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대하 32:8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4:7-8
앗수르 산헤립의 1차 침공(B. C. 701년)에 이어 2차 침공(B. C. 699년)이 일어난다. 이는 열왕기하 18:13-16절에 기록되어있다. 오늘 본문은 17절 이후의 2차 침공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첫 구절부터 이상하다. 히스기야가 신앙적으로 개혁을 완수한 후에 앗수르의 침공이 따른 것이다. 이는 마치 신앙에 있어 공식 같다. 주의 은혜를 따라 사탄의 공격도 이어진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대하 32:1).”
나름 결심하고 신앙 안에서 바로 살려할 때 꼭 어떤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시작과 동시에 돌아서기도 했었다. 누가 마음잡고 성경공부를 하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어떤 일로 미루게 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럼에도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뢰하여 남유다 군사를 격려한다(6-8). 예루살렘 밖 샘들을 막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한다(2-5). 산헤립이 항복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모욕한다(9-16). 편지를 써 항복을 유도하기도 한다(17-19). 그럼 그럴수록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와 힘을 합쳐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에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산헤립을 흩으시고 저는 돌아가서 자신의 신전에서 자식들에 의해 시해된다. 이와 같은 승리로 히스기야는 주변국들로 존경을 받는다(22-23).
무엇보다 다소 의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1절 첫 구절의 표현이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하나님의 상급이 아니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하는 내용이다. 마침 어제 동생이 울적한 심정으로 아버지와 함께 인천으로 왔다. 같이 물가에 앉아 있다가 매운탕을 대접하였다. 기껏 15년의 필리핀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아이의 어처구니없는 고소 건으로 검사를 만나고 나온 다음 날이었다. 검사나 조사관의 무성의한 태도와 여러 명의 탄원서와 진정서는 훑어보지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저들의 고압적인 자세에 동생은 화가 나고 속상하더란 말을 했다. 가뜩이나 ‘검찰 공화국’에 살게 되면서 저들의 권한과 권세를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된 일’에 대해서는 그 보상이 이 땅에서 이뤄질 게 아니다. 그렇든지 아니든지 우리의 산성은 하나님이시다. 오늘 말씀에서 붙들게 되는 것은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8).” 이를 바울의 설교에서 다시 들으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동생의 이런저런 감회에 나는 가만히 나의 지나온 시간이 떠올랐다. 결국 두 손 들도 투항하였을 때 모든 게 다 잘 될 줄 알았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멋대로 굴다가 결국은 주 앞에 돌아섰을 때 신대원을 한 번 떨어지고 그 해 겨울 다시 흔들리기도 했다. 틈만 나면 ‘역시 내 길이 아니야!’ 하는 셈법이었다. 그런데 성령의 강권하심이란 불가항력적이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다음부터 새벽예배를 나갔다. 그저 울다 오는 게 전부였지만… 그리고 죽기 살기로 가족들과 저녁이면 가정예배를 드렸다. 중2, 고2였던 아이들 학원 시간 뒤에 드려지는 예배는 때로 자정을 넘길 때도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에서 신대원에 갔을 때, 이제 됐다 싶었던 게 순식간에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파산에 공황에 급 불안장애가 한 학기 만에 몰려왔다. 그럴 때면 ‘이래도 계속 할래?’ 하고 누가 묻는 것 같았다.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라’ 하는 마음이 그때 그것이었을까? 울면서 학교로 갔고, 안정제를 너무 먹어서 늘 피로감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학기를 마쳤고, 그 나이에 울면서도 6학기를 간신히 마쳤다. 자, 이제 됐다! 싶을 때 목사고시에서 두 번 떨어졌다. 한 번은 논술, 한 번은 인성검사…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것일까?’ 하는 반감이 거셌지만 더는 맞설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그럴 때 내 곁에 일어났던 기이하고 신비로운 역사에 대해서는 일일이 나열할 수조차 없이 수두룩하다. 6학기 등록금 전액을 내 돈 내고 준비한 게 없었다. 신대원을 다니면서 설교나 세미나 발표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졸업을 한 사람은 아마 나뿐일 것이다. 목사고시 세 번째 면접 때 아무래도 어려운지, 떨어지면 또 올 거냐고 어느 원로 목사는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계속 오면 된다고 했다.
결국 목사안수를 받고, 자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다. 이제 하나님이 교회를 이루시고 뭔가 술술 잘 풀릴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 경험은 놀랍기만 하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증발한 듯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글방에서 같이 예배드리며 학습과 세례를 주고 처음으로 세운 청년 성도가 일곱 명이었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아이들 없이 주일예배를 드린 적이 없었다. 글방도 현상유지는 하듯 스무 명 남짓 아이들이 다녔었다. 한데 갑자기 다 사라진 것이다!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나오지 못했고, 글방으로 수업오던 아이들은 서로 짠 것처럼 다들 그만두었다. 한 엄마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선생님의 종교가 기독교인인 것은 상관없지만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종교인이란 소린데, 애 아빠가 이를 꺼려한다고 하였다.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두 해를 혼자 골방에 처박히듯 군포에 있는 글방으로 날마다 헛걸음을 한 것 같다.
