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왕상 13:33-34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8, 12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왕국을 강화하기 위해 우상숭배를 장려하였다. 이는 백성들을 규합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주의 제사장들을 임으로 뽑아 아무나 사용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성공하였고,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33).” 그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저의 통치는 순탄한 듯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벧엘에서 분향하고 있는 여로보암에게 유다 출신의 한 선지자를 보내셨다. 저가 예언하여 이르기를 단이 갈라지고 벧엘의 제단이 훼파될 것을 선포한다(1-5). 여로보암은 선지자를 회유하여 그 일을 수습하고자 하나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다른 길로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게 된다(6-10).
길을 떠난 선지자는 물도 마시지 말고 음식도 먹지 말고 가던 길을 돌이키지도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7-10). 그때 벧엘에 늙은 선지자가 상수리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 저를 꾀여 거짓말로 자기 집으로 들여 먹이고 쉬게 하므로 결국 죽음을 당하게 한다(11-19). 이는 저를 시험하심이었고, 결국 꾐에 넘어가 귀환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20-25).
당혹스러운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를 때, 비록 그것이 부주의하였다 하나 결과는 두렵다. 벧엘의 늙은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도 죽으면 그 뼈를 그와 같이 장사하기를 유언으로 남긴다(26-32). 이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장차 요시야가 왕이 되어 우상숭배자들을 불사를 때 자신의 뼈가 하나님의 사람의 뼈 곁에 보존되기를 바람에서였다. 이는 이루어져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왕하 23:17-18).” 오늘 본문 33-34절은 일련을 사건 앞에서도 여로보암은 이를 뉘우치지 못하고 악을 행하였고, 결국은 파멸에 이르며 심판을 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왕상 14:1-20).
대략적으로 본문 내용을 살피면서 말세가 되면 성직자들이 득세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로마의 멸망도 혹자의 비평처럼 국민의 반 이상이 성직자가 되었고, 이는 그 성직자 일이 권력이 되고 돈이 되는 직업군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레위 족속으로 한정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성직을 수행하게 하던 것인데,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불의를 하나님은 묵과하시지 않는다. 민족이 망하고 가문이 멸족하는 경우도 그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이를 두려워하고 맡기신 이의 거룩하신 뜻을 섬기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실제 너무 많은 목사와 목사 후보생들이 배출되고 그 임의로 직업군이 형성됨에 따른 다양한 미혹들을 보게 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것은 너무 쉽게(?) 목사가 되고, 너무 많은 사람이 이를 선택하며, 그에 따른 과부화로 한 교회에서 목사 청빙이 있을 때 수백대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고, 점점 고학력과 사회적인 스펙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헌신은 사라지고 영광만 바람으로 더러는(많은 사람은 결코 아니라 생각하면서) 저가 타는 차의 배기량과 교회 크기와 인원수로 목회의 성공여부를 결정한다. 또한 노회장 선거라도 치르려고 하면 세상 여느 부류들보다 돈선거가 판을 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나 된 것에 감사한다. 말씀으로 그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 가운데 나는 이 부분을 오래 머금고 우물거리듯 되뇌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9:8, 12).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그 가는 길의 궤적으로 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이다. 기준이 불분명하면 자기들 마음대로 행한다. 이는 오늘 여로보암의 정책과도 같다.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도 다르지 않다. 이에 동조하고 따르는 백성들도 많다. 대대로 이어져 오던 말씀의 정도가 뒤죽박죽이 된다.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이를 읽고 쓰고 마음에 새기며 삶으로 묵상하고 실제로 사는 게 중요한 일이겠는데, 설교는 날로 빈약하고 교회는 비대해져 온갖 새로운 시스템이 난무하다. 믿음의 조상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하란은 우상의 땅으로 저는 그곳에서 믿음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다. 이에 말씀을 따랐다는 것으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이는 나름의 어떤 이상과 꿈을 실현하는 것과 다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하고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아도 말씀 앞에 복종함은 자기 생각과 판단을 멈추는 일이다. 앞날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하나님의 명령은 부당한 것 같아도 온당하고, 부실한 듯 현실적이지 못하여도 온전하시다. 주가 더하시는 권능으로 가는 길이 여기 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어떤 일을 행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주의 권능이 우선하여 중요하다.
