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전봉석 2022. 8. 27. 05:26

 

잇사갈의 아들들은 돌라와 부아와 야숩과 시므론 네 사람이며

대상 7: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시편 60:1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 다섯 지파 반의 계보로, 1-5절 잇사갈과 6-12절 베냐민과 13절 납달리와 14-19절 므낫세 반 지파와 20-27절 에브라임 지파의 주요 계보이다. 28-29절 요셉 자손의 거주지 기록과 30-40절 아셀 지파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북이스라엘의 단과 스불론 지파의 계보가 빠져 있다. 이는 최북단으로 이방 우상숭배가 극심하여 의도적으로 선민의 계보에서 빠진 게 아닐까? 또 하나는 몇몇 지파에서만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강조되었다. 이는 포로 귀환 뒤 아스라엘 재건에 앞장 설 사람을 계수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하나 더, 다윗 왕조 중심의 계보이기보다 북이스라엘 지파의 계보를 수록함으로 후대 공동체를 구성할 때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되었음을 상기하게 한다.

 

먼저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신정 국가인 것을 알리고 과거 하나님의 언약 위에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서 이탈한 북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분열과 대립의 기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이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으로 오늘 시편의 첫 구절이 의도하신 듯 읽힌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60:1).

 

하나님은 당신의 선민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마치고 귀환할 때 앗수르로 끌려갔던 북이스라엘의 후손들도 그들 주요 계보를 알림으로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정당성을 살린다. 곧 하나님은 당신께로 돌아오는 주의 자녀에 대해 저들을 결코 잊지 않으심을 알게 하신다. 앞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앗수르를 통해 저들을 진멸하셨다. 하지만 그 후손들, 남은 자들에 대하여 저들이 누구인가를 알리시기 위해 그 지파의 계보를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주의 자녀들을 잊지 않으신다. 더하여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16-17).”

 

이와 같은 주의 인자하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면하고 돌이키지 않는 데는 별 수 없으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66:2-4).”

 

가끔은 말씀을 마주하는 일에서 나는 심히 두려움과 동시에 감사함을 느낀다. 두려움은 더는 강퍅하여져 나의 마음이 돌이킬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를까 하는 것이고, 감사함에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은 그에 못지않은 나를 이처럼 돌이키시고 회복하신 것이다. 나는 어제 서너 가지 일에서 두려움과 감사를 느꼈다. 먼저는 어느 가정의 일로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제 스물하나 어린나이인데 물놀이 중 다이빙을 하다 척추 3, 4번이 부러지면서 하반신 마비가 온 것이다. 그 부모가 속한 교회 교인들이 합력하여 기도하고, 저들의 기도제목이 나에게까지 알려져서 나는 어찌나 마음이 어려운지 그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다, 주의 뜻을 살피다,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탄식처럼 불렀다. 그럼에도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또 하나는 필리핀 동생 목사에 관한 것으로 아이는 점점 더 악에 악을 더하여 거짓을 꾸미고 그 말에 아이엄마는 기어이 추가 고사로 동생네 가족 전부를 고소장에 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이 있던 아이와 그 엄마를 회유하며 증인으로 서주기를 바란다는데… 자신을 모두가 때렸다는 둥 성추행을 했다는 둥 도대체 말도 안 되는 말들이라 헛음만 나오는데. 앞서 게임에 중독된 어린 아들을 야단치다 아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알코올 중독자로 몰려 가정폭력을 일삼는 것으로 조사를 받았던 이가 결국 그 자식을 건사할 수 없어 중1 된 것을 필리핀으로 보내 동생네가 건사하며 2년 반을 애지중지 돌본다고 돌본 것이다. 이번에 귀국하여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데, 동생도 담당 형사도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두고 혀를 내두르지만 문제는 문제를 만들자고 들면 문제가 되는 세상이란 것이다… 먼저 출국한 사모는 실의에 빠져 혼자 아이들을 돌보면서 마음을 진정하다 결국은 내가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몇 개 챙겨준 안정제를 먹기 시작한 모양이다.