어제 동생의 이런저런 말에 마음이 새삼스러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로 우릴 당혹스럽게 한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난 내 의지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벽예배를 나가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빈 글방으로 날마다 나오면서도 그리하게 하시는 이의 어떤 강권하심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동생에게 굳이 그때 일을 말하지는 않았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시 37:39).
이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리 되는 것이지 그리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르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때 만일 그 일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의 묵상도, 이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는 생활 태도도 없었을 것이다. 다소 부끄러운 소리 같은데 나는 때로 할 게 없어서 설교원고를 쓴다. 심심하고 무료해서 성경을 본다. 더는 만날 친구도, 어디 나다닐 만남도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동생 일로 가슴에 큰 바위가 올려진 것 같다. 숨을 쉬기 어려워 헉헉거리기도 한다. 내색은 안 했지만 속상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현 정권이니 검사들을 향해 쌍욕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탄은 이를 노린다. 그래도 할래? 이 길을 계속 갈래? 하고 속삭인다. 히스기야는 어찌 했나?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2).” 저는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였다. 때로 사탄은 이런 상황을 즐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나야말로 그러했다. 될 대로 되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 하는 심정으로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막다른 길이어서 안심하기도 했다. 평생 목사고시만 치다 죽는다 해도 좋고, 한 명도 없는 교회를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해도 좋다. 아니, 다른 수가 내겐 없었다. 이리 하심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나는 의심할 수 없었다. 의심한들 돌아설 길도 없었다. 어찌됐든…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6-7).
더러 이상한 힘은 내가 애쓰지 않을 때 생긴다. 믿고 맡긴다는 것도 의지에 의한 게 아니다. 표현이 다소 무리가 있지만 차라리 포기할 때 길이 저절로 난다. 말도 안 되는 상황, 지팡이로 홍해를 치라니!? 범람한 요단강으로 걸어 들어가라니!? 더는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않는다. 나는 이런 말조차 동생에게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듣기만 했다. 아버지는 마치 남 얘기하듯이 겪어야 할 일이면 겪어야지…. 하고 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서로가 다 아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분명 더 높은 도약을 위한 발판이다. 아니라 해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 오늘 시편의 감사로 이를 구원의 역사를 회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114:1-2).
다시 한 번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보다 가치 있는 삶은 없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주가 이루신다. 주가 행하신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이런저런 어려움이 왜 따르지 않겠나? 시므이처럼 계속 쫓아오며 돌을 던지고 흙을 차고 조롱하듯 우리 안에 이는 갈등과 염려가 왜 없겠나? 조사관이나 검사의 태도를 보면서 저들을 어디에 신고하고 싶을 정도였다는 말에 덩달아 화가 났다. 국민을 위하고 인권이 어쩌고 하는 소린 모두가 허울뿐이다. 일련의 감사장에서나 국정조사에 보면 그야말로 기고만장하다. 그러든지 어쩌든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곧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도 그리 개의치 않는 게 좋다. 저들은 본래 할 줄 아는 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뿐이다.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3-4).
그리고 이를 한 번 더 강조하면서,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5-6).
지나온 날을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떠하셨는가를 묵상하면 그 은혜는 명확해진다. 저녁에 장모와 같이 둘러앉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는 찬송을 부르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과연 그러하였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0).
내가 내 의지로 한 일이고, 여기까지 온 것이면 이와 같은 말씀이 와 닿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어려움도 같이 따라오게 하신다. 이로써 우릴 세상은 감당하지 못한다.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즉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32:6).
이를 매순간 경험하고 체험하며 살면서도 이처럼 또 어려움 앞에서는 숨을 못 쉬겠고, 불안이 먼저 엄습할 때면… 그래서도 주를 바란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됐다, 이것으로 됐다. 동생은 호기롭게 정 그러면 감옥에 가면 되고, 청소년 사역자로 이 정도 훈장은 영광이지 뭐! 하며 나를 위로하였다. 말이 그렇지, 필리핀에 남은 가족과 사모는 시름에 잠겨 마음이 어려운가? 사모는 안정제를 먹게 되었고, 둘째 아들은 말 수가 줄었다. 감당하고 가는 길이 성령이 아니시면 감당이 안 된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7-8).
주의 권능과 놀라우신 역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한다. 그리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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