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8:9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중심으로 하여 언약을 살피고 말씀으로 유다 백성들을 참회하게 한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8-9).” 저들을 위로하고, 해야 할 일을 기르치고, 이를 순종하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보인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3차에 걸쳐 귀환한 후에 말씀을 듣고 백성들의 통곡의 회개로 이어지는 모습이 신선할 정도로 귀하다. 곧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를 잃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나름 서로의 주장과 자기들 노력으로 무언가 이루려 하나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것이다. 지혜서는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잠 18:10-11).” 곧 우리가 ‘부자’인 것은 하나님께로 달려가 안전함을 얻는 것과 같다. 바울은 이를 두고 우리에 대해 정의하기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고로 우리의 신앙이 주를 바로 향할 때 주 앞에 나아오기를 즐거워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 곧 서로가 위하여 생각하고 바라는 일을 두고 주께 아뢰는 일은 당연하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오후께 사모의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하였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치고 설상가상이라더니 나는 저의 처지와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며칠 전 그의 남편이 허리 수술로 입원했다 퇴원하였는데, 곧이어 아이의 그러한 일 앞에 나는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기도할게, 힘내.’ 하는 정도의 말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잠결에 눈을 뜨고 교회로 나왔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 7:6).” 오늘 말씀도 “…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9).” 우리가 주 앞에 울며 우리의 죄를 돌아보아 회개하는 것은 은혜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징계하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때의 징계가 축복인 것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곧 그 영혼이 아주 멸망할까 하여 앞서 회초리를 드시는 일이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으로,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89:32).
그리하여 돌아보고 회개하며 통회하기를. 부디 일련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깨닫고 자신들을 돌아보아 맡기신 그 사명을 다시금 바로 할 수 있기를. 말씀 없이 고단한 삶만 이어지면 그 영혼은 황폐할 수밖에 없다.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자신들이 행할 일에만 몰두한다. 이때 우리로 심히 흔드는 것이 ‘종교행위’다. 나름은 열심이겠으나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정말이지 항변하며 억울해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곧 우리의 회개를 가로막는 것은 자신이 행한 일을 두고 ‘이만하면 됐다’ 싶은 것이다.
또한 오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관여, 그를 경외하며 두려워할 줄 모르는 무절제의 삶이 이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떠올리면 가용에너지의 초과 상황을 경고한다. 가령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현상은 힘의 분배가 시스템에 의해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권력에 모든 세력이 흡수되면서 이번 '이태원 참사' 같은 경우도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이다. 우리 삶에 있어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곧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안다고 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 다를 바 없이 그 삶이 무질서 가운데 놓인 것이다. 이는 말씀이 배제되고 기도가 쉼으로 가져오는 결과다. 가히 점점 더 참혹해질 수 있다. 가령 온 우주의 질서나 저 혼잡한 도로의 상황도 하나의 신호체계와 그 어떤 힘의 관여에 의해 유지된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혼란과 무질서는 당연하다. 앞으로도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가정에 이르까지 그 여파는 들불처럼 우리 삶을 파괴할 것이다.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을 붙들어 끌어들이는 힘은 말씀이다.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9:8-10).
하여 우리의 신앙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유지되는 질서다. 그 균형이 깨졌을 때 무질서가 대혼란을 야기하듯이 우리의 믿음은 부질없다. 마치 자신이 아는, 믿는다고 여기는 것으로 구원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기면 오산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다. 내가 한 게 없다. 성경은 경고하듯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스스로 오해하면 큰일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 나는 이 말씀을 항상 두려워한다. 믿노라, 하고 방심하다간 결정적인 순간에 혼자 억울할 수 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온다. 하여 늙은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에 오늘 본문에서 ‘말씀과 회개’의 구조는 우리 신앙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란 것을 보여준다. 즉 말씀 없는 기도는 감정만 흔들며 자기 요구만 늘어놓기 일쑤다. 말씀 없는 찬송은 마음의 응어리만 풀어내는 카타르시스가 되기 십상이다. 말씀 없는 말씀은 외식하는 자로 살게 한다. 저들을 향해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그러니 나는 종종 내가 믿노라, 하고 나를 놓아둘 때 오는 혼란이 두렵다. 무절제와 방심이 통제되지 않을 때는 말이다. 결코 나는 그래서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버려두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2).” 하는 신앙의 질서가 믿음의 정렬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곧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 오늘의 상황을 두고 나는 누군가와 이와 같이 ‘주의 손을 붙들려 홀로 앉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찍 눈을 뜨고 다시 눕지 못하고 이처럼 교회로 올라온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97).