필리핀에서 사역하는 동생 목사가 두어 주 한국에 들어왔다. 어제는 인천으로 와서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부모가 두 손 들고 포기한 아이들을 받아 필리핀에서 믿음으로 양육하고, 바른 삶을 살게 하는 일이 저에게 주신 은사였다. 한데 한 아이를 몇 년째 공들여 바로잡는다고 잡고, 신앙 가운데 씨름하며 키웠다. 그러다 이번에 비자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같이 한국에 들어온 모양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과장하여 악담하고, 돌아가기를 거부하였다. 부모는 아이의 말만 듣고 결국 그리 결정하였다. 아이는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 일명 ADHD가 있었다. 학습장애는 물론 과잉행동장애는 판정이 어려우나 판별은 간단하다. 산만함은 물론 과다 행동과 충동적인 행동과 자기 분에 못 이겨 발악을 하는 분노조절능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저들 부모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필리핀으로 아이를 보냈던 것이고, 동생은 그런 아이들(?)을 맡아 같이 먹고 자고 신앙 안에서 양육하여 제도권의 학교로 편입시키고, 영어나 외국어로 저의 미래를 바꿔나갔던 것이다.
물론 부모 심정은 이해한다. 또한 아이의 고약한 마음도 이해를 한다. 그런데 결국 우려했던 것처럼 아이는 집에 돌아오자 예전 생활-자기 마음대로 굴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갔고, 아이의 과장된 말들로 그 엄마는 같이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시달리듯 그런 사람(아이의 문제는 곧 그 부모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게 한다)의 시도 때도 없는 전화에 동생은 결국 그리 결정한 데 대해 더는 아이에 대한 변호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래놓고는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던 모양이다. 저의 처, 사모는 솔직히 아이가 같이 안 들어가기로 한 것으로 되레 안도하고 감사하였다. 아이로 인해 사모가 노이로제에 걸릴 판이다. 한 사람을 받아낸다는 일은 이처럼 끔찍한 일이다. 단지 저 아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저를 둘러싼 온 우주-가적과 친구와 가치와 생활패턴이 엮인 실타래처럼 따라온다. 이는 인내를 가지고 풀어내야 하는 일이다. 이때 아이도 아이를 맡은 이도 죽을 맛이다. 주가 주시는 권능으로가 아니면, 주의 선하신 뜻을 이행할 수 없다. 우리 감정으로는 격하여져 이탈한다. 이런 상태는 아동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된다. 정신과적인 병 이전에 죄의 결과다.
나는 그런저런 소식을 들으면서 차마 뭐라 거들 수 없었던 것이 그러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이는 대부분 그 부모의 영향이 크고 가족사의 문제로까지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된다. 주의력 결핍은 그러다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는 카펫 밑으로 밀어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어 아스퍼거장애로 확대될 수도 있고 분노조절장애는 물론 피해망상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충동조절이 어렵고 그러다 환청과 환각까지 일면 조현이 되는 것이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 이를 다루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을 하니…’ 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하듯 되뇌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그 당사자와 하나님과의 일로 주가 맡기심에 우린 다만 준행할 따름이다. 아이 일로 눈물을 보이는 동생을 보며, 다들 잘 됐다고 하는데 목회지로서는 아이의 영혼이 안타까운 것이다. 한두 해만 더 견디면서 적응하면 제몫의 맡기신 삶을 잘 수행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사명자만이 아는 절규다. 겉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 ‘그런 애’와 같이 한 집에 살면서 어르고 달래고 야단치고 다독이며 한 사람으로, 그 한 영혼을 바로 세운다는 일이 보통 일인가? 결국 그 부모들도 포기하는 판국에 우리 안에 두시는 ‘영혼 사랑의 마음’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해도 모자랄 판에….
