적으로 애썼던 이들이다. 남자 어른들 대여섯이 며칠씩 우리 집, 아버지의 좁은 서재에 모여 앉아 울고 불며 통성으로 기도하다, 서로 교회가 연합하여 전교인 수련회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주 앞에서 맡기신 사명을 다할까, 기를 쓰던 분들이다. 그 중에 누군 자식 한둘을 주의 종으로 세우기는 하였으나 우리처럼 네 남매가 (끝으로는 나 같은 죄인까지) 모두 주의 말씀 앞에 붙들린 경우는 없다. 그리고 부친은 곧 여든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성경 강해를 원고로 남기며 자녀들에게 설교 자료로 주시기도 하는데… 나는 저의 훈장이 가난이라 생각한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은 내 아버지의 지렛대였고, 이제는 자식들의 목회를 받치는 바지랑대이다. 얼핏 들으면 이해가 안 가는 소린데, 가난하여 다른 궁리를 못한다. 가난이 적당한 것은 부유함이 적당한 것보다 복 위에 복이다. 세상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보란 듯 잘들 살지만, 나의 부친이 이내 곁길로 가지 못하였고, 오늘도 말씀에 붙들려 하루의 대부분을 더듬더듬 성경을 묵상하고 강해서를 작성할 수 있는 것은 적당한 가난으로 복이었다.
누구보다 부유하고 잘나고 지혜로웠던 솔로몬의 최후를 읽으면서 새삼 나의 부친과 나의 복을 생각하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이 말씀 앞에 백 번 천 번 아멘, 한다. 누군들 사느라 사는 데 드는 비용이나 건강이나 윤택함을 두고 바라는 마음이 없겠나? 당연히 나도 돈도 달라, 건강도 달라, 성공과 출세도 달라 기도한다. 그럴 때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니까, 가끔은 하나님과 겨루듯 마음이 상하고, 상한 마음은 정신과 치료를 받아가면서도 굽힐 줄을 모른다. 한데 주님은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시니 이 무슨 궤변인가? 내 생각엔 이게 나을 것 같고, 저리 하면 교회도 살고 하나님도 더 드러날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것 같다. 그럼 또 주님은 이르시기를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너의 약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시는 것이다.
하긴 내가 살만하면 이 길 가고 있겠나? 이 이른 아침에 화들짝 놀라 앉아 말씀 앞에 씨름하겠나? 나의 약함이 나를 주 앞으로 이끈다. 상대적을 저 위대한 솔로몬의 노년이 참으로 초라한 것을 보면서 더더욱 두려움을 느낀다.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그의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지혜는 솔로몬의 실록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41).” 고작 이 한 줄의 정리로 끝날 인생이었는데… 뭐 그리 자신을 자신하며 살았던 것일까? 갑자기 우울한 마음마저 든다. 우울증에 늘 시달려 찬송 시를 수백 편 쓰며 주가 주신 생을 지탱하였던 윌리엄 쿠퍼의 찬송 시처럼, 부디 나의 묵상글이, 일상이, 남은 모든 생애가 그러하기를.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
이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노래로
날 구속 하신 은혜를 늘 찬송 하겠네
늘 찬송 하겠네 늘 찬송 하겠네
날 구속 하신 은혜를 늘 찬송 하겠네
-윌리엄쿠퍼, 새찬송가 258장.
이를 오늘 [다윗의 기도]로 읊조린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17:1).
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직하심에 호소하는 삶이었다. 자신의 치적으로 승부를 본 사람이 아니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2).
이는 주께서 ‘그리 여겨주심’으로 우리 또한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과 같다. 곧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그러므로 우리의 직면과 회개가 주의 권능을 발동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는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고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3).
그 마음만으로도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하여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곧 주를 의식하는 삶으로,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4-5).
이에,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6-7).
내게 응답하실 것을 믿고,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저 한 영혼을 두고 주 앞에서 씨름하는 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하면 반드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이로써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나는 이 구절의 말씀이 노년에 나의 부모, 특히 나의 어머니의 말씀으로 주신 것처럼 다가온다. 가진 것 없고, 온갖 질병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그 증거가 모친의 모습이고 남은 생이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8-13).
이는 곧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러니 오늘 나의 사랑하는 마음이 정작 내 것이 아니기를. 온전히 주의 사랑이기를. 그 마음으로, 주의 권능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나를 구원으로 이끄신 것 같이 저를 붙들어 오게 하실 것임을.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4).
세상은 다들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것 같으나,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2).” 그것은 이 땅의 원리가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전 2:13-14).” 그러므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잘 사는 개돼지로 살다 갈 것인지, 존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 갈 것인지,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5).” 그리하여,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5:3).
이와 같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7: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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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0) | 2022.07.13 |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0) | 2022.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