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고 여로보암을 치러 가던 길에서 되돌아왔더라
대하 11:4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과 함께 북부 지파의 반역을 진압하기 위해 르호보암이 군대를 소집한다. 이에 하나님은 저를 막으시고, 이 모든 되어진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을 알리신다. 우린 주의 말씀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주의 백성이 아니면 이에 따른 순종이 가능하지 않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0).
우리는 더러 주의 뜻을 거스를 때도 있지만 우리 안의 ‘어떤 장치’ 곧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거역하지 못한다. 이는 단순히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양심은 자신을 향한 호소라면 신앙으로의 찔림은 주께 향한 호소다. 이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우리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식하게 한다. 그래서도 우리 안의 복이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이는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발끈하여 화를 삭히느라 여념이 없다면 내 안의 주의 영은 나를 돌보시며 바른 자리로 인도하신다. 그것이 우리로 악의 꾀를 따르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출 23:32-33).” 곧 우리로 구별되게 인도하심이겠다.
부끄러우나 나는 아들에게 서운하였나보다. 이러저러하여 어쩔 수 없이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기고 공부를 이어가야 하는데, 생뚱하니 말이 없고 며칠 전부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는 막상 짐을 옮겨주고 나름 더 낫겠다, 하고 생각하려는데 아들애의 말없음이 마음에 걸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뭘 자꾸 바리바리 챙길 것과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두고 마음이 부산하였다. 그렇듯 수선을 떠는 아내에게 공연히 뭐라 하고 뚱하여 있으려니까 내심 그게 또 마음이 걸렸다. 저녁에 가정예배를 마친 후 아니나 다를까 ‘바리바리 챙긴 것들’을 손수 여미며 같이 바라다 주었으면 하는 아내를 따라 보따리를 챙겨들었다. 그렇게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들녀석은 마음이 좀 그랬던지 정리를 말끔하게 끝낸 실내를 사진 찍어서 가족방에 올려주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콧등을 찡하게 하는데, 순간 하나님의 마음의 마음이 이러하실까? 하는 생각에 울컥하였다.
오늘 본문은 남유다의 1대 왕 르호보암의 결행을 두고 하나님이 막아서신다. 북쪽 지파 이스라엘도 주의 자녀라. 하나님은 우리의 화목을 원하시고 그 마음의 서러움을 위로하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우리가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배치된다. 우리는 그 은혜의 분량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고 이에 주를 바란다. 이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 주의 사랑의 총무게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이다. 하여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5:19).”
그러므로 우린 각자 그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고 행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그래서일까? 나는 일찍 눈을 뜨고 이른 시간에 주의 전에 올라와 묵상글을 쓴다. 곧 우리는 일반적인 가치와 그 기준으로 자신의 생을 돌아보지 않는다. 주의 마음은 때로 우리의 이해와 상식 밖에 있다. 이는 악으로 물든 마음에 대하여 바로잡으시려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의 악의 본질은 무언가?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전달하고 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데 이게 또 터진 웅덩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무엇, 그것이 설령 가족이고 자신의 신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앞서는 마음은 모두 ‘터진 웅덩이’가 된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였던 사탄의 빌미는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은 것은 주시지 않는다.’는 유혹이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말 좋은 것은 주실 리 없다는 의심이었다.
단순히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불순종의 자리에 빠지고 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모든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계명의 첫째 되는 것도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이다(출 20:3). 마음이 앞서면 행위는 따르게 돼 있다. 그렇게 하여,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4).” 이러한 불순종의 행위에 앞서 하와의 마음에 든 생각도 같았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a).” 앞서 그 나무는 여러 과실수 가운데 하나였고, 특별히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의 증표일 뿐이었다. 한데 사탄의 꾐이 그 마음에 들어가자, 생각은 앞서 달려갔고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b).”
