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전봉석 2022. 9. 24. 05:26


여호와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시옵고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더라
대하 6:42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시 88:15


언약궤를 지성소 안식처에 모시고 솔로몬이 봉헌기도를 한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증거로 성전 건축이 이루어졌음을 알린다.

성전을 향한 일곱 가지 기도와 그에 대한 응답을 구한다. 첫째, 선악의 유무 관계를 주의 제단에 가지고 나와 기도할 때(22-23). 둘째, 이스라엘이 죄로 인하여 전쟁에서 패하고 성전에 나와 회개할 때(24-25). 셋째, 죄로 인해 가둠의 형벌을 당할 때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26-27). 넷째, 이스라엘에 임한 재앙으로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28-31). 다섯째, 이방인일지라도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32-33). 여섯째, 전쟁으로 떠나면서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34-35). 일곱째, 범죄하여 적국으로 포로로 끌려갔을지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36-39).

그러할 때 주께서 응답하시고 구원을 베푸시기를. 우리가 주의 전에 나와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본문을 열왕기상 8:22-53절로 다시 보면 이는 병행구조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다.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내 안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기도는 이에 따른 사투다. 하나님은 결코 내 뜻을 돕지 않으신다. 나의 기도를 곧이곧대로 들어주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은 주의 뜻을 알게 한다. 주를 인정함으로 더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심을 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러므로 우린 확신을 갖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린 당연히 죄인이나 더는 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때 우린 주의 성전을 경험한다. 주의 전에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어디에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주의 은혜의 손길은 체험된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고로 우린 언제 어디서나 보호하심을 받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 3:17).” 이는 확신이다. 이는 어디서 나오는 권능인가 하면 기도에서다. 즉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 설령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내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에서다.

어제는 친구에게 그와 같은 설명을 들려주게 하시려고 서로 만나게 하신 모양이다. 그렇게 청명하던 가을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일더니 순간 비바람이 강한 돌풍과 함께 일었다. 순식간에 파라솔이 날아가고 거친 빗줄기가 몰아쳤다. 마침 우리는 그럴 것을 대비하여 의자와 가방 따위를 차에 옮겨두었다. 그리고 매점에 가 있었다. 그렇게 30분 남짓(?) 거칠고 세차게 몰아치던 비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러났다. 친구는 동생 일을 물었고, 그러하여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저는 뜨악한 표정으로 그런 신호(?)를 어찌 아는가? 하고 궁금해 했다. 자신도 이제 믿는다고 믿는 자로 살지만 그다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르겠다는, 굳이 그렇게 이해하고 감사할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우린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누구보다 서로의 곁에서 서로의 이런저런 삶의 질곡을 잘 아는 친구였다. 중1 때부터 알고 고등학교 때는 서로 몇 번 가출을 하고 휴학을 운운할 때도 곁에 있었다. 서로 가정을 이루고 함께 지내면서도 그 사정을 다르지 않다. 뒤늦게 내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는 경우도 ‘이성자의 시선’으로 냉철하게 뭐라 현실적은 일로 나무라던 친구가 그이다. 그도 이제 갈급함을 느끼는 것이다. 여의치는 않다. 한데 ‘이런 소릴’ 들을 때면 부러움 같기도 하고 어떤 호기심 같기도 한 것이 자신은 왜 그런(?) 뚜렷한 증거가 없는지를 묻곤 한다.

저도 인정하기를 자신은 나름은 성실하게 살았고 지금도 누구보다 바쁘고 성실하게 할 일을 한다. 아무래도 설계사란 직업적인 특징상 건축 현장을 다니고, 때론 저들과 어울려 술자리도 마다할 수 없고, 주일에 교회를 가고 성가대도 하고 남전도회도 참석하지만 이 또한 사회적인 일로 간주할 뿐 저들이 더러 간증하며 주의 은혜에 감격할 때 소외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나는 문득 예수를 찾아온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저는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키며 성실하게 따랐다. 자신도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의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고 하신다. 청년은 괴로워하며 돌아간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를 따랐는지, 결국은 돌이키지 않았는지 성경은 열린 이야기로 끝이 났다.