그리하여 우리는 주께 구한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안 믿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다. 동생은 모처럼 가족들과 여행 중에도 수시로 아이엄마의 전화로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그때마다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어찌 이런 사람을 상대하겠나 싶었을 일이다. 요즘 부쩍 주변에도 그렇고 ‘그런 아이’나 ‘그런 부모’가 늘어간다. 이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그러니 어찌 해볼까 하여 용하다는 점술이나 누구의 어떤 말에 넘어가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면서, 모두는 자진하여 신경쇠약증상을 보인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부적 한두 개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꼴이다. 오늘 여로보암의 치적이 다를 게 없다. 다들 기적을 바라고 말씀은 거절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희한하지? 그런 아이의 경우 영락없이 그 이상이 부모가 또는 가정사가 있기 마련인데 절대적인 공통점은, 자신들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누구 탓, 무슨 일 때문이지 자신도 억울한 피해자일 뿐이다. 무슨 말을 한들 들을 리 없고 들릴 리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그 영혼의 문제로 죄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회개도 은사고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리 마음을 주셔야 가능한 일이지, 그저 다 남 탓이다. 저는 억울한 영혼이다. 아,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4-5).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101:3).
종종 고백하지만 나 또한 그러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그러는 동안 주의 은혜가 어떠하셨는가를 이제야 살며 배우며 사랑하게 된다. 그때마다 주가 예비하셨던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고, 나의 그런저런 문제가 오늘의 이런저런 공감에 바탕이 된다. 가끔 표현하지만 나는 의사가 아니라, 같은 환자인 것에 감사한다. 어제도 무슨 이야기 끝에 심리검사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 일로 목사고시에서 두 번이나 낙방을 치렀다. 여전하다 한들 나로 주의 종 삼으신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코 내가 온전하다고 여기지 않듯이 누구도 온전한 상태로 살 수 없음을 잘 안다. 두 종류로 나뉜다. 이를 인정하는 경우와 이를 부정하는 경우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면 반은 해결이 된다. 끝내 부정하는 자는 자기변호에 정신이 팔려 결코 누구의 권함도 듣지 않는다. 가장 희한한 부모를 보았는데 아이가 조현 판명으로 받고 정신과에 수시로 입원하는데도 자신들은 문제없다고 자부한다. 그게 다 팔자소관이라 한다.
한도 끝도 없는 이런 말은 이제 사회에 만연하다. 저마다 정상이라 외치며 사니, 그래서도 미쳤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을 이해하기는커녕 저들이 한데 텐트를 치고 광화문에 모여 성행위를 즐겼다고, 저들 곁에 텐트를 치고 기자들을 불러 이를 퍼포먼스 하며 내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은 모 유명한 유튜버로 연일 화제다. 다들 미쳐가는 세상이다. 그런 이가 대통령실에 근무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증상은 여로보암이나 르호보암을 능가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참으로 가관이다. 성경은 이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 그리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덴 이유가 있다. 솔로몬을 봐도 알 수 있었듯이 절대 따라하지 않을 것 같지만 어느새 같이 걷고 있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 경각심이 없다면 정상인 줄 아나 정상이 아니다. 두렵고 떨리지 않으면 저는 죽은 믿음이거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이다. 이는 또한 자기 인생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고스란히 자식의 인생으로 이어진다. 그 자식의 자식에까지 이어지면서 죄는 마치 대물림을 하듯 파생될 수밖에 없다. 이를 끊지 않으면 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7:5).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7:31).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40:2).
이와 같은 기도가 내 것이 되어야 한다. 감사한 일은 이를 바란다. 오늘에 이르러 헤아려 그 마음을 알고, 주께 대신 간구하며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사명자의 일이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60).
