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왕상 20:42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시 26:3-4
아람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굴욕적인 항복요구와 아합의 거절을 다루고 있다. 아합과 벤하닷 사이의 전쟁은 B. C. 587년으로 추정된다. 아사와 동맹을 맺고 북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벤하닷 2세이다. 아람의 소왕국을 결집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다. 32명의 왕을 통합하여 아람은 북이스라엘을 공격하려 사마리아를 포위한다. 아합은 저들과 타협하려 협상하였으나 벤하닷의 요구가 아합의 처자와 은금과 모든 귀한 것을 자기 것으로 하고, 굴욕적인 항복을 요구하자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현실은 때로 우리의 굴종을 요구한다. 이에 믿음의 눈으로 이를 보지 못하면, 결국 이스라엘이 아낙 자손을 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던 것처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9).” 불신앙적인 결정은 당장 가시적인 문제 앞에 있다. 오늘 아합도 싸워보기도 전에 지레 판단하여 벤하닷 앞에 굴복하려 하는 모습을 본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할 때 현실은 암담할 따름이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후 10:7).” 정녕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모든 게 하나님의 세계임을 볼 수 있다. 결국 작은 것을 양보하면 큰 것도 잃게 된다. 처음 사람 아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죄란 아주 단순하게도 별 것 아닌 데서 주의 말씀을 잊는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분명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소홀히 여긴 까닭인데 실제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변절이 스스로 괜찮다고 허용하는 작은 일에서 비롯된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0-11).” 이는 사탄의 일이다. 적그리스도란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데서 엄청난 것으로 우릴 위협하고 공략하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있는, 아주 사사롭게 여기는 것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세상은 점점 교묘하고 애매하다. 이에 호응하는 것은 욕심이 문제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오늘 본문 중에 특히 7-9절의 내용으로 미뤄, 사탄은 맞서 싸울 상대이지 타협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아닌 건 아니란 소리다. 그럴까 하노라, 하는 식의 처음 여자 하와의 생각처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그 작은 허용, 자기 판단이 조금 곁들여진 데서 엄청난 결과는 초래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늘 우리 삶을 두고 이르시기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저가 남편이라, 아이라, 가족이라… 하는 식의 관계로 우리의 영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일이 어디 한둘이던가? 하여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길,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아이 일로 발목 잡히고, 가족을 위해 교회를 등지는 일이 허다하다. 무엇이 먼저냐? 하고 물었을 때 선뜻 주의 일을 우선하기가 어렵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사탄은 이처럼 우리의 가장 취약한 데를 건드린다. 볼모잡고 타협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누구의 갈등을 이해한다. 하지만 나의 이해가 저의 선택을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늘 말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 정말 별 거 아니다. 지켜 좋을 때나 가족이고 신랑이 우선인 것 같으나 돌아서는 순간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다. 왜 우리 영혼의 원수가 식구일 거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는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하물며 이웃도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고, 원수도 사랑하라 하시는 분인데 설마 가족을 등지라 하시는 말씀이겠나? 제5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심이다. 앞서 4가지 계명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과 사람의 일인데 그 중 첫 번째가 부모 공경이었다. 한데 이것이 주를 사랑하는 일보다 우선할 때 죄의 뿌리가 된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약하고 허점이 많은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여기서 우리의 기준은 오직 하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와 나중이 혼재할 때 우린 감당이 안 된다. 스스로 옳다 여길 때 어김없이 넘어진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만사 모든 일에서 주의 뜻을 먼저 헤아려 알고 발견하는 것, 오늘 본문에서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13).” 이와 같은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일, 이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이 하찮은 일에조차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미친다.
가령 오늘 우리 삶이 악하다 할 때, 악의 형통함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일컫는 일이기도 하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73:12-14).
상대적으로 우리가 악인들에 비해 겪는 일을 두고 볼 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2-3).
저들을 질투함은 부러움이 앞서고 상대적인 박탈감도 들기 때문이다. 이를 가지고 안 믿는 자는 공격한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고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더 나은 게 뭐냐? 오히려 믿는다는 자들의 형편이 어렵고 궁벽하니 그 믿음도 보잘것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일러 우리의 가는 길은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을.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6).”
