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대하 31:20-21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113:3
13대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저는 앞서 부왕의 때에 쇠락한 신앙의 기틀을 다시 마련하는 중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조직을 정비하고, 찬양단과 제사를 온전히 세운다. 문지기를 비롯하여 모든 직분을 맡은 자의 역할을 바로 한다. 십일조를 복원하여 바로 하고, 유월절을 통해 백성들의 무너진 신앙을 온전히 한다. 그와 같은 성물을 분배할 수 있는 담당자와 규정을 세우고 그러한 행함으로 하나님이 저의 일을 형통하게 하신다.
우리가 주의 길을 간다는 일은 그 모든 필요를 주가 채우심을 경험하는 일이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6).” 그럴 때 주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기란 여러 어려움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할 때에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8).” 그러하다 해도 세상은 우릴 걸려 넘어뜨리려 혈안이 돼 있는 것 같다. 주만 바라며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일이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새벽에 일찍 올라와 묵상을 하고 망설이다 저수지로 갔다. 낚싯대를 펴고 앉아 울적한 마음으로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바람은 가닥을 잡을 수 없어 물결이 이리저리 요동을 쳤다. 필리핀 사역을 마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고초가 따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동생은 검찰에 도착하여 가족방에 기도를 부탁하는 글을 올렸다. 좋은 신호이려니 했던 것이 아무래도 재판까지 가야 할 모양이었다. 아이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검찰은 법을 운운하며 원칙대로 일을 감행하려 했고 동생은 덤덤하면서도 지친 목소리가 역력했다. 바람이 차고 두서없었다. 점심께 지나 교회로 돌아왔다. 공연히 마음은 바람을 따라 요동치는 물결처럼 오락가락하였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시인은 앞서 부러움과 시기로 마음이 흔들렸다. 악인들은 너무도 잘 되고 잘만 사는 것 같아서,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9).
그러니 아무리 법이 어떻다 해도 동생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바른 사역자로, 교사로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이 단지 돈만 받고 애를 맡아두는 인간전당포는 아니지 않겠나? 아이들도 그 행실로 알 수 있어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그러므로 바른 교육과 훈계는 필요하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그런데 요즘은 애가 우상이다. 물론 아이를 향한 어른들의 흉악함이 여러 모양이라 이를 위한 장치이기는 하겠지만, 나 같아도 야단치고 필요하면 때린다. 아니면 돌려보내던가? 한데 그 어미가 그걸 다 알면서도 어찌 저러는가, 싶을 정도로 망상환자 같으니… 뭐라 한들 이쪽은 또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일 테고. 그러니 덩달아 서로의 치부를 다 드러내며 그 아이와 아이엄마의 참상을 말해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난감할 뿐인데….
하루 종일 조사가 이뤄지고 오후께나 되어 끝이 났다. 동생과 2차 조사가 끝나고 15분 쉴 때 잠깐 통화를 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결국은 갈 데까지 가야 할 모양이라는데 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우리의 도움과 바람은 주께만 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6:5).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종종 내가 맡은 일, 지금 걸어가는 이 길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에게 무엇으로 조언을 하거나 저의 어려움을 들을 때도 그렇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고 현실을 딛고 가는 데는 여러 모양의 옳고 그름이 따른다. 그러므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51:6).
무엇보다 우리가 주 앞에 경계하고 또 주의해야 할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자기판단과 기준이 걸림이 될 수 있다. 내 생각, 내 판단을 내려놓는 일. 이게 실은 매우 어렵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또한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하는 어떤 서운함 같은 게 불쑥 마음을 흔드는 것이어서, 어쩌면 오후 내내 우울했던 것이 이런저런 사건으로가 아니라 이 일의 되어짐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서이다. 마음 같아서야 그 억울함이나 분함을 가지고 제대로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나? 나는 아직도 수양과 인격이 모자라서 그런가, 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한테 자꾸 서러웠던가보다.
이처럼 도무지 주의 길을 알 수 없을 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가시는 것일까 싶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 26:5).” 앞서 웃시야의 통치가 바른 길로 갈 수 있었던 게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그러하였다. 곧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1-2).
