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전봉석 2022. 7. 19. 04:56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왕상 15:11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 21:13

 

 

엎치락뒤치락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왕권이 바뀌면서 서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다. 그러다 남유다의 아사가 등장하면서 그야말로 신선하다. 저는 우선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12).” 하는 평가로 시작된다. 그리고 한 일은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는 일과 ‘우상’을 없애는 일, 곧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다(13). 그러나 여전히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였다. 그럼에도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14). 이러한 평가가 신선할 정도로 희귀하게 들리는 것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의 싸움은 날마다 이는 마음의 일이다. 번번이 실패하고 또 넘어진다. 마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의 사적들과 같다. 그러다 어떤 날, 혹은 얼마 동안 그나마 ‘아사’ 같은 날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날마다의 싸움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를 이뤄가는 것이 성화의 날들이 되고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1-22).” 쉽지 않다. 날마다 실패하고 또 넘어진다. 다음 왕이 일어나도 마찬가지처럼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의 반복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할 뿐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어쩌다 우린 이 지경이 된 것일까?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 2:18).” 그러다 아사와 같은 날을 맞으면 그런 날이 오히려 신기하고 신선할 정도이니, 저의 행함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

 

우선은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허용하지 않고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먼저는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냈다.’ 이는 성적인 타락의 뿌리를 제거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엄연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둘이 하나 되는 것을 순리로 삼으셨다. 이를 취향과 쾌락으로 역리로 바꾼 것은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인 타락은 모든 악의 밑거름처럼 죄의 토양이 된다. 인본주의의 절정이다. 무엇 때문인가?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하는 바울의 기도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그런 걸 서로 위하느라 아니라, 괜찮다 하며 부추기고 법적으로까지 이를 보호하려 하니… 끝 간 데 없이 뻗어가는 게 욕정이다.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일만 그런가? 이성애는 그럼 합당한가? 모 당 대표란 이가 성상납을 받은 일로 연일 뉴스가 되는 게 현실인데, 실은 그 역사가 인류의 시작과 함께 있어왔던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은 아사가 한 일이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는 일이었다.’ 이는 말이 쉽지 상당한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다.’ 이와 같은 영적 정화운동은 참으로 과감한 결단과 엄청난 실천의 결과로 이뤄진 일이다. 일찍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상을 만들거나 섬기는 것에 대하여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 18).”

 

곧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즉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곧 주의 지도하심으로 우리 또한 이러한 날-다윗과 같은 날을 살 수 있다. 성경은 일러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 15:28-29).” 과연 이 일이 너무 과하고 무거운 일인가?

 

어쩌면 아사가 행한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마땅한 일인데 앞뒤로 모든 왕들이나 사람들이 그리 행하며 우상과 음욕과 방탕한 삶을 일삼으니 그것이 일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흔적으로 아사의 아쉬움도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왕상 15:14).” 그럼에도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하니, 저가 다하지 못한 일로 감당해야 할 몫은 다시 그 후대의 일이 되는 셈이다. 부분적인 순종이 이내 불순종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한다. 우리 사람이 온전할 수 없는 이유겠다. 12절로 15절 사이의 내용으로 아사의 종교개혁과 그 청결함과 정직함은 인정되나 우상숭배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산당을 없애지 못한 데는 여전히 다를 바 없는 과오로 남는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결국 우리의 행함이란 매일 매순간이 치열한 사투와 같다. 그런 가운데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어찌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마음에 합한 자’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갈망과 갈급함을 갖게 한다.

 

여기서 볼 때 개인적인 혁신, 변화는 자신과 자기 주변으로부터 이뤄진다. 어머니의 아세라 상을 척결하고 대부분의 성적인 죄악을 척결하는 데는 자기 살을 먼저 도려내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5).” 하여 우리 삶에 ‘하나님만 섬긴다’는 일이 어려운 듯하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윗도 아브라함도 결코 완전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 여겨주실 수 있는, 저들의 중심을 보신 것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7:4-5).

 

결국은 말씀을 따라 살려하는 의지, 그에 따른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은 그리스도인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연적이다. 그럴 때 우린 우리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이를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며,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6).

