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때까지 그들이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계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대상 6:32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7
레위지파의 계보로 거주하는 성읍에 따라 정리하였다. 주요 계보 가운데 성전에서 찬양 맡은 자들로 그 책임자와 대제사장의 계보를 언급하고 있다. 시편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이름 헤만, 아삽, 에단의 계보도 눈에 띈다. 48-53절은 아론 계열의 제사장 직무와 그 기록이다. 본문은 제사장 직분의 정통성을 보여준다. 사역이란 그 주어진 역할과 상황에서 주를 찬양하고 예배한다. 31절에 보면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 하는 부분에서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다’는 것은 기럇여아림을 거쳐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다윗성으로 가져다 안치한 것을 가리킨다(삼하 6장, 대상 13, 15장). 그리고 이를 맡은 자들은 33-47절까지 열거된 레위인들이다.
세상은 변하고 시대는 바뀐다 해도 주의 말씀은 항상 영원하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이를 예수님은 보다 직설적으로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하고 언급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우리의 기준은 말씀으로, ‘말씀이 답이다.’ 하는 문장을 시작으로 어제는 성경원고를 작성하였다.
말씀이 답이다. 인생의 끊임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정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①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②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⑴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⑵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 말씀이 말씀을 규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활력이 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 그래서 말씀은
①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신다.
②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③ 이는 우리를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어서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④ 언젠가 우리의 결산은 이를 받으실 이의 눈앞에서, 마치 만물이 벌거벗는 것 같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말씀이 답이다. 하는 전제로 말씀으로 말씀을 규정하는 데서 하는 우리의 송축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보았다. 하여 시인은,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03:22).
곧 우리의 당연한 선언으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은 오늘을 살면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직분은 여러 가지라도 하나라는 데 집중하게 한다.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① ‘내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게 되어 있다. 이를 아삽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하고 찬송의 명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것은,
②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곧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곧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덕택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6).” 하면 오늘을 살면서 주를 찬송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송축의 이유와 목적과 결과가 분명해진다.
나의 묵상글 쓰기와 설교원고 작성이 한 주간의 일과다. 읽는 이가 몇 안 된다 해도 개의치 않는 것은, 먼저는 그것으로 내게 더하시는 은택이 있다. 또한 한 사람이라 해도 저가 그 말씀으로 지금의 어려운 지경을 참고 견디는 힘을 얻는다. 가령 이런저런 문제를 나열하며 기도를 부탁하는 이에게,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1).
하시는 말씀 한 구절을 보내며 말씀으로 위로 받고 기운 잃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잠든 사이에 저로부터 문자가 들어왔는데, 오전에 보내는 말씀이 하루 종일 새 힘을 더하셨다며 지금에 처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이는 모두 말씀이 하시는 일이다. 누구에게도 말했듯이 내가 이처럼 필사적으로 아침마다 말씀 앞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는 까닭은 ‘우리는 주의 꼴을 먹고 사는 양들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저는 말씀이시다.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으로 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이에 오늘도 우리의 찬송이 무엇에서 나오는지? 택정하사 따로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기셨다.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레 6:31).” 찬송은 자랑이다. 자부심이고 흔히 말하는 자존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존감이 낮다느니 하는 표현은 가당치않다. 성도의 제 일 의무는 찬송이다. 찬송은 감사에서 나온다. 가령 힘든 일이라 외국인노동자에게 맡기던 것을 가냘픈 여인에게 맡기는 것은 저들이 박해하고 괴롭히는 단적인 예이다. 일부러 그러는 상황에서 저는 힘들어하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바랐다. 할 때,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81:1).
이것이 찬송이다. 자주 암송하는 대목으로는 욥의 결연함이 느껴지는 이 한 구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즉 하나님이 나를 죽는 자리에 그냥 두신다 해도 나는 주를 찬송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찬송이다. 주께 아룀은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사 30:29).” 곧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찬송하는 삶이다. 에베소교회를 향해 증거하는 바울의 진술은 시적이다. 이를 마디글로 다시 읽으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9-20).