마음은 여러모로 힘들겠으나 동생은 의외로 덤덤하였고 그래서 법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기꺼이 훈장으로 여기겠다고 말하였다. 말이 좋아 청소년 사역이지, 나는 솔직히 애들이 징글징글하다. 거의 평생을 아이들을 상대하며 살았던 것이라 그런가, 어른보다 영악하고 무모하다. 저들의 막무가내는 감당이 안 된다. 그때는 원칙대로 했다. 애가 왜 그러는지,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어서인지, 나는 그것을 살필 겨를도 마음도 없었다. 일체 엄마들에게 전가하였고 ‘안 하는 애는 안 하는 것’으로 원칙을 삼았다.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러다 내가 주 앞에 고꾸라지면서 어른보다 더 많은 상처를 안고 사는 시절이었다는 것을… 불현듯 나의 유년기 때와 중첩되면서 그때부터는 덩달아 어린아이가 되었던 것 같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하느라 졸지에 아이엄마의 공격 대상이 되면서까지도 나는 아이 편을 들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그 영악함이 순전함을 배제한 것임을 알면서부터 더는 용기가 없어졌다. 가령 이곳으로 와서 크게 두 아이에게 혼쭐이 난 것이다. 하나는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을 때이다. 나는 아이의 이런저런 아픈 상황에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며 그것을 글로 쓸 수 있게 하였다. 감사하게도 아이의 글은 빠른 시일에 여러 곳에서 인정을 받았다. 생각보다 큰 금액의 상금도 몇 차례 있었다. 처음부터였을까? 후에 아이의 그 모든 사실이 실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결국 아이를 어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또 한 경우는 흔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같이 좋게 잘 지낼 때는 속엣 얘길 마음껏 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자신이 한 말에 덫이 걸렸다. 무엇으로 감정이 상하면서 졸지에 나를 성추행범처럼 대하거나 사기꾼으로 몰아세우시고 하였다. 맥락도 앞뒤도 없는 억지인데, 누가 들으면 그럴 법도 하다. 아이의 말은 자기가 한 말을 누구에게 한 거 아니냐는 것인데, 그게 어찌 그리 모함으로 이어지는지. 아이가 그리 몰아세우는 데서 나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이를 멀리하고 더는 새로운 아이를 꺼려하게 되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며 동생이 겪는 문제에서, 나는 이런저런 일은 차치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느라 마음이 어렵다. 고질적인 우울감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다. 말을 못하겠고, 나의 고질적인 침묵으로 아내는 속이 터질 모양이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한들… 이는 단지 관점의 차이가 아니다. 서로 바라는 소원의 차이도 아니다.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때로 홀로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얍복강 나루에 야곱은 혼자 남겨져야 했다. 돌단을 베고 잔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였다. 우리는 저마다 이와 같은 고독에 버려진다. 이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와 같은 기준을 잃으면 바늘 없는 나침반을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일 같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분간이 안 된다. 그럴 때 오늘 시편은 우리의 중심을 바로 하고 나침반 위에 바늘을 올려두는 것 같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113:3).
오늘 시편은 마치 우리의 오늘은 아랑곳도 않고 주를 찬양하라고만 독려하는 것 같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1).
할렐루야는 여호와의 영광과 그 사역을 두고 주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는 해가 뜨든지 지든지, 우리의 형평과 사정과는 상관없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때론 말씀이 막무가내다. 그럴 때마다 빛나는 기도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더러 이러는 우리 모습이 스스로도 무모할 뿐인데, 남들 눈에야 오죽할까? 그러니 온갖 구설이 난무하고 말이 보태질 때마다 물 먹은 솜이불처럼 하루하루가 무겁기만 한데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와 같은 찬송이 정말 나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까? 머리로는 그러할 수 있을 것 같고 말로는 그리 될 거라 하겠으나… 어제만 해도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저수지에 가 앉았다. 시무룩하니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노라면 모든 상념이 사라질 줄 알았다. 오히려 생각은 멋대로 들락거렸고 쓸려 다니는 물결 같이 그 길을 알 수 없었다. 주님, 하고 되뇌다 눈물이 돌기도 하고 어느새 허밍으로 찬송을 하고 있는 내가 낯설기도 하였다. 이 일이 어찌 가능할까 했더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우린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앞에 늘 세워진다. 지금은 찬양을 드릴 형편도 마음도 아니다. 그럼에도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그러므로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1).” 때론 이런저런 말을 듣기만 하지 속엣 얘길 할 데가 없어 외로움에 단내가 난다. 나는 무엇으로 주를 바랄까? 더러 나의 모습은 가족들에게조차 변덕스러울 뿐이라, 나도 나를 알 길이 없이 어느 것이 나인지 분간이 안 간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2).
이는 우리의 숙명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곧 우리의 목적은 찬송이다. 할렐루야로 주를 찬양하게 하실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오늘의 이 모든 상황을 조성하셨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3-14).” 곧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4).
그 하나님은 순전히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심인데,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5-6).
돌아보면 모든 게 은혜이고 왜 나 같은 자를 이처럼 사랑하시는가 알 길이 없어 송구스러운데, 오늘은 또 여전히 회의와 갈등으로 주께 서럽고 화가 나는 것인지…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욥 30:19).” 때론 알 수 없는 길을 간다. 무모하고 답답하다. 애면글면 속 끓일 것 없이 의연함을 주시면 좋으련만, 일천의 공격자보다 내 안의 반감이 더 고통스럽고 두려울 때가 있다. 할 때에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5:11).”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 주님도 우리로 ‘애통하라’ 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할 수 있는 자로 그 심정으로 주 앞에 서는 일,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107:41-42).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그리하여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113:7-9).
이를 위해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6).
이 놀라운 은혜 앞에 ‘할렐루야’로 화답하는 것이 복이었다. 나의 남은 생이 이제 그러할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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