친구도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을 자기 것을 남에게 주지 못한다. 그의 부친이 그러셨다. 내 기억으로도 지하실에 어떤 물건이 가득한데 이를 버리지를 못하셨다. 심지어 누가 주거나 쓸모있다 싶으면 주워오기도 하셨다. 그것 때문에 어머니의 성화가 있던 것도 기억난다. 친구는 낚싯대가 넘치게 많다. 찌도 물론 여러 개다. 하필 내가 두 개밖에 없는데 하나를 잃자 저는 선심 쓰듯 하나를 주었는데 자신이 안 쓰고 처박아둔 것을 주었다. 바늘을 달라니까 가득한 낚싯바늘 가운데서 저도 안 쓰는 것을 골라주었다. 나는 저의 성향을 알고 있어서 굳이 서운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저의 영적인 문제에도 영향이 있다는 것을 안다. 본인도 말하길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고 여겨 버리거나 남을 주지 못한다. 그러다 안 쓰고 썩어 버릴 때까지 처박아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본인의 막힌 영혼은 이와 같다.

나는 아직 저에게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저는 매우 더디다. 아집이 그만큼 강하고 자신이 옳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좋은 점으로는 올곧으나 주 앞에서는 완고함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도가 없어서다. 기도의 벽을 마주한 적이 없어서다.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벽에 부딪혀봐야 안다. 우리가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은 이를 깨기 위해서다. 하여 들어주실 것을 간구하지만 들려주시기를 바라게 된다. 내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는 기회를 얻는다. 나는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없어 친구도 아는, 내 인생의 이상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해주었다. 저는 늘 신기해한다. 누가 등록금을 대신, 어떤 일 앞에서 그런 기이한 우연(?)을, 저의 표현은 미숙하였으나 아는 영적인 일이라 나는 말할 것과 말하지 말 것을 은연중에 주가 함께 하실 것을 바랐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물론 우린 어떤 어려움 앞에 서면 두렵다. 그러나 성경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이것이 어찌 내게 가능한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내 안에 어찌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6-7).”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남은 과업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곧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가령 나는 또 늘 앞서 기도를 부탁하는 어느 친구를 위해 기도하나 저에게도 기도를 당부하고 본인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린다. 하지만 저는 그 맛(?) 참 기도의 힘을 체험한 적이 없다. 친구는 아예 ‘널 위해 기도할게.’ 하면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굳이 그런들? 하는 표정이다. 나는 저로 주가 알게 하실 것을 믿는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주의 위대하심은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직접 경험해야 할 문제이다. 누가 대신 일러주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시편은, ‘무덤 앞’에서 ‘구원의 문’을 발견하는 성도의 기도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88:1-2).

이때 우리의 기도가 언제 나오는가 하면,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1-2).

즉 우리가 흔히 평소 흘려 말하듯 기도하는 내용은 비교가 안 된다. 마치 들어주시길 바라지만 안 들어 주셔도 어쩔 수 없는, 따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절박함이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왕상 17:20-21).” 한 생명을 놓고 그 영혼을 주께 맡기는 기도다.

기도 응답이 없을 때 실은 성도의 잠재적인 실력을 알 수 있다. 저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좋을 때야 누군들 좋지 않겠나?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2:24).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31:22).

어떤 절박함,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88:4-5).

오늘 시인은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럼에도 주를 바란다는 것,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해 20:12).” 하여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누가 묻기를 낫고자 기도하지 않는가? 하고 나의 상태(?)를 두고 염려어린 질문을 하곤 한다. 솔직히 더는 안 한다. 다만 그것으로 주가 사용하신다면, 그리하여 말 못하는 문제를 안고 신음할 때 같이 그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울어줄 수 있는(울어준다는 표현은 그릇되다. 나도 같이 서러워서 운다. 하나님은 자녀가 서러워하며 흘리는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곧 우리의 기도, 서로의 나눔은 ‘무덤의 문’에서 ‘구원의 문’을 여는 일과 같이 신기하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16:15).

하여 우리의 생사화복이 모두 주의 것임을 인절할 때(시 88:6-7) 우린 감히 알게 되는 것이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 38:16).” 이를 아뢰고 호소할 수 있는 전능자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말이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88:10-11).

하는 시인의 반문이 도리어 주를 인정하는 고백이 된다. 그러실 수 있음을 알고 그리 아뢰는 것인데, 우리의 공포는 들어주시지 않을 때 일어나지만 우리의 평안은 들어주시기 않아도 주는 선하심을 인정할 때에 확신을 더한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나는 이를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었고, 언젠가 저의 어느 날에 주께 고백하며 감사로 새 힘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하였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88:15, 17).

그러할 때 기도는 진실하여진다! 아이러니하지? 어찌 망하고 찢기고 더는 소망이 없다 할 때에 주의 선하심을 비로소 알게 하시는 것일까? 심지어,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8).

한데 그러한 때에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하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를 위해 기도하며,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