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왕상 19:7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 25:14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친 엘리야가 이세벨의 반격에 두려워 도망친다. 하룻길을 피해 광야 로뎀나무에 이르러 실의에 찬 마음으로 죽기를 바란다.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리 연약한 것이 또한 사람인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렇게 죽기를 구하기까지 무력감에 젖었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저를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이끄신다. 후에 저를 이을 엘리사를 세우게 하신다.
주가 더하지 않으시면 우리 마음은 허사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주가 아니시면 어떤 마음도 끝까지 견지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항상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이 있어 굳건한듯하나 일순간 무너져 죽은 것 같이 된다. 강한 척 하는 경우 영락없이 나약함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의 주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강함과 약함으로부터 해방한다. 나의 모든 중심으로 나의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주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세상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한 것이 저로 하나님을 가벼이 여길까 하심이다. 각자의 싸움에서 그 누림이 다른 것이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단신으로 맞서 상대하던 엘리야의 모습은 간데없고 이세벨 왕비의 협박에 국경을 넘어 광야에 들어가 움츠리고 죽기를 간청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브엘세바에서 갈멜산까지는 직선거리 250Km로 영육 간에 지친 저를 보살피며 새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5).” 그렇게 다시 또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7).” 곧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친밀하심이 아니면 과연 우린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완주할 수 있을까? 이에 오늘 시인의 표현이 가슴을 울린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25:14).
주의 친밀하심, 그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삶 가운데 누리지 못한다면 누구라도 주의 길을 완주할 수 없다. 어제 사모는 전화하여 하루 이틀 지체하였더니 보아둔 자리가 그새 나갔다고 하였다. 친정부모는 자신들 집 근처에 방을 얻어줄 테니 아이 데리고 나오란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았고, 더 나은 주의 뜻이 있으심을 알게 하였다. 친정부모를 위해서도 얼른 개척을 해야겠다, 하고 말하였다. 사는 일도 버거운 가운데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가 주시는 새 힘으로만 가능할 거였다. 세세한 저의 심정을 알 수 없고 그 깊은 슬픔을 나는 헤아릴 수 없으나, 인생이란 그러하여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욥 14:1-2).” 이생은 내남없이 가련할 뿐이다.
가련하고 연약할 뿐인 우리네 삶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주가 다 아신다. 주가 이루실 것이다. 이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산다.
저마다의 슬픔이 인생을 적시는 것이어서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한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그저 도망치듯 헤어지고만 싶고 지금의 현실에서 멀리하길 원하지만 그래봐야 멧돼지를 피한들 호랑이가 길목을 기다리는 게 인생이었다. 당장은 그리 살 길을 모색하지만 끊임없는 어려움 속에서 우린 비로소 주의 친밀하신 손길을 느끼게 된다. 주의 세미한 음성은 거센 바람이 지나고, 지진이 나고, 뜨겁게 사르는 불길이 지난 뒤에 들린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11-12).”
엎친 데 덮친다는 말, 설상가상이란 말, 점입가경이란 말, 곧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가운데서 주의 세미하신 소리를 듣는다. 주가 이루시고 주가 다루신다. 누구의 이런저런 사정이 어디 저만의 일이겠나? 천하의 엘리야도 주의 돌보심과 주의 능력이 아니시면 살 수가 없는 것을. 결국 소명과 사명으로 우린 이 길을 간다. 절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바울은 다짐하였고 그리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나는 사모에게, 그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야, 하고 위로하였다. 주가 하시는 일에는 ‘예’만 있다. 나는 그것을 신대원을 시작하면서 알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하는 심정으로 모두 맡기면서 말이다. 누구에게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 사실들을 나는 실제 경험하였다. 이를 체험할수록 점점 더 나의 주장은 사라지고 주의 뜻만을 구하게 되었다. 주가 이루신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나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닌 사람의 손길을 들어서도 떡과 고기로 기력을 잃지 않게 하신다. 3학년, 6학기 내내 나는 등록금을 단 한 번도 내 돈으로 낸 적 없다. 교회를 등록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 일에서도 앞서 나의 어떤 비전과 꿈을 가지고 한 게 없다. 오죽하니 목사고시를 앞두고 마지막 면접시험에서 저들이 앞으로의 비전을 물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없다고 하니 면접관들은 서로 고개를 갸웃하며 어리둥절하였다.