그러므로 우리로 마음을 다잡게 하시기를 항상 깨어 구하여야 한다. 정작 이를 행함으로 옮겼을 때는 너무 멀리 간 경우가 태반이다. 어제는 누구에게서 한 청년을 위한 기도부탁을 들었다.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수재이다. 한데 그 마음에 어떤 생각이 사로잡고 있는 것인지, 은퇴하고 돌아와 한국에 있는 부모와도 연락을 두절하고 자신의 하던 일도 작파한 뒤 은둔형외톨이로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의 안에 주의 영의 불씨가 남은 것인지, 주일에만 잠시 교회에 출석하였고 그 교회 청년부를 맡고 있는 저로서는 그 청년을 설득하여 정신과도 데려가고 나름 한다고 하는데 아무런 진척이 없는 것이다. 오죽하니 그 부모를 좀 만나 뵐까 하는가 본데….
우리의 영적 방비가 무너지면 우리는 누구라도 이와 같은 실의에 빠져들 수 있다. 하여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6:41).” 우리의 연약함을 안타까이 여기셨다. 우리의 악함은 마음이 앞서고 행함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이는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연마해야 하는 신앙의 기본은 두 가지다. 먼저는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37:4).
그렇게 마음을 먼저 앞세울 때 다음으로 행함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5-6).
이를 위하여 심지어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까지도 앞선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우린 우리의 의지를 붙들어야 하는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8).” 이를 역순으로 다시 묵상하자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때 부모나 자식에 앞서 하나님을 우선할 수 있다.’ 이는 실제 나의 의지로는 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러할 때 우리가 고난 중에도 바라는 것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곧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은 ‘잠시’다. 이에 모든 것을 기꺼이 뒤로 물릴 수 있는 것은 주를 바라고 기뻐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14-15).”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의 마을과 산업을 떠나 예루살렘, 주의 전으로 나아왔다.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마음이 아니고는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곧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실제 말이 쉽지 누군들 이를 해낼 수 있을까? 특히 가족이나 자녀를 향해 두신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알게 한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이와 같은 믿음을 붙들고 바로서기란 주의 권능으로만이 가능한 일이다.
어느 청년의 부모에 대한 적대감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감히 내가 나서서 뭐라 할 건 아니겠으나 반드시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활동하고 계실 것을 믿는다. 또한 필리핀 동생과의 통화에서 저쪽이 막무가내로 몰고 가는 데 있어 속수무책인 것은 저의 다음 행보 때문이다. 기소유예든지, 합의든지 그 어떤 결정에도 상관없으나 그 다음 저가 교회를 공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데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어떤 형량이라도 달게 받겠으나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데는 그 무엇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 소개되는 레위 지파의 행보와 같이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모든 산업과 자신들이 의지하고 살던 마을을 떠나야 한다 해도,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우린 다만 주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이루실 것이다. 우린 다만 그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는 행위에 앞서는 우선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럼에도 동생은 저들 모자(母子)의 오늘을 안타까워하였고 그 심령을 두고 갈등하였다. 이에 오늘 시편이 그 위로가 크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3:1).
우린 종종 따져 묻는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이로 억울한 마음도 들고 속상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욥 21:7).” 그럼에도 주를 바라며 묵묵히 모두 받아내는 것은,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출 15:18).”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시지 않고 음악이나 어떤 그림으로 오셨다면 어땠을까? 한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103:19).
우리로 이를 알게 하심으로, 우리로 전능하신 이를 찬송하며 감사하게 하신다.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7).” 이에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93:2-4).
그러므로 우린 주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 앞에 의뢰한다. 주가 행하실 것을 안다. 앎으로 믿고, 믿음으로 행한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이와 같은 고백으로 붙들린 마음이라면 더는 어찌 되든지 걱정할 게 아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곧 오늘의 고충이 우리의 상급이 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오직 우리는 주의 이름이 전파되기를 바랄 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118:6).
이와 같음은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하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결국 우리의 마음은 행함이란 그릇에 담기는 것일 테니,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9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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