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또 하나님의 전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니 곧 금 제단과 진설병 상들과
대하 4:19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내부와 이에 사용할 각종 기구들을 제작하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성전에서 사용하는 놋기명 가운데 놋바다에 물을 담아 두었다. 이는 “또 물두멍 열 개를 만들어 다섯 개는 오른쪽에 두고 다섯 개는 왼쪽에 두어 씻게 하되 번제에 속한 물건을 거기서 씻게 하였으며 그 바다는 제사장들이 씻기 위한 것이더라(6).” 우리가 씻는다, 하는 의미는 회개를 떠올리게 하고 결국 놋바다는 우리 죄를 씻어 줄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 바다라 부른 것도 그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이를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연상하며 점점 차오르던 에스겔서 47:1-12절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1).” 이 물은 점점 불어 무릎에 오르고 허리에 오르며 사람이 헤엄쳐야 할 정도이었다. 곧 우리 주 예수의 은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주의 은총이 우리 죄보다 넓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주의 넓은 품 안에 들고, 그 죄가 깊어 차마 내 속 마음 저 안쪽 스올 깊은 곳까지 이른다 해도 주의 사무치는 사랑이 더욱 깊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곧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오늘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물론 ‘오는 여러 세대’에까지 나타나게 하신다. 우리가 주의 은혜를 받은 자로 산다는 일은 말이다.
며칠 나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생각하고 이를 묵상하며 성경에서 그것의 유익을 찾아보았다. 결국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너무 많은데 그것이 때로는 가족의 일이고 나아가 돈이나 자신의 건강, 좌절 등의 낙심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또한 우리 주 앞에 내어놓으면 감당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데서 안도하게 된다. 이는 마치 식물과 같아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결국은 인내인데 이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즉 오늘 본문에서 여러 성전의 기물 가운데 물두멍과 그에 담긴 물로 씻음을 두고 그리 연상하게 된다.
그게 무엇이든지 같은 것이겠지만 특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심령의 고갈과 슬픔을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사랑은 곧 그만한 희생과 헌신으로 채워지는 일일 텐데, “또 제사장의 뜰과 큰 뜰과 뜰 문을 만들고 그 문짝에 놋을 입혔고 그 바다는 성전 오른쪽 동남방에 두었더라(대하 4:9-10).” 이를 가까이 두어 언제든지 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사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우리의 어떤 선행과 의로움으로가 아니었다. 곧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여 우린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돌아보아 자신의 죄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거기에 있는 한 영혼을 두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는 삶으로 또는 주 안에서의 성실함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자주 생각하는 것은 소명과 사명의 차이다. 소명은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사명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굳이 그리 나누어 구분하는 것은 예수께로 나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많았으나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사명자는 적었다. 이에 예수님은 한사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인데 이는 다시 인내로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기도 하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그러니까 단지 거저 받은 은혜라고 해서 거저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거저 받은 자는 앞서 자신이 그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고 날마다 눈물로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 앞에 황송할 따름이다. 그런 자가 거저 얻었다 하여 이를 헛되이 탕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값은 엄청나서,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시 49:7-9).
곧 죽음 없이 영원히 산다 해도 우리가 거저 받은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날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하여 오늘 본문의 여러 성전의 기물들 가운데 물두멍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묵상함으로 나의 죄가 씻김을 받는 데 놀라움을 갖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그러므로 우리의 인내는 결코 사사로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바울 사도는 중보한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곧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이를 위해서도 나는 우선 이 시간을 잃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루 중에 이 시간만큼 전적으로 말씀 앞에 앉을 기회기 없다. 특히 요즘은 아내가 장모 병간호를 위해 병원에 일주일 들어가 있어 오후에는 빨래를 하고 식사를 준비한다. 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그래서들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들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한 번 세탁기를 돌리고 널고 개고하는 일에서부터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데 드는 시간이며 수고가 장난이 아닌 것이다. 새삼 아내는 위대하였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저녁이 되면 눕기가 무섭게 혼곤한 잠에 빨려든다. 그러다가도 이처럼 새벽에 눈을 뜨면 그게 몇 시가 됐든 다시 잠을 청하지 않고 말씀 앞으로 나를 앉힌다.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에서다. 만물의 목표는 오직 하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것에 따른 인내는 불가피한 것이다. 특히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 하물며 그게 가족이며 자식이라 해도 희생 없는 사랑은 없고 감정이입 없는 중보는 없다. 누가 말하길 나는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데 이는 내가 더 그 감정에 빠져들기 때문이란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이를 경계하기는 하는데, 돌아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기능인이 아니다. 직분은 직업군의 하나가 아니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 드는 마음은 인내가 아니면 저마다 사무적일 따름인 것이다. 사랑하는데 아프지 않을 수 있나? 누굴 위해 기도하는데 감정 없이 가능하겠나? 눈물은 그 열매다.