할 때에 우리에게 서로에게 더해주는 힘이 그 신앙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곧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이것이 우리 성도의 삶이고, 우리 영혼의 우주 같은 무궁함을 평안히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에스라는 결심하였고 이를 오늘 실행하였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
특히 우리가 주의 사역자로 삶을 산다는 일은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5-16).” 한데 보면 가장 대하기 힘든 자들이 나름 잘 믿고 있다고 여기는 사역자들이다. 평신도나 일반 성도들보다 목이 곧다. 뭐라 하면 열에 아홉은 듣기 싫어한다. 발끈하고 졸지에 어색한 사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좀 안다, 배웠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바울은 당부하고 있는 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곧 우리로 겸손히 주를 섬기고 말씀을 청종한다는 일은 그래서 어렵다. 시인은 기도한다.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119:117).
하여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말씀 앞에 항상 자신을 앉히려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나는 누구에게 더는 말하지 않았고, 그 생략한 말이 나를 향하게 하였다. 그래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벽 일찍 교회로 나온다. 내가 아는 나는 그럼에도 수시로 안이하고 안일하다. 나야말로 이처럼 나를 한 시도 쳐 복종시키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 그래서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는 나는 알아서 해, 하고 둘 때 넘어간다. 툭, 하면 튀어나오는 부정적인 말과 생각은 달콤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예전에 따르던 습성이 여전한 것이다. 우리의 무질서, 무절제는 아차, 하는 순간에 뒤엉켜버리는 사거리의 신호등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온전하려면 또한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 4절에서,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서로가 없었다면 이와 같은 회개와 정화의 시간이 과연 가능하였을까? 오늘 시인은 이를 찬양하는 것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33:1).
곧 우리는 한 몸과 같아서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서로가 서로를 생각함은 주께 바라고 구함으로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7-28).” 곧 우리가 받은 이 믿음의 분량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리하여 우리의 평안이 어디서 오는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엊그제 묵상하였던 말씀과도 연결된다. 이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그러할 때에 우리가 가까이 할 사람과 멀리 할 사람이 구별된다. 곧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는 경고의 말씀이다. 우린 얼마나 아무 생각없이 서로가 좋으면 좋을 대로 사귀고 가까이 하다 덩달아서 주를 멀리하곤 하는지 모른다. 이에…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133:2).
서로가 함께함은 ‘보배로운 기름’ 같고, 그것도 '서로의 옷깃에 내림' 같다. 흔히 성경에서 비유되는 기름은 제사장의 임무에 있어 성물을 구별하는 데 쓰였다. “너는 상등 향품을 가지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가지고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출 30:23-25).” 이를 ‘아론의 수염’에 흐르는 것과 같이 성도가 서로 같이함은 그만큼 거룩하고 존귀한 일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늘 하루도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이유가 담겨 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은 필연이다. 우연은 없다. 이에 굳히는 표현으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3).
여기서 헐몬은 안티 레바논 산맥 남쪽 돌출부로 해발 2770미터에 만년설로 뒤덮였다. 곧 이 헐몬 산은 앞서 2절의 ‘아론의 수염’과 같이 시온의 산들이 저의 옷깃과 대구를 이룬다. 곧 헐몬에서 만들어진 신성한 물이 유유히 흘러 시온을 적시고 풍성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임, 그 관계를 통해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하신다. 헐몬의 이슬처럼, 그 이슬과 같은 청년들이 돌아올 것이다. 하여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면,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3).
곧 오늘 우리가 서로를 생각함은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할 것이나’ 이로써 주의 생수의 강이 마르지 않게 하심이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에 서로 기도하고, 구제하고, 나누고, 함께함이 신앙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데 있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에 내림같이’ …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122: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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