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왕상 16:34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 22:26
성경은 이루어진다. 벧엘 사람 히엘이란 자가 여리고를 건축하려 터를 닦고 그 문을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본래 여리고 성문은 이스라엘이 가난안을 점령할 때 제일 먼저 여리고를 함락시키고 그 문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후 다시 이를 재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여호수아는 예언하였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수 6:26).” 한데 오늘 본문에서 히엘이 이를 무시하고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고 문을 세우려 한다. 벌써 500년이 지났으나 저는 이에 대한 예언을 들었을 것이고 알면서도 그리 행한다. 이에 말씀이 이루어짐은 오늘에도 동일하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은혜이다. 믿음이란 주를 경외함이고, 경외함이란 주신 바 그 삶을 두려움으로 온전히 이루어가는 일이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3-14).” 우리 앞에 이러나는 일련의 사연은 모두 그 의미를 갖는다. 어쩌다, 우연히, 저절로 그리 된 것은 없다. 그런저런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이를 귓등으로 듣고 마는 경우 어디선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뒤에 깨닫는다. 아차, 싶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자리이다. 말씀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며 이 모든 말씀은 이루어진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우리 안에 주저하는 마음과 두려움과 부담은 당연하다. 특히 주의 일을 준행하는 데 있어 수월하다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막힘이 있고 걸림이 생겨 끊임없이 회의하고 갈등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누구의 주저함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해하는데, 놓을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저의 모습이 안 됐다. 실은 사역을 감당한다는 일은 죽을 때까지 그 마음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자신이 감당할 수가 없다. 주 앞에 세우고 붙들어두지 않으면 은혜 받고 일어서기 무섭게 공중에 나는 새가 낚아채 간다. 사탄은 틈을 노리는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빈번한 왕권의 전환이 저들의 실정을 말해주고 있다. 누구는 2년 누구는 채 며칠짜리 왕권을 휘두르다 죽는다. 보면 모든 게 탐욕과 분열과 분쟁이다. 누가 죽자 누가 왕궈을 차지하려 분열하고, 누가 정권을 차지했는가 싶더니 더 이어 다른 이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나는 어제 누구와의 대화에서 결국은 주의 일이 아니라 자기 위로를 바라는 데서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저가 느끼는 문제는 어제오늘이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연속될 문제다. 이를 자꾸 헤집어 같은 말로 한탄하고 실의에 빠지면 그 심령만 상하고, 그리 우리 영혼은 고착된다. 하나님 앞에 모든 걸 맡기고, 죽으나 사나 이 길을 가든지… 안 그러고도 살 수 있겠으면 그리 하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가운데 아이까지 세 가족이 모두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심각하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누가 있었다. 저는 일찍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럼 그럴수록 입만 열면 돈 벌 궁리고, 이를 위해 무엇도 안중에 없다. 처가의 누가 자폐아이를 키우는 것을 두고 고약한 말로 상처를 주고 우습게 여기며 한심해하더니, 그 고약한 심보가 고스란히 자기 자식에게로 전가되었다. 아이가 다섯인데 셋째가 결국 검사를 받을 예정이고, 나머지 아이들도 전조를 보인다. 그럼에도 저는 거침이 없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안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내가 오금이 저린다. 저 자신이야 본래 그 모양이라 그렇다치고, 자식들은 대체 무슨 날벼락인가?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 16:34)." 결국 아비 히엘로 맏아들 아비람이 죽고 둘째아들 스굽이 죽는다,
결국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말씀이 우스울 때 삶은 그 보응으로 값을 지불하며 산다. 별 수 없다. 500년이 지난 후 나름은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한 일이겠나? 히엘이 여리고를 그대로 건설하려 터를 쌓고 성문을 먼저 복원한다. 앞서 저주의 말씀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나? 자식들이 날벼락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73:18-19).
말씀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복이다. 모든 세계와 앞날의 예정하심이 기록되었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일점일획도 누락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종종 우리 앞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우린 두려움으로 이를 살핀다. 먼저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에 집중한다. 일어난 일에만 집중하고, 문제나 현상에만 마음을 빼앗겨서는 어림도 없다.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욥 27:8-9).” 나는 누구와의 대화에서 부디 주의 권능이 저를 붙드시고 가야 할 길을 올바로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을 더하시기를, 위하여 기도밖에는 없었다.
때론 하나님의 버림과 저주가 우리의 소망을 가로막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오늘 시편은 이에, 그것으로, 그것 때문에도 부르짖는다. 한 마디로 기도하란 소리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2).