세상 이치를 가만히 보면 한때 잘나가던 자가 수두룩하다. 그 한때를 회상하며, 저마다의 한때가 영원하지 않음을 스스로들 잘 안다.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욥 20:20-21).” 하다못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도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럴 때면 누구의 말이 자주 생각나는데, 저는 가족을 너무 사랑함으로 교회를 등지고 하나님을 떠났다. 혼자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느니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옥에서 살겠다고 했다. 그 후 채 10년이 지난 오늘 죽고 못 살 것 같던 부부는 이혼을 하여 원수만도 못한 사이가 되어 재산 다툼을 벌이고 있고, 성인이 된 자식들은 부모의 다툼에 질려 서로를 보지 않는다. 너무 단적인 예로 들리겠지만 자고로 명절에 모이는 것도 이틀이 지나면 반가움은 사라지고 미움만 남는다는 말이 괜히 있을까?
오늘 본문의 핵심은 가시적인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듯 우리에겐 영적인 눈, 믿음으로 보이는 눈이 필요하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왜 그런가? 현실은 현실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곧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12).” 그런데 이를 감정적으로만 접근하여 덩달아 대적하여 싸우려 한들 백전백패다. 우린 승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이어지는 말씀으로 우리가 살 길이다. 아합에게는 그럴 영적 능력이 없었다. 오늘 본문으로 우리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말씀의 의도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우리가 평소 무장하고 사는 게 우스꽝스럽고 너무 광적인 신앙의 소유자 같으나 때가 악할수록 무장한 자만이 승리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이는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꿈이 있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 사람에게는 굳이 큰 어려움도 의미가 없다. 다들 사는 데 따른 고만고만한 형편으로 하루살이처럼 살다 갈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한다. 때가 악하면 악할수록 그 속도는 거세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9-11).” 말씀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 이를 구분하려 드는 그 자체로 올바른 신앙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누구는 너무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게 문제인데 이 또한 위험하다.
다만 오늘 아합이 처한 이스라엘의 상황은 주를 믿는 우리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요점은 간단하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임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렘 4:1-2).” 하면,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6:1).
오늘 시인의 고백이 나의 것이기를. 비록 세상은 아무리 어떠하고 저들의 평가나 고약한 행보가 어떠하든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2).
이와 같은 단련의 삶을 자처하는 것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26).” 오늘 여기가 전부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뜨거운 소망을 품고 자기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 이 동방의 나라, 이교도의 땅, 작은 조선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복음의 불씨가 되어서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 삶을 요구하신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1:15-16).”
누구 이야기에서, 또는 어떤 사연을 접할 때 나는 이를 주 앞에 펼쳐놓고 아뢰는 것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저의 이야기로 내게 들려주시는 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3-4).
이 정도의 결기와 의지도 없다면 대체 무얼 감당할 수 있을까?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느라 목회는 미루고 사는 데 급급한 삶을 목회로 착각하고 사는 사역자들도 허다하였다. 곧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은혜뿐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므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5).
악이 너무 선보다 선하게 여겨진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보다 훨씬 원활한 것 같다. 사탄은 모사에 능하다. 틈을 노리며 그럴듯한 이유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릴 타협하게 한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예전에는 누구의 권면이 유용했다. 저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다. 지금은 통계의 세계다. 확률과 수치로 말한다. 정보가 곧 재산이다. 먼저 아는 게 돈이 된다. 그러느라 온통 그 일에, 공부한다. 혼신을 기울인다. 믿는 자들의 이야기다. 안 믿는 자들이야 본래 그러하고, 한데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우리가 받은 말씀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6-7).
바울은 애끓는 심정으로 설교문을 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스스로 괜찮다, 하고 허용하는 순간 거대한 댐에 균열이 온다. 작은 틈 하나로 설마, 했던 일이 무너지는 법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를 그저 도식적으로 듣고, 그렇다고 어찌 그러고 사나… 하고 타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굴종을 면하지 못한다. 세상에 끌려 다니며, 마치 주식을 더는 그만두고 싶은데 이제와 뺄 수도 없다는 아우성이 그와 같다. 그때 누구의 말을 듣고 어디에 아파트 청약을 넣고 돈을 끌어다 집 한 채를 가졌더라면… 오늘 저들이 부자거지로 깡통 자산을 들고 버티는 꼴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무슨 통계를 따지고 확률을 운운하며 어디서 수치를 들고 와서 이를 맹신하려 드는가? 오죽하니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하실까?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 주는 멀리 계시고 세상 짐은 홀로 지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8-9).
부디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두려워할 줄 알면서 살자. 우리의 본분을 잃지 말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오늘 우리의 어려움은 이유가 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이를 분별하게 하시려고,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0-11).
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4).”
고로 우리가 주를 경외하며 산다는 것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말씀 앞에 늘 나를 놓고, 그 심지가 곧은 사람으로 사는 것.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이에,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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