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에스라 4:24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시 119:161-162
사마리아인들 곧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대적들이 성전 건축의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지분을 갖고자 하여 건축에 참여하길 바란다. 성전 재건을 관장하던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족장들이 저들의 동참을 불허한다. 당시 북이스라엘인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에 의해 정복당한 뒤 앗수르는 저들을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혼합정치를 실시, 북이스라엘 지역에 이방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자연스럽게 저들의 온갖 종교가 섞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본질을 흐렸다. 그런 가운데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재건에 동참시켜 줄 것을 요청하자 그럴 수 없었다. 저들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이미 그 정신과 사상은 진리에서 벗어났다. 한동안 그들과 이민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남유다 지역을 점유하고 팔레스타인 전역을 독무대로 삼고 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변 환경을 토대로 오늘 우리는 저들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성전재건에 거절당한 사마리아인들은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상소하여 저들의 성전건축을 중지시킨다. 이에 성전 재건은 중지되고 그에 따른 건축 중지는 느헤미야가 귀환할 때(B. C. 444년)까지 중단된다. 이런 사태는 아하수에로가 바사 제국의 4대 왕에서 물러나고(485-464년) 아닥사스다가 5대 왕이 되어 B. C. 485-464년을 통치하였고, 그 일은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25년까지 중단되니라(24절).” 그러니까 4대 왕 아하수에로와 5대 왕 아닥사스다를 거쳐 다리오 2년(B. C. 520년)인 16년이 지나서야 다시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는 순전히 같은 민족끼리의 분열로 인한 것이다. 그만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전혀 다른 민족성을 띄었고 그 골은 그만큼 깊어진 것을 볼 수 있다(학 1:1-11). 자신들을 참여시키지 않는다고 하여 상소를 올리고 이를 방해한 것은 그만큼 신앙적인 타락상이 심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듣거나 읽을 때는 그저 그럴 수 있는 갈등과 소모적인 분쟁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남북사정도 국내의 정세를 봐도 알 수 있다. 분단 세월 수십년 만에 전혀 다른 민족성을 띈 것은 물론 서로 전쟁의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진영논리와 그 갈등의 골은 가히 점입가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어떤 다른 민족이라도 이보다 지긋지긋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탄의 가장 호기로운 무기는 거짓말과 성질머리다. 거짓말은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었다가 순식간에 부풀려져 나중에는 그것이 사실을 대신한다. 자신도 거짓을 참으로 여기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한 올의 거짓이 모여 모여 죄악의 수레를 끄는 지경에 이른다.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신 바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55).”
남의 이야기로 들을 때는 그게 훤히 보이는 것 같지만 서로가 주의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저들 부부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막상 팔아 주 앞에 바치려고 하니 이런저런 필요와 ‘어쩔 수 없는 처지’가 있었지 않았을까? 사탄은 참 대단한 게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리 되는 것이 실은 사실인지 거짓인지 스스로도 분간하기가 어렵다.
공교롭게도 성경은 이를 기록하고 있다.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7).” 그러니까 우리가 두려운 것은 이 모든 오늘의 행위나 사실이 우리 개개인의 행위 책에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그러니까 어느 훗날, 곧 주의 권능의 날에 우린 모두 그 앞에 서야 한다. 하여 바울은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곧 우리의 행실을 두고 하는 말로 말이나 행동에 있어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잠 2:21).” 이를 시편으로 보면,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시 18:25).
우리로 경각심을 갖고 이를 의식하며 특히 오늘의 말씀 앞에서 저들의 소행을 보며 치를 떤다면, 오늘 우리 현실의 반목과 갈등에 대해서도 엄연한 태도가 요구된다. 심지어 교회가 나서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세상에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목사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뜻 외의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인 소신을 밝히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덩달아 부화뇌동하여 옳고 그름을 우리가 판단하여 상대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보면 모두가 저마다의 시선과 입장에서 각각의 세계에 갇힌 사람들이다. 종종 유튜브를 통해 보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같은 사안도 아, 다르고 어, 다르게 해석하기 마련이다.
