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전봉석 2022. 9. 23. 03:37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은과 금과 모든 기구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두었더라

대하 5:1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1-2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칠월정기에 백성들의 대표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한다. 언약궤를 성전 안 지성소에 들인다. 성전의 찬양단이 성소 밖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임재하신다. 언역궤는 그 자체로 신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의 상징이다. 언약궤가 성전에 모셔지는 것은 당연하다.

 

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서는 아삽, 헤만,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세마포를 입었다.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제단 동쪽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백이십 명이 함께 서 있다가(12).” 세마포는 성도로서의 옳은 행실이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정결함과 성실함, 의로움으로 옷 입는 것은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 앞에 끊임없이 갈구하는 모습이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이에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또한 우리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곧 마음이 청결함은 주를 항상 바람이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늘 그 마음에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겠다. 우리로 의를 행하게 하시고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는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잠 15:9).” 하나님은 의를 행하는 자를 좋아하신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21:3).”

 

이는 결국 우리가 주 안에서 살아간다는 증거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그러므로 예복 곧 세마포를 덧입는 일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더러운 죄악의 의복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실 것이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3-5).”

 

우리가 완전함을 얻으려면 구주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저의 의로 덧입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훗날 우리가 잔치에 들어갈 때 이 옷을 입지 않았을 경우 밖으로 내쫓겨 어둠 가운데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마 22:1-14). 이는 단지 상징의 의미가 아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5).” 하나님 없는 의는 없고 의를 행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는 없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전적으로 예수를 믿고 그의 의로 덧입음을 받은 것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 말씀을 되새길 때마다 늘 같은 죄를 반복하며 사는 나의 날들이 부끄러워진다. 할 때 나의 이와 같은 고백 가운데 하나님의 영은 임재하신다. 오늘 본문 13절,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이를 다시 앞으로 가서 보면 우리 안에 주의 언약궤 곧 말씀을 모시고 있을 때 주가 그 가운데 임하신다.

 

말씀이 때론 두렵기도 하고 때론 감격스럽기도 한 것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곧 우리의 만남이 결코 주 안에서 헛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 자신들이 마주하고 사는 하나님을 시인하고 찬미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이는 우리 영이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이러한 말씀 앞에서 나는 감격하고 늘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주를 경외함으로 주를 바람인데,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묵묵히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마땅히 행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러므로 언약궤를 내 안에 모시고 나는 세마포를 입고 주를 찬송하는 것은 복되다. 인생이 아무리 힘겹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은 어떠하든지 선하시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1-23).” 아, 이것이 아침마다 나로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 그뿐 아니라,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24).”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25).”

 

어제도 이와 같이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주를 바랄 때에 주의 긍휼하심에 대한 감격이 새삼스러웠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2-33).” 오늘을 살며 어찌 우리에게 근심이 없을 수 있을까? 한데 이 근심은 본심이 아니시다. 우리의 고생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게 아니다. 하면 이를 통하여 주를 바라고 섬기는 일에 항상 그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나의 삶에 중심이 되기를. 그런데 늘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것을 행하곤 하니 그때마다 나의 죄악 됨으로 나는 비명을 지른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를 살면서 느끼고 그때마다 절규가 또 화가 내 안에 이는 것은 복되었다. 바울은 그러한 자신을 통찰하며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이율배반적인 자신을 돌아볼 때 누가 감히 주의 일을 하는 자로 자신을 내세울 수 있을까? 또는 자기 나름의 희생과 노력을 두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까? 아,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내가 주를 사랑하나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 안에 있는 죄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이로써 괴로워할 줄 알고 이와 같은 괴로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2).” 또 다른 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3).” 이 두 자기의 싸움이 날마다 매순간 거듭되는 것을 괴로워할 줄 아는 게 복되었다.

 

친구가 전화하여 새벽 낚시를 가자고 하였다. 나는 서둘러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그와 약속을 정했다. 그것은 저의 말투가 예전 같아져서 ‘사는 다 그렇지 뭐, 인생 뭐 있어? 그러다 죽으면 다 썩어질 것!’ 하는 추임새가 비명처럼 들렸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가, 하는 마음이 먼저 쓰였다. 곧 어떤 수술을 앞두고 건강을 잘 돌보라고 할 때 툭, 하고 나오는 저의 말에 요즘 그 영혼이 삭막한 이유가 궁금하였다. 이래저래 나 역시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새벽 이른 시간에 만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먼저 일어나 묵상을 한다. 말씀을 끌어다 그 앞에 앉는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12:5).” 내가 저를 생각함은 친구 이전에 같이 주를 바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거의 몇 년간 소원하였던 적도 있다. 즉 앞서 그와 같은 태도에는 뭐라 응대할 수 있는 말이 나에게는 없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말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하찮고 초라해지는지. 만일 그렇다면 그런 인생을 위해 우리 구주께서 사람을 입고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가치가 없어진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오늘 시편을 묵상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삶은 그 황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퍅해진다.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87:1-2).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곧 내 안에 주를 모시고 산다는 일은 때로 ‘저의 일’로 마음이 쓰여 주께 바라고 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감사할 수 있는 용기, 그 믿음의 근본은 내 안에 주를 모심으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곧 온전히 주를 바라며 주의 나라를 사모하고 사는 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나는 이처럼 말씀을 말씀으로 찾아가며 그 뜻을 헤아리는 것이 좋다. 이를 내 삶으로 돌아보며 주를 바라는 것,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3-4).

 

세상 그 무엇도 주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고로 나는 누구인가? 할 때 부끄럽고 송구함과는 상관없이 나는 주의 자녀임을 인정하는 것.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 일은 내가 시작한 게 아니다. 내가 마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나는 친구를 생각하고 또 누구를 생각하며 저를 위해 기도하다, 나의 나 됨으로 주 앞에 절규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5).

 

나를 나로 세우신 이가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고, 주 안에서 서로의 만남 가운데 주가 함께 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6-7).

 

그러므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