 

다들 속상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아니다. 저들 모자의 악함에 치를 떨면서도 그 영혼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인데…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말하자, 아들이 불쑥 맞고소하고 대응을 해야지. 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도 처음엔 같이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을 하는데, 나는 가령 우리에게 오는 ‘아픈 아이’를 예로 들어 혹시 그 아이 엄마가 나를 두고 지금 ‘그런 식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나도 같이 고소를 하네, 저들 사정을 까발려 어떻네, 하며 맞대응할 수 있겠나? 나의 말에 순간 잠잠해졌다. 아내는 그렇게 말하니까 확 이해가 된다며 더는 말을 더하지 않았다. 저들이 아무리 악하여 없는 말도 지어내면서 일을 부풀려 사건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맞고소를 하며 더 처절하게 대응하고 응징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굳이 하나님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로 하나님을 능멸하다 일찍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던 북이스라엘의 계보를 성경에 기록한 까닭을, 그에 따른 아버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갑자기 이 글을 쓰고 읽다 마음이 뜨거워져 눈물이 핑, 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7:31).

 

우리가 누굴 보고 이 길을 가겠나? 우리가 무엇으로 한평생 이 고단한 인생을 살며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어릴 적 아버지의 목회현장에서 수없이 보았다. 같이 개척을 시작하였던 장로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헌금으로 낸 돈을 돌려달라고 할때, 교회 건축을 하면서 건축부 재정을 맡았던 집사가 돈을 가지고 잠적해서 몇 억을 빚을 고스란히 교회가 떠안았을 때, 그 일로 교인들은 추풍낙엽처럼 떠나고 8년을 넘게 빚으로 허덕이며 이도저도 못하였던 아버지를 볼 때… 나는 사람이 지긋지긋하였다. 그래서도 난 죽어도 목사는 안 한다고 장담하였다. 특히 교회 다니는 인간들을 싫어했다. 저들의 친절함과 겉모양이 역겨워서 주를 멀리 떠나서 살았다. 죽어도 목사가 되기 싫었다. 나의 스물과 서른은 징글징글하였다. 그때 나는 이미 저주 받아 마땅한 자로 살았다. 한데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4).

 

일련의 두 사건들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의 병은 지나친 감정이입이라고 정신과에선 진단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남의 일에 너무 동감하지 말고 가급적이면 피하라는 조언도 하였다. 그러니 내 코가 석 자라는 말, 나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위인에게 오늘의 이 과분한 직분은 대체 무엇일까? 이게 스트레스인지 감사의 계기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들리는 소식이 그러하여, 늘 기도하는 친구의 경우는 여전히 일하는 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두고 뒤늦게 목사가 된 나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저의 모질었던 세월을 생각하면, 행여 나는 저가 그 모친을 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늘 두렵다. 하여 저를 위해 기도할 때면 가슴이 늘 답답하다. 대학을 졸업 후 30년 넘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저이가 어떻게 서로 연락이 닿았는지 모르겠다. 저의 이런저런 사연은 늘 내 안을 오래 휘젓는다. 기도제목으로 받은 것을 두고 나는 하나님께 시비를 걸듯 기도하기도 한다.

 

어제는 더 많은 감사헌금을 드릴 수 없어 마음만이도 드린다는 말에 울컥하였다. 나는 차마 저의 사정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쫓겨 이름까지 개명하고 숨어살아야 하는 처지라, 이처럼 언급하는 일도 조심스럽다. 어쨌든 자신이 벌어야 하고 건사할 사람이 있어 그 형편도 빠듯한데… 오죽하면 자기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이 외국인 노동자들도 같이 일하는 어디 시골 외관 공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것 같다. 그 와중에 마음만 있을 뿐 감사헌금이나 후원헌금도 못하고 있다고 미안해하는 저의 말에 나는 당연히 울컥하며 주께 저를 고하고 아뢸밖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 2:15).”

 

그리고 오후께 도착한 친구의 긴 편지글과 그 내용 속에 담긴 저의 참회와 주를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 나는 무너지듯… 속상하기도 하면서 감사하기도 하였다. 답답하기도 하면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애간장만 태우기도 하였다. 나야말로 요즘 안정제를 너무 자주 먹어서 때론 어지럽기도 할 정도이다. 그러니 제3자의 입장에서는 같이 맞고소를 하라는 둥 그걸 그냥 두냐는 둥 같이 대응하여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둥 여러 말들이 오가지만,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에 따른 예수님의 위로가 왜 이처럼 말씀으로 선명하신지 알 것 같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3-34).” 주가 행하신다.

