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전봉석 2022. 10. 27. 04:4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에스라 3:12-13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시 119:142


예루살렘이 재건되면서 이를 보았던 나이든 자들이 운다. 이를 모르는 세대는 즐거워한다. 즐거워 내는 함성과 감격의 울음소리는 하나로 어우러진다. 우린 주 앞에 예배하는 것으로 그 감격을 맛본다. 우상숭배에 마음이 가 있을 때는 몰랐다. 본심이 없는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도 무거우실 때가 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4).” 그러나 포로 생활을 겪고 귀환 후 드려지는 저들의 자발적인 절기와 헌신은 사모하는 마음으로였다. 이와 같은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1-3).”

이러한 말씀에서 오늘 시편의 한 구절이 눈에 띈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 119:143).

때론 나의 본성으로도 사람의 됨됨이가 참 죄에 물든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 같다. 이상하게 어려움이나 고난을 겪고서야 비로소 소중한 것을 안다. 하나 그러한 것을 통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주가 찾으신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24:5-6).

순순히 그 말씀과 저를 사모함이란 죄로 물든 속성으로는 불가능한 모양이다. 결국 우리가 이를 곳은 새 예루살렘이 아닐까?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4-15).” 우리의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로 주가 기뻐하신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결국 우린 욥의 표현처럼 빈 몸으로 왔다 빈 몸으로 갈 것이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이를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곧 하나님이 이루시는 모든 일에 우리는 언젠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이를 안다는 것은 이를 사모하고 준비한다는 소리도 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아주 가끔 거울 속의 늙은 내 모습을 보면 기이하고 낯설다. 상대적으로 요즘 곁의 아이들을 보면 너무 확연하게 나뉘는 것 같다. 단순히 아주 공부에 전념하는 아이가 있고, 공부와는 거리를 두고 일찌감치 자신의 꿈을 좇는 아이도 있다. 곧잘 하겠다 싶었던 아이 몇이 연기학원을 다니겠다는 둥 헤어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누구도 어떤 말이나 꾸지람에도 설득당하거나 권면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그럼 졸지에 적대감을 드러낸다. 누가 아이의 어떤 마음을 돌이켜 달라 부탁하는데…. 어릴 적 믿음 안에서 약속의 소망을 붙들지 않으면 결국은 돌아서 광야 40년의 길을 헤매야 하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감하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우리로 강하고 담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 24:10).” 살면서 어떤 어려움 앞에 낙담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를 딛고 번쩍 일어서는 사람이 있고 이에 눌러앉아 속수무책인 자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낙담, 환난이 우리로 소망의 길을 보게 한다. 마치 안개가 걷히면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길과 같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자주 되뇌고 묵상하는 구절이다. 특히 마음이 어려울 때 이 어려움이 나로 소망을 이루는 줄을 생각한다. 하여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마다 마음의 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내가 가정예배 후 아들에게 다녀왔다. 공부시작하고 그러더니 요 며칠 치질로 고생인 모양이다. 그런 걸 변덕스러워서 의자를 자주 바꾼다고 하였던 소리가 쑥, 들어갔다. 나는 어렴풋이 잠결에 듣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약사 아이’는 무슨 난치병까지는 아니지만 신장에 문제가 있나, 간이 된 음식을 먹으면 얼굴이 붓고 빨갛게 홍조가 된다. 최대한 식이조절을 한다고 하는데, 뒤늦게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일하면서 자부심을 느낄까 했던 것이…. 또 누구는 평생에 일궈 지상에 방 한 칸을 자신의 명의로 가졌는데 이를 감당하기가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이런저런 일들을 접하고 있으면 저들의 기도부탁이 때론 눈물겹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50:22).

