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들을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를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이르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
대하 30:18-20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시 112:4
남유다 13대 왕 히스기야의 통치와 그 신앙의 기도가 마음을 붙든다. 저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그 중심을 정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1-12).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는데 있어 백성들은 여전히 우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신을 청결하게 하지 않았다(13-17). 이에 히스기야는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18-20). 모인 무리들이 7일간 무교절을 지키며 찬양한다(21-22). 저들은 감사로 유월을 한 차례 더 지킨다(23-24). 이에 참석한 백성들의 기쁨과 제사장들의 축복기도가 이어진다(25-27). 저들은 이 결과로 자신들의 거주지에 있는 각양의 우상과 제단을 헐고 자발적으로 신앙을 혁신한다. “이 모든 일이 끝나매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31:1).”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한 사람의 각성과 그에 따른 실천으로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보면 자신을 부끄러워할 때 죄에서도 돌이킬 수 있다. “둘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양을 잡으니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부끄러워하여 성결하게 하고 번제물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에 이르러(15).” 지혜자도 이르길,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9).” 죄에 대해 심드렁할 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겔 36:31-32).”
스스로 가증한 것을 밉게 보고, 그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한탄할 때 회개가 일어나고 주의 자비가 임하신다. 베드로는 그러할 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설교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7-38).”
이러할 수 있는 게 은혜이고 값진 선물이었다. 자신을 성결케 하려하는 일은 스스로의 허물과 죄악을 인정하면서이다. 그때에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회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신들을 성결하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레위 사람들이 모든 부정한 사람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그들로 여호와 앞에서 성결하게 하였으나(17).” 이와 같은 변화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내가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며 살 때는 몰랐는데, 주의 은혜가 임하시자 그 모든 게 어쩜 그리도 부끄러울 따름인지. 또한 나 같은 자를 왜 귀히 여기시는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하여 내 스스로가 주를 바라고 더 청결하게 되기를 사모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를 바울의 설교에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한데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겸하여 섬겼던가? 아예 주를 모른다 하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온전히 주를 바라려는 마음도 가소롭기만 하여서, 믿는 일에 있어서도 내 주장이나 내 뜻이 우선하였던 것이다. 그럴 때 드는 마음이 먼저는 남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었다. 어릴 때 모처럼 철야예배를 갔을 때였나? 누가 좋고 누가 딴 짓을 하고 있는 게 눈에 거슬렸다. 다음 날 아버지께 그런 일을 말하며 누가 졸더라, 하며 비아냥거리자 아버지는 너도 그냥 졸지 그랬니? 하고 에둘러 하신 말이 기억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그러려면 우선 남을 비판하려는 마음에서 놓여나야 했다. 나는 늘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조금 뭘 하면 안 하는 누가 거슬려 비난하기 일쑤고, 내가 안 하는 것을 두고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뭐라 하면 되레 성질을 부리곤 했다. 예수님에 이런 내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요즘은 이와 같은 현상이 다반사라 경우가 바뀌면 서로의 입장도 달라져서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결국 이 모든 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러할 때, 즉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린 서로의 중보가 필요하다. 권면과 권유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강하게 붙든 부분도 히스기야의 기도였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들을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를 어긴지라.” 이에 히스기야는 왕권을 동원하여 억지로 저들을 다스리려 하기보다, “히스기야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이르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하고 중보한다(18). 그리고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19).”
이는 오늘도 우릴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우리로 존귀한 자로 함께 분깃을 얻게 하려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는 오늘 히스기야의 모습가 중첩되면서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11).”
곧 우리를 위해 질고를 겪고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기도가 여전하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10).”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넘어선다. 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통로 곧 슬픔 뒤에 기쁨이 오는 것과 슬픔 중에 기쁨이 오는 것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먼저 슬픔 곧 고난이 있으면 반드시 기쁨 곧 위로가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으로,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하여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그러하였다. 돌아보면 나의 지난날들이 그러하였다는 것으로 주의 은혜가 그때마다 어떠하셨는지를 알게 한다. 그에 따른 슬픔 뒤의 기쁨에 대하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이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도 드러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이는 마치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이와 같이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1-22).”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 앞에 우린 주를 더욱 확신한다.