 

우리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시기를.’ 하여 이 모든 상황을 주께 맡김으로 결코 우리의 길이 헛되지 않음을 주가 만천하에 알게 하시기를.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 나는 그저 저들의 이런저런 소식에 숨이 턱턱, 막히면서 인데놀에 알프람에 리보트릴 진정제까지 더하여, 요 며칠은 서너 시간 간격으로 하루 여섯 번도 먹는 것 같다. 나의 심약함을 주께서 아심으로 ‘건강한 아내’와 늘 단단한 두 자식들이 버텨주고 있어 감사한데,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남의 일로 듣고 말면 되는 일이 나에게는 새롭게 주를 갈망하게 한다. 나는 내가 힘에겨워 눈물을 흘린다.

 

그런 중에 친구의 편지는 생수 같았다. 비록 저의 심정과는 다른 체험이겠으나, 나는 저의 회개와 감격과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로, 심장은 짓눌리는 듯 답답하고 어지러우나 감사가 나왔다. 저의 편지를 여러 번 읽고 한참 눈을 감고 생각하다 길고 긴 답장을 썼다. 서로의 원문을 그대로 이 글에 남겨둔다. 후에 이 글을 다시 읽을 때, 나와 나와 같은 영혼이 조금은 위로함을 받기를. 

 

-친구의 글

형을 만나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내 안에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이 이 글을 쓰게 하십니다.

나의 ‘구부러진 소망’은 교회 생활마저 ‘나’라는 왕국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으로 삼기를 바랐으나 주님의 ‘산 소망’은 그 왕국이 먼지로 지어진 허상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사는 삶의 실제가 ‘애굽의 종살이’임을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내 돈과 내 시간, 내 의지를 기꺼이 주님께 내어놓지 못한 채 딴 주머니를 차고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갈망할 때도 있었으나, 내가 그럴듯한 교회 생활로 자아에게 선물한 보상에 취하여 주님의 포근한 날개 아래 쉬기를 즐겼습니다. 하루의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간을 내어 기쁨으로 찬송하고 주의 말씀을 묵상했지만, 일상을 돌이켜보면 주의 이름보다 내 이름에 누가 되는 것에 민감했고 주님의 애통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더 빨리 반응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주의 성령으로 살지 못하는 이런 ‘신앙생활’ 속에서 나는 연약한 이웃을 보며 안타까워하지만, 그 이웃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작정하여 기도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웃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생기면 눈물로 아파했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문제에 처해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고후1:11

기도하는 자리에서는 주가 베푸신 능력과 주의 말씀을 믿습니다, 아멘! 소리쳐놓고 일상의 자리에서 그 말씀을 붙들어야 할 땐 ‘피식’ 웃었지요.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기도 자리였기에, 내 왕좌를 흔들고 파헤쳐 새 땅을 일구고자 하시는 주의 손길이 닿는 곳으로 나를 떠밀지 못했습니다. 매일 하는 기도의 주제는 결국 자기부정이었지만 십자가 없는 자기부정은 매끼 먹는 오래된 반찬만큼이나 식상하고 익숙한 것에 불과했지요. 자기부정의 이상을 관념으로 소비할 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주님의 자기부정 앞에선 어김없이 발길을 돌려 내가 있던 안온한 자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왜 해!”

형을 통해 주님은 내 신앙의 비틀어진 뼈대를 손보고자 하셨습니다. 내 신앙의 앙상한 뼈대들은 억울하다고 아우성치며 버티려 안간힘을 썼으나, 내 안에 살아계신 성령님은 속히 내 왕좌를 허물고 진리이신 주님의 손길로 다시 세워짐을 기뻐하셨습니다.

어제 구역예배에서는 성경 말씀을 탐구하며 말씀의 맥락을 파헤치는 것보다 주님 앞에 각 가정의 간절한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을 먼저 하였습니다. 가정마다의 사정을 소상히 들을수록 저희를 우상 삼은 삶의 모습들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떠안게 된 곤경을 저희로는 어찌할 수 없어 꺼이꺼이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희가 저희 입맛에 따라 말씀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저희를 살리는 주의 참 말씀을 들을 귀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내 귀로는 주의 말씀을 못 들으니, 주님 귀를 빌려주세요. 제발요.