그러니까 우리의 찬송, 우리가 누릴 송축, 잔치의 삶은 실질적이면서 실제적이다. 구호나 낭만적인 추상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이 말씀을 바탕으로 나는 누가 안 왔으면 하면서도 오라고 권면하였고, 아픈 아이가 요즘은 연락을 잘 안 하자 내가 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한다. 성가신 마음과 기꺼운 마음이 부딪쳐 싸운다. 내 안의 갈등은 나의 영혼을 일깨운다. 맡은 바 직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가장 기뻐하시는 예물이다. ‘나 무엇 드릴 것 없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찬송가 가사가 떠오른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35:28).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3).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그럼 이는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당장 어려움을 호소하며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이 부당한 현실을 타개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는 친구에게 나는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사는 날 동안 우리에게 어려움은 없을 수 없으나…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곧 아침에 답으로 보낸 시편 91:11절의 말씀을 종일 묵상하며 ‘부당한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저의 답신은 찬송이었다. 나는 누구에게 말하길, ‘나의 아침 묵상글쓰기는 그것 아니곤 살 수가 없어서이다.’ 하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한 글들이 모여 하루의 삶을 붙들고 일주일 동안 작성하는 설교원고의 기틀이 되고, 주일에 선포하게 되는 말씀의 근거가 된다. 자주 생각하기를 고난이 없이 찬송은 나오지 않는다. 흔히 우리의 기쁨과 환희가 좋을 때, 만족함으로 나온다고 여기지만 앞서 통과하였던 고난이 있었음으로 감사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마라의 쓴물이 없이 어찌 하나님이 베푸신 단물을 마실 수 있었겠나? 광야의 그 뜨거움과 추위가 없었다면 어찌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을까? 홍해가 가로 놓이고, 요단이 가로 막고 있는 절박함 앞에서야 비로소 물이 갈라지고 육지가 된 물을 건널 수 있었다. 고난을 바라고 좋아라할 수는 없지만 오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더 좋고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아, 이 절박함 중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 이와 같은 고백이 찬송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곧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말 3:3).”
나는 누구의 사역에 대한 갈망을 격려하며 한 영혼, 내 곁에 두시는 그 한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로 이 길을 가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나는 이 말씀을 알면서 더는 누굴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픈 아이 하나가 출석하는 주일예배라 해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함은 주를 바라기 때문이다. 고작 한두 명이 볼까말까 한 글이라 해도, 나는 이 묵상글쓰기를 사랑한다. 필사적으로 이 시간을 붙든다. 어디 새벽에 낚시를 가도 나는 그럼 그보다 일찍 일어나 묵상글을 쓴다. 말씀 앞에 나를 읹힌다. 오늘 이어지는 계통의 이름들이 주의 성전에서 주의 성소를 맡은 자들로 오늘 우리 자신을 일컫는 바, ‘사울 왕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저는 오늘 시편을 지어 찬송으로 응수하였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59:1).
아니면 우린 무엇으로 사는가? 기도는 우리의 능력으로 이를 주께 아뢰고 올림으로 찬송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하여 바울은 어떠하든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이것이 우리가 가진 무기다. 우린 이것으로 산다. 하여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것으로 우리는 산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고 솔로몬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고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 14).”
힘들면 기도하고 즐거우면 찬송한다. 기도와 찬송은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하나다. 타는 목마름이 있었음으로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곧 우리의 기도는 능력이다. 주께 아뢰고 주를 의지하는 게 쉬운 일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더욱이 곧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2-3).
주께 아뢰는 것,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아무나 주께 아뢰지 못하지만, 아무거나 아뢴다고 주가 들으시는 것 또한 아니었다. 즉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왜 우리가 서로에게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듯 남부끄러운 일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서로의 기도를 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믿는 자의 기도는 그 능력이 크다. 나의 기도가 저의 찬송이 된다. 오전에 보내준 시편이 오후에 감사와 찬송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저이의 삶을 응원하는데 그 고단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을 날로 풍성하게 체험하며 살기를.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출 23:2).”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5).
마치 어린아이가 무조건적으로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일러바치듯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4:1).
저들이 아무리 뭐라 해도,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0:11).
이와 같은 하소연과 억울함의 호소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향해서는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이 놀라운 체험은 누구나의 것이 아니다. 아무나 주 앞에 나아와 주의 뜻을 바라며 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9-10).
오늘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을 주가 물리치신다. 하여,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6-17).
곧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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