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왕하 1:3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어떤 어려움을 두고 우린 그 일이 어찌 될지 궁금해한다. 하고 그 일을 해결하고자 하여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도 구원을 얻고자 한다. 아합에 이어 왕이 된 북이스라엘의 8대 왕 아하시야는 난간에서 낙상하여 크게 다친다. 이 일이 어떻게 될까 하여 사람을 보내 이방 신에게 물으려 하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저는 왕이 되고 2년 만에 죽는다. B. C. 853-852년의 일이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왕상 22:51).”
저에 대한 평가는 간소하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52-53).” 하여 그의 결과는 허망하였다. 죄는 대를 이어 이어지고, 그에 따른 어려움은 가중된다. 다윗 이래로 속국이었던 모합이 아합이 죽자 이스라엘을 배반한다. 어쩌면 아하시야는 이를 바로 잡으려 하였을 것이고 그러다 낙상하여 자신의 몸이 상하였다. 이에 저의 다급함은 그 부모의 영향으로 우상 신에게 빠졌고, 자신이 낫고자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이는 하나님의 신호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C. S. 루이스의 표현대로 ‘고통은 하나님의 경고음’이라 할 때 저가 회개하고 돌이켜 주의 백성답게 주께로 돌아왔더라면 어땠을까? 이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들어 저의 죽음을 경고하고, 이를 저는 군사로 누르려 하던 것이, 하나님은 저의 힘을 무력화시키신다. 다시 말하지만 저의 이와 같은 결과는 그 부모의 삶이 배경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은 우상숭배에 있었고, 저들을 둘러싼 거짓 선지자들로 인함이었다. 하나님을 배반하면 그 삶이 대대로 이어져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나? 앞서 미가야의 옳은 조력이 있었고 엘리야의 경고도 있었다. 이를 그때마다 무시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누르려 할 때 그 결과는 예고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신 32:13-14).” 이처럼 오늘의 살만한 주의 은총, 현실 앞에서 저희의 적당함이 저희로 그릇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15).” 그게 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16).”
곧 우리가 한눈판다는 것, 다른 데 시선을 돌려 다른 신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다급하면 다급해서, 적당하면 적당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할 땐 이를 위해서 ‘다른 신’을 구하는 일은 다반사다. 이를 세계화라 하거나 다변화라 하여 심지어는 문화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크다. 에이 설마, 하는 경우가 믿는 자의 삶에서도 팽배하다.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호 13:16).” 북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별로 와 닿지 않는 신앙’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스스로 마음을 높여 그렇다. 나는 친구와의 시간에서 그리 말하였다. 누가 무슨 암에 걸려 기도문을 올렸는가보다. 저는 평소 간증을 잘하고 늘 주가 도우시는 것을 간증하던 이였다. 그런 이가 이번에는 무슨 암이란다. 낫기를 구하고 나을 것이라 다들 믿는다. 친구는 그런 말이나 분위기(?)가 가소롭다. 나을 수도 있고 안 나을 수도 있고, 어찌 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에 ‘나는 별로 와 닿지가 않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내심 더 말을 이어갈까 하다 그만두었다. 뭐라 한들 저를 말로 설득하거나 설명하기는 어려울 거였다. 다만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욥 24:24).” 어찌 그러한가?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23).” 자신이 스스로 자기 일을 도모한다고 여길 땐 누가 뭐라 한들 들리지 않는다. 그저 그게 다 ‘그럴 수 있는 일’로 한 다리 건너에 있다. 참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못 자신이 겪고 더는 자기 의지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런 현상이 무섭다. 갈 데까지 간다는 말, 결국 당해봐야 안다는 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의 후회와 낙심은 소용이 없다. 아하시야의 부친 아합 때에도 수차례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아하시야 역시 군사 오십씩을 두세 번 보내 자신에게 경고하는 엘리야의 예언을 그처럼 힘으로 누를 게 아니었다. 그나마 아합이 잠시나마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벌을 그의 뒤로 미루셨던 것이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 21:29).” 이는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27).”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도 불쌍히 여기신다.
