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전봉석 2022. 10. 1. 04:38


유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앞 뒤의 적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부니라
대하 13:14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시 95:10


길이 없다. 인생에 다른 답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길이 없는 광야에 사는 것 같다. 여긴가? 하고 달려가고, 저긴가? 싶어 쫓아보지만 마치 신기루와 같을 뿐. 이에 목마름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이 복되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1:6, 22:17).”

때는 악하여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5-8).” 이 모든 게 시작일 뿐이다.

유다 왕 아비야가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의 군사와 대치하여 전쟁을 치른다. 여로보암 18년째에 아비야는 2대 유다 왕으로 즉위하였다. 아비야의 군사는 40만이었고 여로보암의 군사는 80만이었다. 아비야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다윗의 언약을 근거로 남유다의 전통성과 저들의 금송아지 숭배와 잘못된 종교제도를 비판한다(8-9절). 오늘 본문은 아비야의 3년 통치 가운데 다른 사역은 생략하고 오직 이 전쟁 기사만 다룬다. 이는 이번 전쟁의 의미와 그 승리가 여호와께 있음을 의도적으로 알게 한다. 또한 전쟁에 앞서 아비야의 연설을(4-12절) 중히 다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서로의 군사가 40만과 80만으로 합계120만 명은 다윗이 말년에 인구조사 때 실시한 숫자와 거의 일치한다.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삼하 24:9).” 그만큼 이 전쟁의 규모나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싸움은 예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성도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하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충돌이고 어쩌면 당연한 다툼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곧 단순한 선악간의 양심의 다툼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으로 말씀은 이를 독려하신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반대로 우리 안에 아무런 갈등도 없다면 또는 그 싸움이 사력을 다하는 게 아니라면 이는 오히려 문제가 있다. 내 안에 갈등이 있고 번민이 있는 것은 인격적인 영혼의 존재로서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아무런 의심도 회의도 갈등도 없는 존재로 지으셨다면 이는 비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열린 상태로 우리 앞에 세상을 펼쳐놓으셨다. 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나는 오늘 시편에서도 ‘근심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였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시 95:10).

근심의 부정적인 측면을 걷어내면 그 안에 사랑이 드러난다.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굳이 근심할 필요도 없다. 이때에 성경은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삼하 10:12).” 곧 앞서는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시고 이에 ‘담대하라.’ 하신다. 이는 우리의 허튼 근심이 우리를 잠식하여,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137:1, 4).

이는 어쩌면 광야와 같은 인생을 지나는 동안 당연한 일이겠으나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그 길은 의외로 단순하고 쉽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한데 이게 그처럼 어려운 까닭은 자꾸 다른 데서 삽질하기 때문이다. 이를 성경은 악이라 규정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결국 그 길은 단순할 뿐 아니라, 큰 대로라.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8-10).” 곧 우리에게 있어 오직 한 길,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다른 길은 없다. 여러 길이라 하여 달려가나 그 모든 것은 신가루일 뿐 종당에는 후회와 회환뿐이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영국의 희극배우 버나드쇼의 묘비명과 같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는 허무뿐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오직 한 길, 지금은 온통 메뚜기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어치우는 것 같으나,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욜 2:25-26).” 주가 다 갚아주실 것이다.

언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뜨겁고 기뻐할 것이다. 우리 구원의 목적은 오직 하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에 우리의 승리는 주의 것으로 주가 이루셨다.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로 담대하며 모든 위기 앞에서 승리하게 한다. 아비야는 이를 근거로 오늘도 외친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지금 저의 처지는 군사력으로도 열세고, 다수의 지파들이 북이스라엘에 속해 있다. 그런 불가능한 가운데서 서서 우리는 외치기를,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3-4).

나의 궁색한 표현으로 이를 이해하면, 다 필요 없다. 승리가 희박한 전쟁이라 해도 두렵지 않다. 오직 내가 바라는 한 가지는 내 평생에 주의 집에서 주를 바라며 주를 찬송하는 그것이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나에겐 말씀이 있고 주의 언약이 있다.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도 나로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니 우리의 믿음이란, 다 이긴 싸움을 두고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고로 신앙은 철저하게 나를 부인하는 데 있다. 내 안에 이는 여러 갈래 길, 여기저기 둘러보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게 되는 상황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 나는 이제 언제부턴가 이 말씀이 있어 참 좋다. 더는 내가 사는 게 아니어서, 내가 내 것이 아니어서 너무 좋다.

그래서였을까? 바울도 이를 기뻐하며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위하여 나는 기꺼이 이 이른 시간에 교회로 올라온다. 오늘은 새벽 두 시, 나는 이제 눈을 뜨면 가만히 씻고 교회로 온다. 이런저런 생활의 변화로 다들 나의 불편을 염려하는데, 도리어 나는 주의 전에서 아무도 없는 시간에 마음껏 말씀으로 나를 채우시는 데 감사한다. 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부디 나의 남은 모든 생이 그러하기를. 앞선 사도들의 고백이 모두 나의 것이 되었으면. 다른 무엇을 귀히 여기고 선히 붙든다 해도 오직 길은 하나다. 그 외의 모든 길은 허사와 허무뿐이다. 누가 기도를 부탁하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에 해당하는 말씀 구절과 해주어야 할 말을 주께 구한다. 어제는 누가 나 없는 동안에 다녀갔던 모양이다. 외부에서 출입이 어려운 까닭에 그럼 전화를 하면 될 일인데, 의외로 낯가림이 심해서요! 하는 말 속에서 나는 저의 본심을 두고 주께 여쭈었다. 언제부턴가 ‘어떤 문제’로 나를 찾곤 하는데, 이는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에서일 거였다. 다음 주 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니, 겉으로는 서둘지 않으면서도 무슨 일일까 하여 주의 뜻을 구하였다. 이것이 나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는 일이 될까?’

우리의 고난이 잃었던 길을 찾게 한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하심을 근거로 신앙의 확신을 얻는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대하 13:12).” 이는 가나안 정복에 앞서 여호수아를 격려하신 말씀과도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하면 오직 이 한 길은 말씀으로만 알 수 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늘 생각하는 게, 내가 무엇이라고 누굴 위로 하고 격려하겠나? 사는 모양으로 치면 궁색하고 내 앞가림도 어려운 처지인데,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나도 내가 아는 내가 전부가 아니었다. 곧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그러니 때론 내가 아닌 나로 인하여 놀란다. 왜 나 같은 자를 이처럼 사랑하시는가? 할 때에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곧 나도 왜 주가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그런 주님을 나 또한 어찌 사랑하는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한데 성경은 그 이유가 명징하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14).” 곧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런 확신은 성경 전체에 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이를 위하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왜 내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셨는지, 나는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95:1-2).

이와 같은 초청에 이제는 감격하며 아멘, 할 수 있지 않은가? 앞서 나의 주변을 함께 살아갔던 이들이 외쳐 부르기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예전에는 몰랐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마 22:9).” 그때에는 그와 같은 초청에 면박을 주고 갖은 핑계를 대며 돌아서기 일쑤였는데, 이를 회개하며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오늘의 이 모든 게 감사할 따름이다. 하면 나 같이 보잘것없는 자를 이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저는 누구인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3-5).

저는 모든 것의 주인으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6-8).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나를 송구하게 하신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나는 부끄럽고 죄송하기만 한데,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이는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그러니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14).” 주 앞에 엎드려 감사할 따름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