 

주께 아뢰고 또 기도함으로써 응답을 따라 사는 일이다. 이는 결코 피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알고 이를 제거할 때 이뤄진다. 분명히 성경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대하 14:3-5).” 곧 우리의 평안은 우리 삶의 정화와 개혁으로 이뤄진다. 단지 피상적인 일이 아니다. 개념의 문제도 아니다. 아사는 어쩌면 나름의 이유로 산당을 제거하지 못했을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따른 시기라… 또는 백성들이 좀 더 원활하게 주를 경배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적인 배려와 나름의 신앙적인 판단으로 그러했을 수 있다. 한데  엄연히 아닌 것은 우리의 판단이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 12:11).” 예배 처소와 드려지는 예물과 그 규례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 그 뜻에 합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을 위한,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예배는 없다. 분명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그걸 마치 기독교 또한 종교의 하나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위로를 얻는 신앙쯤으로 여길 때 이와 같은 타협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개혁은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일이다. 이 정도는, 하고 예외가 있으면 그것이 곧 남겨진 산당이 된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아주 작은 배려나 관용이 죄악의 온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는 첫째, 이 세대를 따르지 않음으로 가능하다. 둘째,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하다. 셋째, 변화는 받는 것으로 하나님을 선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넷째, 이로써 우린 기뻐한다. 다섯째, 이와 같은 기쁨이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그러므로 여섯째,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분별해야 한다.

 

늘 그렇듯 살던 대로 사는 태도는 그릇가게 한다. 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여기서 두 가지, 하나는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생각해야 함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우선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자식을 사랑하는 일보다, 나의 이상과 꿈을 향해 가는 것보다 전적으로 우선하는 것. 이를 위해서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이는 곧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물리치는 일이다. ‘그럴 수 있지, 그 정도는…’ 하는 따위의 허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법이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가령 나는 병적으로 예민하다. 누구와의 만남을 앞서 준비하고 다른 것을 미루는 덴 그래서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일주일 대부분 오전이 찼다. 오늘은 누가 오고, 어제도 누가 와야 했다. 한데 당일에 무슨 일로 못 오게 됐다거나 아예 우리의 만남을 잊고 있을 때 내 안은 복잡해진다. 어제도 문득 새벽에 나오면서 낚시라도 갔으면 하고 마음이 좀 그랬다. 그런데 오기로 한 이가 무슨 일로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순간 어렵다. 저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에 앞서 참 많이 분주하다. 대접할 차를 준비하고, 무슨 말을 할까 생각을 하고, 이를 두고 마음을 준비하느라 주의 이름을 여러 번 되뇐다. 그러다 약속이 어그러지면 순간 나는 허공에 뜬다. 이는 마치 연애하는 사람 같다. 하다못해 낚시를 가더라도 나는 준비할 얼음물과 간식과 혹시 몰라 입을 옷을 한 벌 더 챙기고… 물론 이러는 내가 병적이라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내가 아이들을 맞을 때 밖에 기다리게 한다거나 턱 받쳐 정신없이 준비하는 것에 질겁한다. 최소한 나는 30분 전에 준비를 마치고 기다린다. 한 사람을 만나고 또는 같이 어떤 말을,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결코 ‘어쩌다’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발적인 죄는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순간 욱, 하고 이는 감정 때문이라 해도 그것 역시 누적된 습관과 성품의 결과다. 하물며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는 말씀으로도 미뤄, 우린 나름 오늘 본문의 ‘아사’처럼은 다투어야 한다. 하물며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대충 어슬렁거리듯 저를 마주하고 그 앞에 조아려 예배한다는 일이 가당키나 할까? 나름 한다고 해도 의인은 하나도 없는 판국에 빤히 이를 알면서 태평스럽고 안이하다면, 그야말로 한 순간 훅, 간다.

 

솔로몬은 뒤늦게 이를 깨달았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부디 저의 삶이 일관되게 그러했더라면, 오늘의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 텐데! 마치 무슨 릴레이 경주하듯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이 죄를 견주듯 악을 행한다. 어쩜 그리도 똑똑했던 솔로몬 뒤를 이어 이처럼 분열이 일어나고 각각의 죄악에 빠져 살게 된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나는 날마다 아침마다 구한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한순간 또 허물어지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안다. 부디 하루씩, 아니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지는 삶이되기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비록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하여 어떤 날은 붓을 들고 성구를 옮겨 글씨를 쓰면서 마음을 붙든다. 하루 한 구절이라도 그 날의 지침을 삼는다. 그럼에도 번번이 넘어지기 일쑤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민 23:19-20).”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21:1).

 

우리 하나님은 주를 찾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때론 죄악에 물들어 주를 멀리하면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느 9:27).” 하여,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6).

 

결국은 기도밖에 없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주의 말씀 붙들고 산다고 사는데 번번이 또 죄에 빠질 때,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21:2).

 

오늘 시인은 기도로 주 앞에 엎드린다. 하면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이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4-15).

 

이를 성경이 보장하시는 이상, 오늘 하루의 싸움도 주가 승리로 이끄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3-4).

 

이로써 바울의 증언이 입증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럴 수 있는 것까지도 주가 주시고 함께 하실 때 가능하였다. 내 의지로는 어림도 없다. 그러나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5-6).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와 같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눈에 자주 띄는 곳에 두고, 살아가면서 사는 동안에 번번이 또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이에,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2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