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에스더 8:15-16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편 146:7
오늘 모르드개의 모습은 장차 우리가 누릴 저 천국에서의 모습 같다. 유다 민족을 멸절하려 하였던 하만이 장대에 달려 죽고 그 지위를 모르드개가 대신하여 관장하게 된다. 또한 하만이 꾸민 왕의 조서를 취소하고 대적을 멸하고 승리의 길을 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장차 누리고 보게 될 주의 공의와 영광을 상상하게 한다.
우선은 선한 결정에 있어 이를 실행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오늘 1절 도입에 보면, “그 날” 하고 속히 이루어지는 역사를 본다. 그 날은 하만이 죽은 날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니라.” 더는 미룰 게 없다. 속히 이룬다. 오늘에까지 이르러 참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은 ‘그 날’이 되면 속히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다. 하면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1).”
결단을 촉구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있어 미적거리고 망설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우리로 자꾸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 무얼까?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 9:59, 61).” 우리로 뭉개고 미루고 망설이게 하는 일은 흔하다. 또한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한데 주님의 대답은 단호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나에게도 고질적이지만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 현실적인 문제로 재고 따지고 하는 시간이 다들 너무 길다. 우리에게는 ‘그 날에’ 곧 ‘즉시로’ 행하는 신속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바로 ‘곧’ 그 즉시로 행할 수 있는 용기,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이 때론 속히 이루어진다.
오늘 일련의 어떤 결정,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에 있어 이것이 창세전에 계획된 일임을 안다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는 신중한 생각과 오랜 판단이 필요한 게 아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 그러할 때 주를 경외함에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따른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한 사람이 결단을 한다. 그리고 말씀을 본다. 이에 조카 악마는 삼촌 스크루테이프에게 그 상황을 알린다. 그러자 사탄은 전혀 서둘지 말 것과 함께 ‘그러다 잠시 나아가 식사를 하게 하면 돼!’ 하고 간단한 대응책을 제시한다. 사탄의 말대로 저는 말씀을 보며 마음이 뜨겁다가 잠시 시선을 떼고 식사를 하러 갔다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굳이 서둘 게 없다는 생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소망은 장차 드러날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누가 개척을 염두에 두고 교습소를 하네, 11월에는 본격적으로 이를 알아보네, 하는 결단을 했었다. 앞서 무슨 수술을 하고 나름 치료가 끝나자 다시 현실적인 문제로 유야무야 하게 된 모양이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일은 저가 예비하신 삶을 사는 일이다. 우리의 준비에 따른 일이 아니다.
바울은 강조하기를 하나님의 약속은 굳건하고 견고하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롬 15:8).” 이에 우리로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었다!
주저함은 회피다. 여러 이유가 끼어들어 결단을 미루고 더디게 한다. 사정은 다 있다. 모든 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미루고 신중해야 할 이유는 수십 가지이다. 이때, '그 날에'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삼으신 것은 ‘축복’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견고하고 저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는 주께 영광을 올린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시 117:1).
우리로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로 찬송하게 하심이 주의 영광이 되게 하려 하심인데,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그러므로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사 3:10).” 그것이 오늘의 나였다는 사실 앞에 감복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란,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잠 12:10).” 즉 짐승만도 못하였던 나의 생명을 돌보셨다. 동물에게도 긍휼은 베풀 수 있다. 긍휼은 전적으로 그 마음을 주시는 이의 것으로 저를 불쌍히 여길 때 나타난다. 이는 은혜와 같으나 다르다. 은혜는 동물에게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은혜란 그 대상이 책임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낄 때 베푸시는 것이다. 동물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불행과 죄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날’ 곧 즉시로 일이 진행되는 것과 모르드개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과정은 우리가 누릴 장차의 영광을 소망하게 한다. 성경은 약속하셨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이를 우리가 어찌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수 있겠나? 그럴 자격이 없다는 자책이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누리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은혜다. 우리는 죄책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 달리셨다. 이를 묵상하면 은혜는 배가 된다.
그리하여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롬 15:10-12).” 여기서 보면 우린 즐거워하고 소망으로 찬송하게 될 것이다. 즐거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닫고 이를 알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내는 돌아보며 생각할 때마다 즐거운 일이 되었다. 소망은 그 즐거움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 즐거움을 영원히 누릴 것을 상상하며 소망하고 기쁘게 한다. 이에 찬송은 우리로 흥얼거리듯 주를 노래하게 한다.
우리가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일이다. 이것이 주의 영광이 되고 주로 기쁘시게 하고 주님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 이를 오늘도 우리에게 사명으로 채우신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67:3-4).
이를 위한 우리의 전제조건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그러니까 우리로 갈등하게 하고 행동을 유보하게 하는 생각은 세상이 주는 근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러므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 일의 결국은 오늘 본문의 영광과 같다. 우리로 근심과 염려로 금식하고 기도하게 하시더니, 이와 같은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소망의 날이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왕이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하니라.” 누구에겐 모든 게 끝장나는 날에 우리에게는 영광의 날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바로 이어서 오늘 시편을 보아도,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146:1-2).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다. 우리는 늘 자신을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를 위하여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럼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사는지….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150:3-4).
이와 같이 적극적인 표현은 우리로 이방인에서 유다 민족,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 오늘 에스더 마지막 구절을 그리 묵상한다.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그리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왜냐하면 그 참되고 즐거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이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3-4).
이 땅의 모든 것은 소멸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왕상 8:60).” 이를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하여진 것이니,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송과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도 허락하신다. 이를 가지고 우리는 영광을 올리는 것으로,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4).”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곧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6:5).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자기 하나님으로 자기의 소망을 둘 수 있는 오늘의 내가 복이다. 곧 그 하나님은 긍휼하시고 자비하며 은혜가 풍성하시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7-9).
이 놀라운 은혜, 그의 긍휼하심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12:5).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이고 우리가 붙드는 소망이다. 그리하여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오늘을 하루 더 나의 삶을 연장하시며 이 땅에서 행할 일을 알게 하심인데,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곧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5-6).
그리하여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46:10).
그렇게 여호와를 우리는 영원히 즐거워하고 찬송하고 소망한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7:17).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9:2-3).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32:11).
.
.
.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를 찬양할지어다 (0) | 2022.11.26 |
---|---|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0) | 2022.11.25 |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0) | 2022.11.23 |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0) | 2022.11.22 |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0) | 2022.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