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전봉석 2022. 9. 30. 05:11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

대하 12:14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시 94:22

 

 

남유다 1대 왕 르호보암이 죽었다. 저들이 범죄하여 저의 제위 5년에 애굽 왕 시삭이 침공한다. 하나님은 선지자 스마야를 세워 유다를 책망하고 저들이 뉘우쳐 회개함으로 저들을 아주 멸하지는 않으신다. 시삭의 침공과 약탈로 유다는 쇠퇴한다. 그러니 르호보암이 회개함으로 저의 왕위를 다시 견고하게 하신다. 저는 죽고 그의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된다.

 

지도자의 자질이 그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새삼 묵상하게 된다. 그 교만은 무지한 것이어서,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11-12).” 술 취한 자의 안하무인격과 같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도 우리의 기도가 절실하다. 곧 우리는 무엇을 사모해야 하는지,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르호보암은 17년을 다스렸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왕상 14:21).” 오늘 본문은 열왕기상 14장 21-31절과 병행구조로 이어진다. 여기서 보면 저의 모친은 암몬 사람으로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그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곧 그 신앙의 뿌리는 무시할 수 없다.

 

성경은 늘 강조하시길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곧 주의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하며 생활하는가에 따라 그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곧 우리의 신앙적인 순결은 우상을 우리 안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인데, 이는 먼저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주로 기뻐한다는 것. 이에 말씀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다시 말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우리는 스스로를 인정한다.

 

정작 우리의 잘못은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 죄를 죄로 인정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3-24).” 일련의 사태와 수천 년 전의 말씀이 중첩된다. 전혀 예외가 없다. 그러니 이와 같은 일련의 작태는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1).” 우리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잃을 때에 온다.

 

곧 악함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르호보암의 사적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다시금 읽게 된다. 곧 우리가 회개하면,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대하 12:6).” 주의 마음은 금세 용서하신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7).”

 

문제는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정직하게 주 앞에서 행함일 텐데… 이게 참 어렵다. 아주 작은 거짓말 하나가 덧붙여지고 왜곡됨으로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한데 거짓을 하나둘 더하다 보니 아예 이제 그것으로 수레를 끌 정도로 죄악이 덧입혀진다. 그리곤 적반하장으로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호도한다. 마치 자기최면에 걸린 것 같다. 집단 전염성이 강해서 서로가 서로를 두둔하고 둔갑시켜 악을 선이라 한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그러니 누가 뭐라 옳은 지적을 하면 이를 들을 수 있는 귀를 닫았다. 악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이고, 이에 그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바꾸려 하며, 그 만족함은 채워도 다 채울 수 없어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저들은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16).” 결국은 멸망뿐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하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곧 우리는 하나하나의 교회로 자신을 바로 세워 주 앞에 정직한 자로 서는 게 중요하다. 이에 우리로 세마포를 덧입히신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우린 결코 어느 쪽이냐? 하는 세상의 강요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다. 이를 두려워함은 주의 경외함으로 가능하다.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 주의 영광이 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뒤로 하고 죄를 묵인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소하는 일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일련의 사태를 두고 교회마저 갈리는 것이 신앙의 적이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우리의 경건함은 믿음을 따라 행함으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를 분명히 알 때 과연 무억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곧 악의 참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4).”

 

결국 오늘의 이 모든 사달도 사람 앞에 스스로를 높이려는, 자신을 옳다 하는 데서 오는 결국이다. 이에 오늘도 시편은 어김없이 이를 바로 잡아주신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94:1).

 

하나님은 모든 결국을 좌우하신다. 그러므로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3).” 우리가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동시대를 살면서 저들로 인한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은 잘못을 바로 잡으시고 보수하시는 분이시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5:26).”

 

그러니 저들을 두고 뭐라 할 게 없다. 저들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취할 뿐이다. 그 결국은 저들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에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2-4).

 

마치 오늘 시편의 기도는 우리로 오늘을 위한 기도의 서문을 작성하신 것 같다. 하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7-18).” 곧 주가 행하신다. 이에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삼상 24:19).”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덕이 필요하다. 이는 스스로 삼가는 것으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자칫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는 듯하나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 8:11-13).”

 

오히려 우린 저들을 보며 얻는 교훈이 크다. 주를 더욱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도 알게 된다.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7).

 

이것이 저들의 허점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게 하신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9-11).

 

정작 우리의 두려움은 저들이 아니고, 저들로 인한 결과도 아니다. 가령 그 곁에서 같이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덩달아 모른다, 안 들린다, 말하지 않았다 하며 되레 상대를 공격하는 빌미로 삼는 행태이다. 이는 모두 주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의 영광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의 작태이다. 분명히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2-4).

 

우리는 저들을 보며 자신을 두려워하여 주를 더욱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의 결국에 대하여는 주가 행하신다. 다만 우린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자신을 바로 하는 것이다. 하면 결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94:14).

 

이는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귀하심이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하여,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

 

저들이 아무리 높다 해도 ‘하늘 아래 뫼이로다.’ 그래봐야 고작 사람인 것을. 르호보암은 죽었다. 그의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되었다. 악이 악을 부르는 세상에서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 4:17).” 우리는 모두 디모데이고 바울이어야 한다. 한데 교회가 덩달아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갈리고 있으니,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우리로 주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12-14).” 저들과 다를 바 없이 굴어서야!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94:17-19).

 

주 앞에 아뢰고 고함으로 내가 우선 바로 서야 내 곁의, 나의 교회가, 우리에게 맡기신 한 영혼 한 영혼이 주 앞에서 온전하여질 것이다. 고로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도리어 우리로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게 한다. 이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는 다만 말씀만 붙들고,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37:39-40).

 

이와 같이,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94: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