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왕상 21:2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아합은 심약한 사람이다. 저가 악을 행함은 그의 옆에서 충동하는 왕후 이세벨의 악함으로였다. 나봇의 포도원이 성 곁에 있어 자신의 더 좋은 포도원과 바꾸자 할 때 나봇이 이를 거절하자 상심하였다. 이 소리에 왕후 이세벨이 하찮게 여겨 거짓으로 나봇을 모략하고, 왕과 하나님을 저주하였다 정죄하게 하여 저들 장로들이 충동하여 백성들이 저를 돌로 쳐 죽이게 한다. 이후 이세벨은 보란 듯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준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엘리야에게 아합과 이세벨을 포함하여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어찌 죽을 것인지를 선포하게 하신다. 한데 이를 듣고 아합이 회개하는 심정으로 괴로워하고, 이 모습에 하나님은 저의 때에 벌하지는 않으실 것을 알리신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29).”
일련의 사건에서 아무리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라 해도 이를 주는 주의 사람에게 먼저 알리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17).” 본문 1절과는 동떨어진 전개이다. 흔히 세상이 어떻다 하여 다들 몸을 사리지만 어떠한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의 사람과 공유하셨다. 소돔과 고모라가 악하여 저를 멸하실 때도 이를 아브라함에게 먼저 알리셨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 18:20-21).” 이를 통해 먼저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알게 된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시 94:8-10).
때에 모든 것을 밝히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임을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으로 앞서 알리고 계신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하시며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를 먼저 알리시고, 알게 하시는 사명을 우리에게 두셨다(계 20:11-15).
믿는 자로 산다는 일은 주의 일에 관심을 두고 그의 행하심에 함께 하는 것이다. 누굴 보내시고 어떤 자를 만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하시고 그 일로 무엇을 나타내려 하시는가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는 영광과 함께 영광의 부활로 나아가게 하심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곧 우리 하나님도 그 일을 행하시기에 앞서 독생자 예수로 먼저 알게 하셨다. 이로써 주님은 무슨 일에든지 아버지의 뜻으로 하셨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 곧 우리로 이를 알게 하심은 주의 자녀인 증거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전 5:8).”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들을 귀 있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관하다. 믿음은 결코 모두의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 이러할 때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아합이 엘리야의 전을 듣고 풀이 죽어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왕상 21:27).” 이에 우리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29).” 곧 우리가 주 앞에 돌아서기만 하면 주께서는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다시 붙들어주실 텐데… 다시 돌이키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 일러 왜 굳이 글을 쓰려 하는가? 하고 오늘 그 답을 듣기로 하였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주가 보내신 것이 맞다면 저로 하여금 이 문제로 주말동안에 고통하기를 바랐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괴로울 정도로 하여, 내심 나는 저가 잃어버린 주의 사랑을 알게 할 마음에서다. 주의 뜻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나는 이제 밥벌이를 위해 이 일을 하지 않는다. 또한 누구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려는 마음으로도 아니다. 저가 어떠하든지, 나는 주가 알게 하시는 바를 듣기 원하고 저로 주의 뜻을 알게 하고자 누가 오고 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도 그게 전부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속기 쉽고 속이기 쉬운 게 그 마음이라, 누가 알겠나? 본인도 스스로가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지 못한다. 할 때 우리의 충성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우린 이제 주 앞에서만 견실하고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종종 이런저런 유혹이 있는데 이를 물리치는 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 첫째는 왜 주께서 저를 보내셨을까? 저의 이야기를 듣게 하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곧 저는 자기 말을 하고 돌아서서 금세 잊어버릴지 모르나 나는 저의 사연이 명치끝에 걸려 답답증을 더한다. 그럼에도 이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둘째, 저를 보내신 이가 주가 되심을 알고 믿고 의뢰하기 때문이다. 결코 내가 저들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62:12).
현재 오는 몇몇은 학벌로나 사회적인 지위로나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다들 대학원까지 마치고 나름은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 심령에 상한 부분을 호소한다. 누구는 알면서, 누구는 알지 못하고 그 일로 신음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엘리야와 같이 주의 뜻이면 혹시 죽을지도 모를 일을 두고 아합에게 알려야 하듯 저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주의 뜻이 어떠하신가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7-28).”
우리로 말씀 앞에 서게 하시는 이유, 주의 뜻을 알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어찌 행해야 하는가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9-13).” 이를 우리는 알려야 한다. 나는 오늘 저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더는 오지 않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저 만나 저의 돼도 않는 지적허영심에 덩달에 춤을 출 수는 없다. 주도권은 항상 우리에게 있다. 끌려갈 일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열에 아홉은 내 맘 같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제 십이삼 년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나의 성과는 없다. 금요일에 아이가 왔다가고, 저의 묵상글을 읽고는 그래도 내가 얻은 수확이라면 이 아이 하나가 주 앞에 바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소심함이 옥죌 때가 있다. 이 길이 맞나? 싶은 고질적인 회의와 함께 때론 아무 성과도 없는 것 같아 괴로움이 앞서기도 한다. 저마다 교회를 이루어 버젓이 몇 십 명의 성도들과 혹은 수백 수천 명의 성과를 내며 성장하는데, ‘다시 또…’ 새로 누구를 안고 씨름해야 할 때면 이게 대체 맞는 길인가, 싶은 것인데.