여전히 나의 왕국에서 내 습성대로 신앙생활 하려는 나를 산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죽도록 나의 왕국에 갇혀 주님을 만나지 못하겠구나, 내가 만든 주를 만나며 그 주를 찬송하며 살겠구나, 하는 탄식이 요즘 기도할 때마다 나를 때립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그것이 존재의 이유가 된 인간 내면의 왕국, 실상은 먼지요 티끌인 그 왕국을 주님은 똑똑히 응시하게 하십니다. 사랑만이 그분의 목적이신 주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그 왕국의 쇠락을 소원하게 하십니다.

 

-나의 답글

우린 누구나 죄인이라는 거. 우리가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거.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더 이상 우리의 ‘죄책’과도 무관하다는 거. 과거로부터의 죄의식, 현재의 자책, 살면서 앞으로 지을 미래의 죄들까지 그리스도께서 모두 감당하셨다는 거.

이를 알면 알수록 주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다는 거. 그렇다고 그럼 죄를 더하겠나? 하고 바울 사도가 물었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율법은 죄의식을 유발하고, 우리로 끊임없이 죄인임을 상기시켜 죄책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다 유대주의-바리새인과 제사장들처럼- 스스로 의롭고자 율법주의자가 되게 하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하고 진술한 뒤 바로 뒤이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하고 묻고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답답함을 더해서 설명하고 있어(6:1-3).

곧 우리가 받은 은택은 전적으로 거저주신 바, 어째서 나 같은 자를 그처럼 사랑하시는지… 우린 이 비밀만은 저 천국에 가서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다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이 은혜는 신령한 복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신 일로, ‘이는’ (지금의 너처럼?)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신 것이야. 내가 그처럼 먼 길을 돌아 마흔 줄이 넘어서야, 결국 자살 직전까지 치닫다가 돌이켜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하신 것도… 순종하기까지 복종시키시는 것도(파산이나 공황과 같이, 우리의 어려움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나는 이미 ‘창세전에, 택정하신 자로 예정하신 주의 섭리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 (좀 어려운가?)

아무튼 교회는 주가 피 값으로 세우신 것으로 우린 결코 ‘유아독존’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예전에도 있었지만 요즘 부쩍 교회와 주일에 교회에 모여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개인적인 묵상과 자기 선호에 따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이는 모두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야. 신약 어디에도 고독하고 경건한 신자는 없어. 도움이 될까 하여 성경 몇 곳을 근거로 들면,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고전 5:12).”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3-14).”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벧전 5:2).”

……

지금 너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으나 그와 같이 통회하는 마음이 귀하고 소중한 주의 은혜인 것을 감사하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너무 자책하지도 조급해하지도 말고, 감사함으로 주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주의 영이 너와 나를 이끄실 것을 믿으며.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주의 은택이 언제나 너의 마음에 평안을 더하시길 기도하며.

 

이내 우리는 어떠하든지 남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여전히 어떤 어려움이 어떻게 우리를 굴복시키려 공격한다 해도 우린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가지고 주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 이에 오늘 시편이 이정표가 되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60:1-2).

 

당장이라도 저 시커먼 땅 속으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듣다보면 다들 사는 게 지옥 같다. 다들 악다구니를 하며 악에 악을 더하면서도 그것을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잘만 사는 것 같다. 이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민을 잊으신 적이 없다. 결코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돌이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신다. 오늘 역대기서의 한 장도 그런 의미이다. 하여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하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4).

 

주는 하신다. 반드시 이행하신다.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심적으로나 육적으로 나약하여 하등에 쓸모없을 것 같았는데, 어찌 나 같은 자에게도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는지. 나는 이제 나의 남은 날들이 주만 바라기를. 주가 맡기신 생을 모두 다다를 동안에 더는 주 밖으로 떠나지 않기를. 서른과 마흔 사이 나의 죄악되고 더러웠던 죄악도 주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처럼 귀한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신 것이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9-11).

 

이와 같은 말씀이 없다면, 나는 이제 무엇으로 살까?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5-6).

 

오늘 시편의 약속이 내 것이다. 나를 두고 이르신다. 우리의 것이다. 내 곁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저들의 심령을 주께 고함으로,

 

기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

(7-8).

 

세상천지에 하나님 것이 아닌 게 무엇이겠나? 사탄도 기를 쓰고 이를 부정하나 저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가두어 영원한 형벌에 처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우리는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이에 오늘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60: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