종종 누구를 권면할 때 어떤 어려움을 듣다 이를 복이라 단정한다. 그러한 후환과 환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다. 저마다는 살 궁리와 다른 방도를 구한다. 그러느라 하나님을 더욱 외면하지만…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내 책상 앞에 놓인 다이어리 판에는 저마다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주 금요일에는 누가 수술을 한다. 누군 직장에서의 괴롭힘을 호소하였다. 장모는 병원에 가고, ‘아픈 아이’는 어디 체육대회에 간다. 누군 여행을 다녀오고, 누구는 아들이 출국을 했다. 나는 어수선한 달력을 보면서 오늘은 누구 생각을 하며 주께 아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찾음과 구함을 우리 주님은 기뻐하신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심을 즐거워하신다. 가끔은 왜 나 같은 자의 이런저런 갈구와 끝도 없는 바람을 마다하지 않을까? 하고 의아할 때도 있다. 그러다 어제 잠결에 들은 아들의 고충을 안쓰워하다, 저를 위해 뭘 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놀란다. 이처럼 신경이 쓰이듯 사랑이란 마음이 먼저 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주가 바라시는 한 가지, 그 사랑의 마음은 우리가 누군가를 마음으로 마주할 때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나 같은 자도 해줄 수 있으면 다들 이런저런 일을 해줄 텐데…. 다른 무엇으로는 구원이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래서도 시편의 기자는 고백하였구나!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이것이 오늘의 유익이다. 그러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리하여 역경 가운데서 말씀의 순전함을 깨닫는다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5).

고난이 막심하고(107), 생명이 항상 위기 앞에 놓이고(109), 악인의 올무가 사방에 있으니(110)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어제도 묵상하며 든 생각처럼 말씀만이 우리로 옳은 길을 가게 하심을 새삼 다시 되새긴다. 그러므로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1).

시인의 외침이 간곡하게 들린다. 지혜자의 당부처럼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잠 1:15).” 세상이 온통 어지럽다. 주님도 이를 다 아시고,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렘 14:10-11).” 정작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바로 그 순간이 왔을 때 부를 수 없고, 부를 줄 모르는 주의 이름이다. 이는 거듭난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감각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19:103).

곧,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97:10).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이를 누구에게 일러 알게 한다는 일은, 결국 환난과 역경뿐인가?! 결국 당해야 기도를 부탁하며 저들의 근심을 주 앞에 토한다. 어제도 누구를 생각하다 다들 자기문제에 함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상대는 어떤지? 당신은 어떠신가? 하고 묻는 자가 없다. 한참을 자기 말만하다 서둘러 통화가 끝난다. 결국 어두운 세상을 겪고 난 뒤에야 아는 것일까?

우리에게 행하신 주의 사랑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39).” 이는 모든 복음서의 공통주제다. 다 같이 한 목소리로 다루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또한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에 확실한 것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곧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한데 그럴 여력이 안 되는 것은 항상 자기 일에 빠져서다. 자기문제로 질척거리며 살다 나이 들고 완고하여진다. 그러니 우린 어디로 피할 수 있을까?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4).

오늘은 믿음의 확신으로가 아니면 말씀을 신뢰할 능력이 없다는 데 생각이 모아진다. 힘이 다 소진되는 것이다. 그저 온통 돈 벌 궁리로 사는 일에 급급하다. 성경은 부디 당부하시기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너무 많은 유혹이 돈 잘 버는 법을 일깨우는 세상에서,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144:2).

부디,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
(119:117-118).

반드시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91:14).

이와 같은 말씀을 소망을 가지고,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123-125).

사모함이 피곤할 정도로 주의 말씀을 갈망하고 살고 있는지…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29).

아는 자는 안다. 앎으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너무 억지스럽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0:12).”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말씀 붙들고 주의 섭리를 신뢰하며 오늘의 어려움으로 보물이 묻힌 땅을 소유해야 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아니면 빼앗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21).” 기껏 믿는다고 믿고 살면서도 죽도 밥도 아닌 상태로 사는 세월이 부디 너무 오래되지 않기를.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42:143).

오늘 말씀을 입에 머금고 오래 되씹으면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그야말로 아차, 하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었다. 그러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리하여,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148-14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