내가 붙들 약속의 소망을 다시 확인하게 하시는 것 같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주만 바라본다는 일, 가끔은 참 외롭고 쓸쓸한 일이어서… 내가 대체 왜 이 사람의 이런 소릴 듣고 있어야하나 싶을 때도 있고, 이런 말을 저에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기도 하고. 어제는 문득 ‘아픈 아이’의 엉뚱한 소릴 들으며 나는 저로 인하여 저의 엄마가 교회로 오고 안 믿는 저의 형이 함께 신앙생활을 할 것을 꿈꾸고는 하는데, 그러는 게 다 허사인 것만 같아서… 하필이면 왜 나처럼 못나고 부족한 사람을 들어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일까? 하는. 오후께는 공연히 마음이 어지러워 우울하기도 하였다. 대체 왜 나 같은 자로… 하나님은 무얼 하려 하시는 것일까?
물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이를 앎으로 주를 경외함이 복인데, 더러는 내 가는 길이 여기가 어딘가 싶은, 깊은 슬픔도 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25:12).
하여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이를 오늘 시인은 노래하는 것일까?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나에겐 그와 같은 절박함이 있다. 더는 갈 곳이 없다는 데서 안도한다는 말, 막장에서 일하는 누가 했던 말이다. 땅 속 어디 깊은 막장에서 오히려 저는 안도한다고 하였다. 더는 못 가겠다고 하면 그곳이 끝이다. 하지만 저는 다시 괭이질을 하고 흙을 퍼내고 돌을 깨면서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갔다. 막장은 저에게 끝이면서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점이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5-6).
오늘 이 구절의 시편이 나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무얼까? 막장을 연상하다, 비로소 주께 붙들려 끌려와 신대원을 하면서, 파산을 맞고 공황이 오고 안정제를 먹어가면서,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되물었던 말들이 주의 길을 가는 내내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것도 같다. 새로 누가 오고, 다시 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거나 나누면서 이러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싶은.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세우시는 자리에 서야 한다. 서슬 퍼런 이세벨의 왕궁으로 아합을 만나러 가야 한다. 주의 뜻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만 갈 수 있는 길,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실은 두렵고 막연하여 돌아서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럴 때 소위 말하는 ‘어떤 성과’라도 있어, 가령 아픈 아이엄마가 같이 믿음 안에서 교회를 함께 이뤄 간다거나 애써 수고하여 마음을 다한 이가 주를 영접하고 교회에 남는다거나 하면서,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며 이 일의 증거가 되면 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누가 물으면 목사라는 말을 하기도, 여기가 교회라고 하기도 부끄러워, 행여 주의 이름에 누가 될까 하여 주저하기도 한다. 그럴 때에 주의 음성,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신 20:1).”
하시며 이르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실은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주의 앞에 선다는 일은 감사와 영광이면서도 외로움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무슨 소릴 하겠으며, 설령 이런저런 말을 한다 한들 저들이 이 말을 듣기는 할까? 내게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고, 가시적인 어떤 성과를 손에 쥐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이다. 하나님만으로는 과연 나의 마음은 ‘여호와의 아름다움만 바라보며’ 감사하는 게 맞는 것일까? 어제 오후,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고, 말을 하고 싶었다. 어디라도 떠나고 싶었고, 아예 숨어버리고도 싶었다. 그러할 때,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이 솔직히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3).
곧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와 같은 말씀으로도 충분할 텐데, 내가 느끼는 오늘의 감정이 나로 하여금 엉거주춤하게 하는 것은 무얼까? 나의 이와 같은 심정까지도 다 아실 주 앞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0-31).”
나는 가끔 어린아이와 같이 주 앞에 입을 삐쭉 내밀고 울고 싶은 아이처럼 시무룩하다. 아,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하면,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5).
말씀을 입에 가득 머금고 앉아 주를 바란다. 오늘 올 사람의 어떤 성과를 기대하기보다, 아이엄마의 어떤 변화를 꿈꾸기보다,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며 주 앞에 바라기보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6).
이는 엄연히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다. 나는 못한다고 도망다니던 사람이다. 주가 시작하신 일이다. 하게 하셨고, 오늘도 꼼짝 못하게 하신 일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84:2-3).
주가 행하시고 더하시고 채우실 것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27:7).
나의 주님은 그리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저가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8-9).
곧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7-29).”
하면,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1).
주가 이루신 교회로, 주가 세우신 사람이면 주의 권능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길.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3).
이에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러므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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