이와 같은 암담한 현실 앞에 대부분은 자기 살 궁리를 한다. 어디서 나의 도움이 올까 하고 두리번거리게 된다. 듣다보면 몰라서 문제가 아니다. 다 안다. 알면서도 이를 어쩌지 못하는 주저함이 문제다. 주저함은 믿음의 일이다. 솔직히 하나님이 미덥지 않은 것이다. 말이 그렇지 말씀이 이루어지겠나 싶은 것이다. 그러니 입으로는 주를 알고 믿는다 하면서 정작 주께 맡긴다는 데서는 글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때론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으신다는 절망감에 든다. 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시인은 거듭 자신을 붙들어 세우고 다짐한다. 주께로 향하게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누구에게도 기도를 권하고 또 권한다. 물론 저가 왜 기도하지 않겠나? 한데 그 기도가 자기 위로와 평안을 구하는 것으로 실제 남편 목사의 사역과 그 영혼을 두고 애원하기보다 자신이 더 사랑받고 싶고 위함을 얻고 싶은 바를 구한다. 이를 구애한다. 그러니 남편 입장에서는 그 나름 한다고 하는데 답답하다. 서로의 시선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 바라는 것 또한 다르다. 두 사람 마음이 늘 억울하다. 서로가 원망스러운 것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이다. 정작 하나님의 뜻을 그 다음이다. 아니, 안중에도 없다. 무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주의 일을 운운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기도한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2).” 저의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기도한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예수님이 기도하신다.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 앞에 자신을 맡기시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위해 기도하신다.
곧 누구에게 이르고, 또 내가 나에게 늘 바라는 것은 우리가 주를 신뢰한다는 일이 더 이상 내 문제로 씨름하며 주께 간구하는 게 아니다. 자꾸 밟히고 마음이 쓰이고 아픈 내 곁의 한 영혼을 두고 주께 구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장담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가?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 당장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가면서, 곧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5).” 우리가 무얼 장담할 수 있겠나? 주 앞에 아뢰고 구하는 것밖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5).
이를 앎으로, 우린 비로소 우리의 문제로 시간낭비하지 않는다. 쓰시는 이가 알아서 하실 터, 다만 우린 맡기신 사명을 다하는 데 있어… 사탄은 지치지도 않는다. 별의 별 문제를 일으키며 묻는 것 같다. 이래도 할래? 이래도 이 길을 계속 갈래? 그럴 때 우리로서는 난감한데,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6-8).
그러든가 말든가. 일일이 개의치 않고 심지어는 자기 안의 불안과 갈등 또한 무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기꺼이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누군 고혈압 당뇨, 고질적인 몸의 어려움으로도 이 길을 준행하면서 나아가듯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을 먹고, 정신이 어려우면 그 마음의 안정을 위한 약도 먹으면서… 뭐 그리 호들갑 떨 것 없다. 마치 정신과를 가는 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으로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자만일 뿐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하물며 그리하셨는데,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지 않으실까?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9-10).
책임전가는 주께 하는 것이다. 알아서 하실 것이고, 주가 책임지실 것이다. 나는 누구 말에 하도 답답하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모른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할 뿐이다. 내 능력이나 자질의 문제에 대해서도 주가 다 아신다. 오히려 나는 모른다. 나의 육신의 어려움이나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제 나는 모른다. 내가 애쓰지 않는다. 나는 나를 방치한다. 방치함으로 주를 신뢰한다. 방치한다고 함은 자꾸 내 문제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 문제로 입씨름하듯 기도하지도 않는다. 더 이상 나는 없다. 내 앞에 보신 저이, 저 한 영혼을 두고 내가 주께 아뢰는 일. 그것으로 씨름하는 것. 내 코가 석 자인 주제에! 이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곧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이리저리 궁리해도 소용없다. 몸의 시달림도 마음의 고달픔도 주가 아신다. 나는 주의 것이다. 그럼 주가 아프시다. 그렇게 주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내 문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나와 상관없는 게 된다. 다만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신다. 전혀 새로운 능력이다. 뭐가 좋다고 저런 소릴 몇 시간씩 매주 듣고 앉아 있겠나? 내 일도 그 정도 신경 안 쓰는데. 그러니까 그게 더는 내 문제가 아이어서이다. 자꾸 자기 문제를 문제로 확대하면 끝도 없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제일 문제다. 도무지 들어주질 않는다. 하지만 다 맡길 때, 주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란 안도감. 이 알 수 없는 확신.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1-13).
다만 주께 아뢸 뿐, 나의 삶도 버겁다. 내 코가 석 자다. 다 아신다. 그런 자에게 왜 주는 주의 일을 맡기시는 것일까? 좀 여유롭고 지식 있고 능력 있는 자도 많은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왜 하필 나 같은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이 귀한 보배를 담으셨을까? 그래서도 주만 바라보게 하신다. 희한하지? 안 아프면 기도도 안 한다. 안 힘들면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3).
주를 전한다는 것. 주는 누구신가 하면,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4).
이는 나의 경험이다. 체험 중에 주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배우고 안다. 앎으로 더욱 확신한다. 하여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곧 우리의 구할 것은 기도와 감사뿐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고로,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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