가령 아이의 어려움에 주의해 보면 그 부모의 죄가 보인다. 속된 말로 아이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다. 그 부모가 한 술 더 뜬다. 이어지는 죄의 계통발생이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이와 같은 말씀으로 경고음을 듣고 스스로 돌이켜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게 은혜다. 나는 친구에게 몇 번 그와 같은 사실을 고백하였다. 저는 내게 주의 경고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였다. 그의 처와 자식과 처가와 안 믿는 형제 간의 복합된 경고였다. 지금 와서 그리 판단된다. 한데 그의 일이 나에게도 경고음이었다. 갑자기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수술할 수 없어 치료약으로 대처했는데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골반 두 개가 괴사하여 인공뼈로 갈아끼워야 할 때, 저의 일련의 고난이 나로 하여금 주를 돌아보게 하셨다. 정작 저는 그럴 수 있는 일로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주님은 주의 자녀이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죽이시더라도 살리신다. 주의 사랑은 잔인하시다. 아들까지도 죽이신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말이다. 욥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주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한다는 고백이다. 바울은 증거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다시 말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고, 심지어 죽여서라도 이 땅의 정죄당함을 함께 받지 않게 하신다. 이에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 6:9).” 이와 같은 주의 긍휼하심과 사랑을 어찌 말로다 설명한들 납득할 수 있을까? 저는 이미 저의 생각을 굽힐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감사한 것은 주일이면 주 앞에 예배드리러 올라가고, 교회 사람들과 어울려 (듣기 싫은) 저들의 말을 들으며 교제를 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주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상숭배는 당연한 것이다. 스스로들 잘난 줄 알지만 운세에 좌우되고, 어떤 기운을 따르고, 혹시나 하는 기대로 문화를 따른다. 더러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살지만 분명히 주의 자녀이면 주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심을 알 것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곧 우리 생의 어려움이 더러는 죽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더러는 생명의 길을 제시한다. 하여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사 40:19-20).”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34: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저절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죄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아이의 일을 두고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어김없이 그 죄는 대물림한다. 내가 아는 내 주변을 보아도 이상하게 외도를 한다 하면 그 부모가 그러했다. 서로 이혼을 한 경우도 실제 그 부모나 조부모의 때에서부터 이어졌던 일이 흔하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불안을 안고 그릇된 행동을 한다싶으면 영락없이 그 부모를 보아야 한다. 나의 생각이 편협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오늘 시편으로 이와 같은 죄의 굴레를 벗어보려 하면,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9:1).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를 높이면 별 수 없다. 친구라도 들리지 않는 덴 별 수 없다. 주 앞에 자신이 겪고 자신이 당해야 한다. 사랑은 체험이지 설명이 아니다. 별 수 없는 일은 두려울 뿐이다. 두려우면서 소망을 갖게 한다. 더는 뭐라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유일무이하신 찬양의 대상임을 알게 된다. 나는 내가 살았던 날과 내 곁의 여전한 이들을 둘러볼 때면 마음이 서늘하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의 두려움이 저들에게도 전달되기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5).”
특히 요즘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바른 진리를 전하기가 어렵다. 싫은 소리로 듣고 자신을 정죄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가장 편한 친구라도 조심해서 말한다 해도 저는 입을 삐쭉거리고 볼을 씰룩거리며 듣기 싫어한다.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이를 어찌 말로다 저를 설득할 수 있겠나?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
모쪼록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주 앞에 나 역시 다를 바 없는 죄인인 것을 고함으로,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곧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오늘 우리에게 펼쳐지는 일련의 모든 일은 주를 알게 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3-4).
여호와의 소리, 우리 곁에서 우렁차게 불러 젖히며 다급하게 찾으시는 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 주의하여 돌이킬 수 있는 게 신앙적인 본능이다. 무더위로 밤새 켜둔 선풍기에서 단내가 나서 깼다.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고 혹시 몰라 무더위 가운데서도 선풍기를 껐다. 하다못해 이 작은 행위에서도 살고자 하는 본능이 감지되는데, 하물며 영혼을 두고 무뎌져 주변의 썩은 냄새나 죄의 악취도 맡지 못하고, 심지어 여느 곡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정신 차려야 한다. 영적으로 깨나아야 한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5-6).
무소불위의 하나님의 권능 앞에 두려워 떨 줄 아는 게 지혜자다. 오십 부장이 오십 명의 군사를 거닐고 왕의 명령으로 엘리야를 잡으러 왔다. 저들에게 불이 내려 한 날 한 시에 죽었다. 세 번째로 왕의 명령을 받고 온 이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엘리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아뢴다. “왕이 세 번째 오십 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 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왕하 1:13).” 저들은 다만 왕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자이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14).” 저의 학습된 불안이 저로 살게 하였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정작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야말로 개돼지나 다를 게 없다. 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이는 하나님을 차으로 두려워할 줄 모르는 외식하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목이 곧은 자라는 것,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사 2:12).” 그런 자를 우린 상대하지 못한다. 좋은 말로 하나 싸우자는 소리로 듣는다. 저들은 저들의 끝을 알지 못한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4).” 왜 그러는 것일까?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3).”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7-8).
그런데도 듣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 자에 대하여,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9).
하나님의 지엄하신 권능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낚시를 가기 전,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혔다. 말씀을 먼저 붙들고 하루를 내딛는 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미 6:1-2).” 내가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면 산이 듣고 하늘이 본다. 자연은 주를 찬양하는데 그 무엇이 우선할 수 있겠나? 누군 병적이라 하고 심지어 광적이라 한다 해도 상관없다. 설령 강박증의 하나라 진단해도 좋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오늘을 하루 더 사는 이유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0-11).
이는 우리로 주를 경배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하고 당연한 이유가 된다. 곧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이를 말씀이 증거하시고 일련의 상황과 우리의 생활이 증명한다. 하여 지혜자는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왜 내가 이처럼 필사적으로 말씀 앞에 나를 앉히려 하는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므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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