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2. 11. 12. 05:28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헤미야 9:6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성벽 재건을 마친 뒤 거의 한 달 동안 주 앞에 회개와 각성의 집회는 계속되었다. 전 국민이 회개하고 레위인들의 대표기도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저들은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죄까지 주 앞에 자복한다. 곧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성찰하는 것이 회개이다. 계명 곧 말씀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것’이다.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29).”

 

이에 말씀이 두려운 것은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1-4).” 여러 번 이를 되새기며 입에 물고 있으면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율법은 우리로 죄를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를 묵상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하실 때 알게 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 성경은 이를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에 말씀으로 붙들고 산다는 것은 탁류 같은 세상에 쓸려가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 자기들 좋을 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서로를 견주어 총구를 겨누는 꼴이다. 한데 우리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9, 18).

 

곧 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열어서 듣고 보게 하셔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돌이킴과 보이심은 동시적인 일이다. 회심과 회개가 하나로 둘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다. 행함이 없이는 믿음이 살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돌이킴과 성령이 내주임재하심이 하나인 것과 같다.

 

회개가 있으면 죄와의 단절은 자동적이다. 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그러므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곧 죄의 속성을 알면 알수록 치를 떨면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그래서 성도의 삶은 ‘죽는 것이 낭비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멀리한다는 것은 막연한 그런 생각이 아니라 실제 눈을 빼고 팔 다리 하나를 잃는 것과 같이 결연함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마 5:11).” 가령 나는 요즘 누굴 위해 기도한다. 자신의 수술 후에 좀 나아졌는지? 아들이 입원하고 좀 달라졌는지? 아내까지 눈에 띄게 병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좀 달라졌는지? 통화할 때면 조심스럽게 묻곤 하는데, 여전하다는 대답이 돌아올 때면 좌절하게 된다. 죄의 속성은 결국 모두 잃어야 얻을 것인지.

 

그래서도 나는 우리 아이들과 내 곁의 젊은 친구들에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를 심각하게 여기며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엔 다 좋은 것 같다. 좋은 게 좋은 것 같은데 어느새 보면 우리가 저들을 닮아가고 있다. 병균에 감염되는 것처럼 서서히 그러하다는 것을 알 때면 돌이키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자신을 쳐내는 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왜 성경은 이처럼 단호하신지,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그래서 우리 안에 분별의 영을 주신다.

 

누가 전화를 하였다. 교회 안에 어떤 이를 두고 생각이 많아서 물었다. 저의 열심이 모두를 시험에 들게 하고 급기야 모임을 와해시키고 서로를 반목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를 두고 전화한 이는 이를 어찌해야 할지 어려워한다. 우리의 지나친 열심, 혹은 지나친 무관심은 동일한 것이다. 지혜서는 이르길,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이는 서로 간의 갈들의 가장 원론적인 이유다. 지나치다 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그만큼 강한 것으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데 따른 눈 감고 귀 막은 처사다. 본래 ‘쉰 쥔 자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나이 50이 넘으면서 자신의 고집은 그만큼 견고하여 이를 무너뜨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이다. 지혜자는 앞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이를 오늘 정치, 사회 우리 전반의 문제에 놓고 보자. 목사가 누구 앞에서 진영논리에 따른 주장을 하면 안 된다. 더욱이 성경을 들먹이며 이를 주장하는 것에 뒷받침으로 써서는 더더욱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 생각이 어떠하든지, 이는 하나님과 자신이 씨름할 문제지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절대적인 악도 절대적인 선도 없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성경이 괜히 이를 정의하시는 게 아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한데 마치 자신은, 자신들은 옳은 것처럼 휘두르는 주장은 마치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 같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잠 26:9).”

 

굳이 누구 교회의 일을 뭐라 할 수는 없으나 누구의 지나침이 서로를 흔든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저 스스로 자중하며 자기의 열심을 주 앞에 내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우리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2).

