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대상 5:25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시 58:2
장자의 명분을 잃은 르우벤을 대신하여 요셉이 장자의 명분을 가졌다. 이는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통간하여서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창 35:22).” 악이 악을 낳는 것 같이 우리가 거룩함을 좇는 것은 악을 가지고 주를 뵙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거주지를 기준으로 기록하였다. 남방의 두 지파, 동방에 두 지파와 주요 계보를 보여준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말씀을 누누이 강조하는 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 삶이 곧 예배인 것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근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저들은 우상 섬기기를 간음하듯 하였다.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대상 5:25).”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바로 지켜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곧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두려워하며 경외할 줄 아는 삶으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것인데,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시 58:2).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도 가슴 아프게 들린다. 이는 요즘 특히 스스로를 높여 교만에 이르고 이에 하나님이 건드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스스로 안 되는 일은 하나님이 다스리심으로 정의를 세우시고 거룩을 이루어 가게 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그 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즉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는 데 따른 삶의 결과는 끔찍하다. 오늘 역대상의 기록은 르우벤 지파의 후손들에게까지 이르는 것을 보여준다(3-6절).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편에 머물러 터를 삼았다. 실제 정복이 이루어진 요단 건너 가나안 서편에 비해 그 원주민들을 철저히 진멸하지 못하였고 그에 따른 저들의 문화와 신을 섬겼던 것이다. 이는 앞서 그럴 것을 경고한 바가 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수 22:24).”
여지를 두고 산다는 일은 그래서 걸림이 된다. 자신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그 후대에 영향을 끼친다. 예수님은 일러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35).” 그러므로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58:1).
곧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 허용의 범주에 우상을 섬기는 것에도 너그럽기 때문이다. ‘어찌 잠잠하냐?’ 하고 묻는 오늘 시편에서 우리가 묵인할 때 그것은 단순히 그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닌 것을 알린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지키고 행하는 게 거룩이다. 거룩은 모형이나 목표, 동기가 아니라 실제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82:2).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데 함정은 자신에게 죄를 허용하는 틈을 벌이는 것과 같다.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58:2).
우리가 그러한 것은 마음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늘 무너지고 넘어짐을 경험하면서 어쩔 수 없는 자신을 비호하고 변명하기보다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생각만으로 행한 것과 같은 까닭은 드러난 마음에 죄가 깃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139:23-24).
우리가 주께 의지함은 단순히 손을 놓는 게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주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를 후대에 알리지 않으면 마치 유전과 같이 흘러서 더욱 더 완고하여진다. 그래서도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래서 나는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억지로라도’ 자신으로 하게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어떤 일이든지 주를 더욱 바람으로 성령을 구하고 거듭남을 바라며 살아야 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내가 누구보다 나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바울의 절규가 이를 잘 표현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는 두 마음의 싸움이 치열해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누구의 작심삼일이란 표현이 나 또한 다르지 않고 나아가 매순간이 그러함을 안다. 그래서도 이처럼 ‘억지로라도’ 새벽에 나를 깨워 주 앞에 앉히려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정직할 때 주는 반드시 이를 행할 권능도 주신다. 그렇게 평생 담배를 끊지 못하고 즐겨하던 나로서 신대원을 하며 주께 맡기고, 맡김의 의지로 모두 버렸을 때 더는 그러한 시달림을 겪지 않고 산다. 단순한 예이지만 몸에 밴 어린아이 때의 습성이 우리에겐 다를 게 없다.
성격을 나누고 무슨 적성을 찾고 어쩌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 종자는 하나이다. 아담을 하나로 죄를 안고 산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거듭난다 함은 전혀 다른 나로 사는 일이다. 이 부분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도로 흡연을 하고 술 문화에 젖어가는 친구 몇을 볼 때이다. 기껏 끊었다고 자기 의지로 개선을 장담하였지만 이런저런 계기로 도로 그 타령이 되는 것을 본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결국은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것, 거룩이란 이와 같은 변화이다. 말씀으로 가까이 하지 않을 때 악에서 멀어질 수가 없다. 오늘 시인은 이를 호소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3).
하여 저들이 어떠한가 하면,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4-5).
한 마디로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는 욕구는 오늘 이 문화적 시류와 잘 어울린다. 자신을 존중하고 그 의지대로 사는 것을 마치 귀한 사명이나 되는 듯 아무 때나 존중 타령이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렘 6:10-11).”
요즘은 보면 모든 게 다 권익이고 권리다. 촉법소년이 어떻고 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의 권리가 어떻고 하면서 마치 모든 죄의 물꼬를 트는 것 같다. 이는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슥 7:11-12).” 피부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말씀을 나누고 성경공부를 권하면 다들 시큰둥하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약함으로 분주한 현실에 끌리고, 나름 신학을 하고 사역을 감당한다는 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으로 족하게 여긴다. 모르겠다, 나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장면 하나가 있는데 아버지와 그 친구 목사님들의 모임이었다. 어머니는 저들이 모여 며칠을 같이 숙식을 하며 성경을 나누고 기도회를 갖고 할 때면 수시로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셨던 것 같다.
하다못해 동기들과 그런 모임을 갖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데, 마치 다들 더는 성경공부-연구를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일상적인 이야기나 가벼운 간증으로 놀라워하며 감정을 울리다 마는 정도면 족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삶의 형태가 말씀과는 동떨어진 곳, 요단 저편에 남아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하며 사는 우상숭배의 여정과 같다. 이를 시인은 엄히 간구한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6-9).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그들 곁에서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모두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결과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러려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오늘 내게 부여하신 삶에서 충성하는 것,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저와 다른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지 않는 것. 이는 곧 그리 세우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곧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 25:6-7).”
결국 땅의 지혜가 문제다. 내남없이 누구 명사의 말에 귀를 세우고, 목사나 교회의 치리에는 감정을 상해한다. 자신을 주 앞에 세우기보다 저들 이론과 그 처방을 선호한다. 심리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성경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오늘은 누굴 거명하기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에 믿는 자로서도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 주일에 들은 설교보다 저들의 조언 한 마디를 실천으로 삼는 꼴인데… 그만큼 우리의 영적인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로 심화되고 있는 반증이겠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104:35).
이번 주일 설교원고를 다듬고 있으면서, 나는 송축의 의미와 그래야 하는 의무를 되새기게 된다. 왜냐하면 우린 너무 과분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잠 11:19).” 즉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사 3:9).” 늘 우거지 죽상을 하고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서도 말씀 앞에 앉힐 시간이 없다. 기도는 오며가며 웅얼거림으로 족하다. 교회는 의무방어처럼 다니고 현실은 전혀 별개의 삶으로 산다.
결국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이를 알고 그 심각성에 통회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루씩 매순간으로 나누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오늘 하루는 영적전쟁의 현장이다.
예수님은 그에 따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곧 주와 함께 함에서,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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