이 이른 아침 말씀 앞에 앉히심이 내겐 가장 큰 복이었다. 그러기 위해 세상 즐거움은 이제 크지가 않다. 저녁들을 먹고 다들 쇼핑도 할 겸 저쪽 어디 쇼핑몰에 가자고 하는데, 나는 평소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에겐 가끔 미안한 마음이지만 딸애와 같이 따라 나서며 나도 같이 가자고 조르는 것을 마다한 것이다. 가끔은 서럽고 외롭고 답답하기도 한데…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나는 동생의 이야기에서 또 어느 엄마는 이제 눈물로 후회를 한다고 한다. 벌써 고2가 되어 아이는 머리가 굵었고, 술담배에 늦도록 돈번다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미래도 없이 사는 아들을 보면서 그때 돌아오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를 한다고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누가 한 치 앞을 알겠나? ‘그런 아이’를 덩달아 같이 맡아서 먹이고 입히며 같이 산다는 일은 결코 쉬운 사역이 아닐 것이다. 한데 이게 또 희한한 것은 같은 일에서도 서로 다른 개별적인 마음으로 주의 일을 행하심을 본다.
가령 아내에게 공부하러 오는 아이 이야기다. 자폐는 아니라는데 그 이상의 증상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아이다. 좋을 땐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뭔가 기분이 틀어지면 막무가내로 나자빠져 뒹군다. 나는 몇 번 아이를 돌려보내라며 화를 낸 적도 있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그 이상의 마음을 주셨다. 나의 극성에 말하기를, 여기서도 돌려보내면 저 애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것과 그러니 아이엄마 심정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한 술 더 떠서 아내는 그 애가 다른 애들보다(?) 좋다고 한다! 그러니 서로가 같은 길을 가면서도 각기 다른 마음은 주시는 일이라, 서로 달라서 나는 가끔씩 내가 목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내가 더 커 보인다. 누구에겐 마음이 더 가고 덜 가고, 나는 이기적인데, 대체 나 같은 자가 어찌 목사로 살까? 결국은 말씀으로밖에 묶어세울 길이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1:28).” 그러니 또 나를 수시로 점검하게 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1-4).
오늘 시편은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더하시는 일반은총도 있고, 이는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골고루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오늘의 어떤 현상, 그 이상의 세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아이의 문제? 혹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문제? 이는 마치 경보음 같은 것이다. 이를 듣고 대피할 수 있는 것이 특별은총이다.
세상은 요지경으로 별의 별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이에 동조하여 진영이 나뉘고 서로 갈려 차마 못할 일도 거침이 없는데… 그런 점에서도 오늘 시편은 놀랍다. 우선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곧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안다. 저들은 생을 다하는 동안 이를 잊지 않고 그 역할에 충일하다. 곧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이 놀라운 시적 의미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연보다 못한 인지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들도 아침이 오면 나뭇가지를 오가며 주를 찬송한다. 여름나무들은 푸르러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미한다. 어느 훗날 우리는 저 자연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 13:28-29).” 나무를 보고 좀 배우라는 말씀이다.
당최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보고도 듣지 못하고 듣고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함이다. 사람만 그런다. 하다못해 보도블록 사이의 조뱅이풀들도 그 좁은 틈새에서 주신 바 그 생명을 다한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5-6).
모든 자연도 맡기신 사명을 다하며 준행할 때, 과연 우리는 부모로서 또는 한 생으로서 얼마나 충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4-25).” 저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지만, 말씀 없이는 모든 게 허사다. 주를 경외함으로 바른 길로 간다. 하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싫다는 데 어쩌겠나? 우린 다만 주가 맡기시고 더하시는 일에 조뱅이풀이면 어떻고, 하늘 가득 드리우는 햇살이면 어떻겠나? 주신 사명에 충실할 뿐이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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