한데 또 하나는 그와 같은 반목과 분열에는 거짓말과 함께 뇌물이 오가게 되어 있다. 오늘 본문 11절 이후를 보면, 바사에 반역하려 한다는 거짓과 함께 저들을 매수하였다. 거짓말과 거짓 돈은 한통속이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안 그럴 줄 알았던 사람인데 순간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도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 17:23).” 그러니 이와 같은 소행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과 같다.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잠 29:4).” 이에 따른 결국은 저주뿐이다.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민 22:17).”
앞서 잠시 언급하였던 성질머리에 대해서도, 그럼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인정하면 될 일인데, 거절에 따른 성질이 난 것이고 이것이 온 머리로 올라가서 혈기와 방자와 자기주장에 따른 막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은을 받고 자신을 파는 행위보다 무섭고 다발적이고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성격, 기질 등의 머리가 된다. 성질머리는 성깔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칠고 앞뒤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순간적인 혈기다. 혈기는 격동하는 의기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옳다는 데서 굽힐 줄 모른다. 자연스럽게도 우리가 노인이 된다는 일은 그 지나온 세월만큼 인자하고 온화해지는 성품을 가지면 좋은데, 그 고집과 완고함은 막무가내다. 곧 후회를 하든지 반성을 하든지, 정작 한 사람은 금세 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뒤끝이 없다지만 당한 사람은 저의 말이나 행동에서 이미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난 뒤다.
그래서도 노인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왜 그러했는지 알겠다. 여하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읽으면서도 속상하고,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돌이켜 주의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해결 방법이 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오늘 시편에서 같이 와 닿았던 구절도,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19:161-162).
나는 그래서 인정하고 순응한다. 아, 내게 왜 약까지 먹이시면서 이 우울과 불안을 내버려두시는가 하는. 이를 복으로 여기는 까닭은 나야말로 나의 성질머리가 고약한 줄 잘 안다. 그럼에도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때면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숨을 몰아쉬고 어떤 불안이 훅, 하고 나를 휘어잡을 때 나는 되레 주가 붙들어 세우시는 것을 느낀다. 조금은 우스운 소리지만…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42-43).”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하는 것이다. 어렵다. 힘들고 때론 고통스럽다.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또 그만큼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데서 기꺼이 오늘의 이 묶임을 감사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151).
아니었으면 내가 이처럼 주 앞에 나아올까? 사실 성질머리는 불치병인 죄악의 단면 같다. 그런데 보면 몸도 희한한 게 이젠 또 저절로 이 시간이 되면 눈이 떠지고, 눈을 뜨면 서둘러 씻고 교회로 올라온다. 이로써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확신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다. 예수님도 일러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곧 우리가 우리의 땅, 그 삶을 넓히는 것은 온유함으로다.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이를 느낄 수 있는 게 복이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 50:8).” 이를 시인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마치 오늘의 우리 현실 같다. 그러할 때 더 큰 소망이 생기는 것은,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119:152).
다소 원론적인 말이지만 영생이란, 아는 것이다. 근거도 증명도 필요 없는 앎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안다는 것,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다는 시인의 표현처럼, 우리 안에는 누구나 하나님을 알만한 유전인자가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이를 오늘 시인은,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155).
악인이 왜 악인인가 하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사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저들이 왜 그와 같은 거짓말에 자신을 속이며 사는 것일까? 세상이 주는 달콤함, 뇌물 같은 탐욕과 음욕을 마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악이란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곧 자신을 쳐서라도 복종시키는 것이 없다면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 뿐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158).
우리로 슬프게 하는 것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당장은 손해를 보고,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한 현실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겐 약속된 것이 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160).
그것으로 나는 산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
아니면 우린 무엇으로 스스로를 용인할 수 있을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다른 무엇으로도 고통뿐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오늘의 본문과 시편의 찬송과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을 가지고 나는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65, 169)
이로써 주 앞에 섰을 때,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비록 내세울 것 없고 누구에게도 자랑할 게 없다 해도,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3-174).
그리하여,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7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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