필리핀 동생이 오늘 검찰에 들어가 검사와 만난다. 대체로 서면으로 보고 저들이 판결하여 기소여부를 결정한다 하는데, 통보하여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면, 이를 좋은 뜻을 이해해야 할지 어떨지… 나는 근심하는 자 같아 동생과 통화를 하면 저는 오히려 태평하여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곧 주를 믿고 바란다는 일, 이는 그 결과 또한 어떠하든지 주의 선하심과 그의 영광을 위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16).” 마음을 같이 하여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 곧 서로가 기도를 부탁하고 이런저런 사정을 주 앞에서와 같이 나누고 기도할 수 있는 성도의 교제가 아름답다.
그에 따른 훈련의 하나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우리로 어디에, 누구에게 더 마음을 둬야 하는지를 덧붙이면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그래서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3-4).” 이는 역설이 아니다. 삶의 지혜란 이 땅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데 중심을 기울이기보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두고 서로가 이를 살피며, 저를 위하는 마음과 기도가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아는 마치 전우주적인 공식 같다. 단언하건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1-2).” 곧 우리의 결국은 기쁨이고 환호와 영광의 나라다.
이를 바로 알 때 슬픔 가운데서도 기뻐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그렇다면 우린 어찌 다른가? 우리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하시는 말씀은 이로써 분별되어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 알리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또한 알게 한다. 이는 절대 저절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우리가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이를 때론 이해할 수 없고 누구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해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 3).” 즉 바울은 자신이 고통 중에 버림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 영혼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와 같은 고통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다.
저가 그러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경지의 신앙이어서가 아니라,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10:1).” 가만히 살피면 저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바라시고 좋아하신다는 것을, 이에 그의 안에 있는 소망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그러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 오히려 이를 자처하여 세계 곳곳 선교사로 나가시는 이들도 그러해서다. 다시 말하지만 저들은 하나님을 알았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한 번 알아버리면 뭘 해도 저를 신뢰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의 선친들은 그 믿음을 지켰다. 그래서도 우리는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그렇게 해서 우리도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왜 오늘 히스기야는 그 백성들을 설득하고 참고 기다리며, 격려하고 독려하며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인지… 이를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우리의 이것으로 주의 영광이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고맙고 감사한 이를 두고 기도하기는 쉬우나 불편하고 마음에 앙금이 있는 이를 두고 주께 아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동생은 늘 말끝에 아이와 아이엄마 걱정을 하며 그 영혼의 황폐함을 두고 길게 한숨짓고는 한다.
우리가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4-5).”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섣불리 나의 마음을 내세우며 앙갚음을 모색할 수가 없다. 하여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편이 되시는 의로우신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까…….
오늘 시편이 이를 실감나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순종은 필연적이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2:1).
주를 경외한다는 것과 그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일은 하나다. 어느 게 먼저가 없다. 이를 좀 더 강경하게 두면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자, 그럼 이제 어쩔 것인가? 성경은 이에 따른 여러 출처를 밝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주가 갚으신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자녀들을 위한 복의 원천이다. 곧 복 있는 자의 필연적인 모습으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1:2-3).
저는 누구인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
궁극적으로 우린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데,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133:3).
이에 우리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는 갑자기 그러한 게 아니어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 4).” 이에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2-3).
이 땅에서의 복락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슬픔으로든 기쁨으로든 우린 언제든지 위로를 얻는다. 하여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말씀이 그 가정에 살아 있어야 한다. 나의 일상을 주도하게 하셔야 한다. 여러 분주한 일들로 쫓기듯 사는 삶이라 해도,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4).
하나님이 그러하신 분이라, 우리로도 그러하기를 바라시고 그리 이루신다. 이에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믿는 자로 겪는 어려움에 대하여는 그것이 모두 가치 있다. 값어치 없는 고난은 없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그러므로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5-7).
곧 우리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스스로 연마하듯 주 앞에서 훈련을 쌓는 과정도 그러해서다. 이를 위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주께서 날 위해 어찌 행하셨는지를 알면,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8).
이 모든 일의 결국은 주의 것이고, 이를 선으로 바꾸시며 주의 영광으로 삼으시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히스기야도 이를 알았던 것이다. 주께 아뢰고 대신하여 기도한다. 우리 또한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주가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마음은 늘 앞서 요동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러므로 주께 더욱 아뢰는 일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곧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9-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0) | 2022.10.20 |
---|---|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0) | 2022.10.19 |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0) | 2022.10.17 |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0) | 2022.10.17 |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0) | 2022.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