이를 두고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곧 우리가 가진 믿음의 덕은 올바르게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되고 이 들음은 곧 옳은 지식을 형성하는데 엄연히 절제를 필요로 한다. 이단을 구분하는 간단한 저울은 절제다. 저들은 늘 넘치게 과하다. 성경공부도 성령에 대한 갈망이나 요구 또한 그러한 자신을 헛헛함을 채우려하는데, 이는 모두 자기함정일 뿐이다. 해서 베드로 사도는 지식에는 절제가 반드시 필요하고, 이는 결국 인내로 다스려야 한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게 능사가 아니라 군형 잡힌 지식의 덕으로 믿음 안에서 경건함으로 이루어진다. 경건이란 바울 사도의 표현처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 의미는 심오하여서 며칠을 머금고 있어도 묵상이 모자라다. 그러나 간단하게 정리하면 ‘형제 우애’다. 곧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데 이 모두를 중심에 둘 수 있는 구심점은 절제이고, 절제는 필연적으로 인내를 요구한다. 이는 무턱대고 참고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가령 우리 곁에 원망하는 자가 있나? 저를 본보기로 삼아 이를 멀리하는 것이고, 낙심하여 자기 세계에 젖어든 자가 있나? 그의 비극을 생각함으로 오히려 인내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여러 기물과 여러 행사를 두고 내가 굳이 물두멍과 그 바다에 담긴 물에 씻음을 두고 머문 것은 ‘이와 같은 시간’ 곧 하나님과 나의 이 단둘이 있는 시간을 나는 소중히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이에 오늘 시편은 유익하다. 우린 무엇으로 고통의 늪을 통과하고 고난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까? 물론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데 이는 우리의 곤고함을 주께 아뢰고 부르짖는 일에서 새 힘을 얻는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86:1-2).
곤고함은 고통 중에 있음이다. 어떤 억압으로 옥죔을 견딜 수 없어 우리 영혼이 궁핍하다. 나름 하려고 하는데도 안 되는 일 앞에서 때론 화가 또 슬픔이 나를 오히려 짓누르려 할 때,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대상 16:11).”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인내할 수 있겠나?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나는 그 하나의 방법으로 이 시간,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쓰는 것으로 모든 시름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다른 무엇에도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나에게 이 시간은 사수해야 하는 것이다. 지키지 않으면 제일 먼저 나의 피로가 약한 마음을 이를 못하게 한다. 그러니까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그 중요성의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도 못한다. 이때 ‘이래서’와 ‘저래서’의 경계에 염려가 있다. 염려는 늘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이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살 궁리를 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그래서 나는 이를 적어보라, 자주 권하고 자신이 적은 것을 되새겨보는 일을 권장한다. 말은 감정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도 글은 정제되어 적절한 쓰임을 찾아낸다. 말과 언어가 다른 것은 소멸과 남음의 차이만큼 뚜렷하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3-5).
나의 또 하나 나름의 방식은 가령 누가 기도를 부탁하면 따로 노트를 두어 저의 사연을 간단히 적어둔다. 물론 생각날 때마다 저의 이름을 떠올리고 주께 아뢰지만 이를 적어두면 그 문제가 해소되었을 때 더러는 지워지는 즐거움도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귀한 자세는 끝까지 인내하며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은 이를 알게 한다. 또 하나, 기도의 필수는 주가 주시는 기쁨이다. 실제 헌신은 희생만이 있어 고생스러운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있어 가능하다. 그러니까 내가 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앉아 말씀 앞에 나를 두는 일이 단순하게 참고 견디는 것이 전부이겠나? 아니다, 말씀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쓰고 다시 교회로 나가 퇴고를 하며 다시 읽을 때 또 새로운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을 느낀다. 오늘 시인도 그 찬양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4).
이와 같이 지혜로 적용하고 남들에게 설득력 있게 호소하는 전달이 우리의 삶이다. 하여 이를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여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나는 곧 주의 냄새가 된다. 그뿐인가? 이에 버금가는 또 다른 아름다운 표현이 우리로 ‘그리스의 편지’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이에 우린 누군가에게 다 읽히는 삶이다. 이에,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6-7).
오늘의 이런저런 나의 이야기가 실은 구차하고 면구스러울 때도 이것으로 주의 은총을 나타낼 수만 있다면. 우리 교회가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교회’로 그 사명을 다할 수만 있다면,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즉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8).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 부르짖음은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사 41:7).” 곧 말씀에 의지하는 것으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주의 약속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이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그러할 때,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86:11).
일심(一心)은 하나의 마음으로 이를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저의 선입견과 아집과 오랜 세월동안 굳어진 마음과의 싸움이다. 상대는 이를 깨지 못해서 완강하게 우리를 공격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은 주께서 그것, 반석을 깨뜨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주를 인정하는 것이 넘쳐나게 하실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하여 오늘도 나는 바란다. 주께 간구하기를,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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