 

우리가 말씀과 멀어질수록 자기주장이 강해질 따름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 곧 우리는 첫째,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누구 앞에서 집사로 선생으로 목사로 선다는 일은 매순간 스스로를 조심하고 단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우리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곧 주의 은혜로 말씀을 가지고 산다는 일은 구별됨을 스스로 인정하는 삶이다. 셋째,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그러하다면 어떤 지나침도 그릇되다.

 

온유한 목사로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된 존 뉴턴은 실제 노예선 선장으로 노예들을 실어 날으는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저가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된 뒤 설령 누가 수렁에서 더러움을 일삼는다 해도 그를 이해하고 감싸주었던 것은 자신도 수렁에서 값없이 건짐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이다. 바울은 안 그런가? 자신을 일컬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와 같이 우리가 쉰 줄에 잡는 고집을 놓아야 한다. 그 손에 말씀을 잡아야 한다. 어쩌다 요즘 우리 사회의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이쪽과 저쪽이 갈려 서로를 욕한다. 누구는 직접 까고, 누구는 돌려 깐다. 그러면서 서슴지 않고 자신이 믿는 신앙으로 견주어 선과 악으로 구분하려 한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무한 사랑과 관용의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 건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 4절,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절에 이어서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이와 같이 인정하는 데서 회개는 더해진다. 그래서 전도자 곧 지혜자도 말하길,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쪽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해서 나는 의도적으로 누구와 대화에서 정치얘기나 종교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화두를 돌린다. 오늘 본문에서도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6).” 아니면 다른 무엇, 5년짜리 한 사람의 정권으로 이리저리 갈리고 쓸릴 것인가? 우리에겐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으로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다.’ 다른 표준도 누구의 주장도 어떤 진영의 논리도 옳을 수 없다.

 

다만 주가 우리에게 주신 명령,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하실 때에 “내 백성은 잃어 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렘 50:6).” 다들 갈 길을 잃었다. 젊은이들도 늙은이들도 모두가 그 때가 처음이라 서로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은 같다. 나이 든 게 벼슬도 아니듯 그 쥔 고집만큼 고약한 것도 없다. 오죽하니 ‘꼰대혐오시대’가 되었을까?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4-5).” 그러는 사람들 사이에서 덩달아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밥 그릇 싸움과 어디서 한 술 얻어먹을까 하고 기웃거리듯 까대는 꼴이라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오늘 본문은 우리로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주만 바라기를 외친다. 이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2).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곧 오늘 일련의 상황이 오늘에 이르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시대가 그러하여서 악하였다. 하면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11:7-8).” 우리가 두려워하며 경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하여서 오늘 시편은 더욱 선명하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1).

 

‘깊은 밤’ 같은 날들이다. 우린 어디에 서 있는가? 하고 묻는 것 같다. 만일 주의 앞에 서 있는 게 맞는다면 ‘여호와를 송축하라.’ 누구를 향해 덩달아 총구를 겨누고 좌파 빨갱이니 우파 골수니 하고 욕지거리할 게 아니다. 교회 안의 누구로 덩달아서 감정이 상하고 심지어 그 일로 교회를 떠날 생각까지 한다면… 죽기 전까지 우리가 다다를 선은 없다. 우리로서는 어제 묵상하였던 시와 같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133:3).

 

어쩌면 이 길이 영생으로 가는 관문이다. 어느 쪽이냐에 정신 팔려 시간을 허비하느니…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그들은 골방에 거주하면서 주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9:33).” 시국이 어려울수록 우리가 취할 마음가짐이겠다. 그렇듯 오늘 내게 두신 일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으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그러므로 우리는,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2).

 

다른 데 기웃거리며 말을 보탠들 같은 쪽이 아니면 논쟁은 잦아들지 않고, 같은 쪽이라 해도 다른 쪽을 욕하느라 시간만 허비할 뿐이다. 그러지 말자, 그러지 말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 16:19).” 다른 더 중요한 게 있던가?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9:2).

 

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하나로 통일된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그러므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이에,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