평생 밥벌이로 삼았던 논술과 인성검사에서 두 번째 낙방하던 날, 심리학자이며 목사로 있던 면접관이 물었다. 다시 하실 텐가? 그때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로서는 도망칠 곳도 더는 물러설 곳도 없다. 그러니 하시는 일을 하시라, 나는 남은 평생을 낙방만 해도 괜찮다. 사실 이는 나의 대답이 아니라 내 속의 주의 영이 넣어주신 말이다. 굳이 목사가 되려고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없다. 나는 그와 같은 자유가 만족스러웠다. 내가 갈등할 일이 아니었다. 글방을 교회로 등록하고,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면서도 누가 오고 안 오고, 저 한 영혼이 오는 시간이 예배의 시작이었다. 종종 아무도 오지 않아 아내와 둘이서 예배를 드리다 늦잠을 자고 아이가 다늦게 오면 그때 다시 시작하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이 좋다. 능숙하여서 이제 구력이 생겼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제도 군포에서부터 함께 시작한 아이가 왔다. 중1 청소년이 스물여덟 청년이 되었다. 지난 주일은 갑자기 가족여행으로, 이번 주일은 토익 시험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순간 우리 영혼의 갈급함이 우리가 취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그때 마침 설교원고가 작성되고, 우리는 앞서 주일 설교원고를 놓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나누었다. 그때도 아이에게 말하길, 때론 우리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믿음이란 게 왜 믿어지는지 확식할 수 없는 게 믿음이다. 이번 주일에도 예배를 함께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중에 와서 같이 예배드리게 하시는 이가 계시다. 저나나나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하는 게 아닐 거였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주께서 그리 더하심이다. 오후께 사모는 전화해서 ‘일을 또 망쳤습니다. 하루 이틀 사이 보아둔 자리가 나갔다는군요.’ 하는 말에 나는 장담하듯 ‘그 자리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하고 말하였다. 주가 하신다. 내가 아는 한 주의 뜻이면 예비하신 곳이 따로 있다. 주의 일이면 우리의 됨됨이나 자질이나 환경은 상관없다. 주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신다. 오늘의 엘리야만 봐도 알 수 있다. 멋지게 바알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 450명을 무찌르고는 고작 왕비 이세벨의 엄포에 줄행랑을 쳐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청하고 있다. 우리의 강함이 약함은 모두 허상이다. 아무리 강한들, 또는 쓸모없이 약한들, 주가 사용하실 때는 주의 권능으로 이끄심이다. 나야말로 자격이나 강단으로 보면 전혀 쓸모없는 자인 것을 내가 더 잘 아는데, 그때마다 주가 행하심을 보여주신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0).
내가 어찌 한다고 해서 주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를 인정할 때, 주 앞에서 죽기까지 애원하는 엘리야의 신음도 우리 주님은 주의 영광으로 받으신다. 막무가내로 들에 나가 목을 멘 가룟인 유다와는 다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11).
주가 이루신다. 주가 행하시고, 주가 돌보신다. 누가 오고, 저의 일을 듣고, 서로가 어쩌지 못할 일을 두고 내가 무슨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겠나?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시면,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나일지언정 나를 들어 저로 새 힘을 얻게 하실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안 한다고 해서 안 될 일도 아니다. 다만 나는 묵묵히 내게 맡기신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 소임이 어떠할지, 결과는 또 무엇일지, 나는 모른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55:22).
하여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주께 내민다. 맡기고 의뢰할 뿐 그 결국에 대해서도 주의 뜻으로 받는다. 저가 떠나든지, 돌이켜 주의 길을 가게 되든지. 공연히 내가 나서서 어찌 하려 할 때는 영락없었다. 그 노력도 수고도 실패도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한데 주께 다 맡김으로 승리하든 실패하든 모두가 주의 영광이 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고 저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 모든 행하심이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저 아이가 이런 날 여기까지 오는 것도, 함께 앞서 주일 설교원고를 두고 주 앞에 예배하는 것도, 저의 이런저런 우려와 염려에 내가 들려줄 수 있는 말들이란 것도…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눅 1:66).” 나는 이와 같이 묵상을 하고 이를 글로 쓰면서도 누가 볼지, 저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지 없을지, 하다못해 쓰나마나 한 글에 불과하다 해도, 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마음으로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5-26).”
다만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하면 나는 그분만을 의지할 따름인 것이다. 이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오늘의 엘리야를 그리 들어 사용하심은 전적으로 주의 능력이시다. 저의 남다른 권능으로가 아니었다. 다만 죽음을 각오하고도 주 앞에 아뢰는 것, 죽기를 간청하기까지 주를 신뢰하는 일.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고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에 오늘 시편으로 이를 찬송하면,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5:1-2).
곧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사람을 보고 하는 일도 아니고, 나의 치밀한 준비와 계획으로 이뤄가는 일도 아니며, 내가 행한다고 행하여 나의 열심이 거두는 승패가 아니라면… 오직 주만이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러니 굳이 두려워할 일도 뭔가 더 잘해야겠다는 지나친 열심으로도 아닌,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 45:17).”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3).
이는 참으로 귀한 이치여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4).
섣불리 내가 나서서 뭔가 이루려하다 낭패를 본다. 오히려 그와 같은 낭패까지도 오롯이 주의 섭리로 두고 간다면,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5).
내가 하는 일은 없다. 다만 믿음으로 주를 바라고, 그리하여 이른 아침에 눈을 뜨고 주 앞에 앉아 말씀을 되뇌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에,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86:3-4).
이에,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25:6).
오늘 시편은 나의 가는 길을 제시한다. 이는 시편의 일관된 찬송으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45:8-9).
하여 나는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7).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 위에서 산다. 나는 이를 앎으로 오늘의 모든 일에 주를 인정한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8-9).
부디 나로 온유하여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주가 허락하시는 날들, 그 땅에서 만족함을 누리고,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이는,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0-13).
곧,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4).
하여,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5-16).
주를 의지하고 산다는 일,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하면 계속 되는 근심이나 염려를 없이할 수는 없다 해도 이를 주께 맡김으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17-20).
주가 아니시면 내가 더는 누구에게 아뢸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시 53:6).” 그러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심인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더는 억매여 끌려다닐 염려와 근심이 아니다. 이는 그대로 두고,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주가 이루시며 주가 모두 알리신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그러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그러므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2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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