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스더 7:3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편 145:18-19
전날에 하만은 모르드개로 인해 심한 모욕을 당하고 오늘은 그를 달아 죽이려고 만든 장대에 자신이 달리는 신세가 된다. 악인의 끝은 하나다. 의인은 주께 간구하나 악인은 간구하지 못한다. 오늘 시편은 이를 말해주듯 간구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노래한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그 결정적인 증거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의 어떤 의로움으로 우리를 사랑스러워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직 죄인일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이를 앎으로 우린 주께 구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37:4).
구하지 않음으로 얻지 못한다. 친구가 어제 전화를 했다. 다니엘 기도회를 끝까지 잘 마쳤다고 자랑하였다. 물론 하루 이틀 회사 일로 빠진 경우도 있지만 이번에는 참 좋았다고 하였다. 나는 저의 달라지는 모습이 놀라웠다. 우리가 서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저의 말 중에 그러저러하여 다들 구하고 받는데, 자신은 받지 못하는 것에 은근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를 어찌 설명해줄까 하다 전화로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워서 언제 한 번 오겠노라고 하였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5).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함이 바뀌고 난 뒤 알 수 있다. 루이스의 표현처럼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뜻을 바꾸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함으로 어느새 우리의 뜻이 바뀐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8).” 해보면 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더욱이 그 구하는 자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이 놀라운 시편의 세계에서 우리는 산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145:18-19).
내가 매일 시편을 살기를 바라는 것은 그 세계가 하나님의 품, 어머니의 자궁, 긍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긍휼의 히브리어 뜻은 자궁이다. 태중에 있는 아이 같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심을 시편으로 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이면서 송구하기만 한 즐거움은 ‘나의 죄를 그냥 넘어가시는 긍휼 때문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이는 사실 하나님의 공의와 어긋난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냥 그렇게 그러실 수는 없었다. 하여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곧 나의 죄를 없었던 것으로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를 제물로 삼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일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사함을 얻을 수 없는데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대신 그 값을 치르신 것이다. 가령 시편 51편의 세계는 다윗의 강간과 살인과 은폐와 위선적인 결혼으로 모두 가려지는 줄 알았다. 한데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51:6, 16).
곧 나는 친구에게 우리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느끼고 인정하면 할수록 이와 같은 주의 긍휼하심은 더욱 안전하게 여겨진다고 말하였다. 이를 알게 되면서 다윗은
첫째,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붙들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
이는 말씀을 붙든 것으로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우리가 이를 잡지 않으면 무슨 수로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둘째, 날마다 자기 죄를 씻어달라고 구하였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2, 7).
곧 우리가 날마다 씻는 것처럼 날마다 주께 구하는 용서와 자비는 십자가의 보혈로 이미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7, 9-10).”
셋째, 죄의 심각성을 그 어떤 일보다 먼저 알았다.
-내 죄가 늘 내 앞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3).
-죄는 오직 하나님께 지은 것임을 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4).
-자신의 잘못으로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6).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양심을 저버렸다는 것을 안다. 곧 태생이 죄인 됨을 인정한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
다섯째, 한 걸음 더 나아가 죄를 용서 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요구 곧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간구한다.
-자신이 택함 받은 확신으로 성령을 구한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1).
이를 베드로 사도는 덧붙이기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구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0).
-말씀을 구하며 어그러진 뼈들일지도 즐겁게 해달라고 구한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8).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자원하는 심령을 구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2).
-나아가 주를 찬송하기를 구한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5).
-자신의 허물이 도리어 다른 이에게 교훈이 되기를 구한다.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3).
곧 우리는 구하는 사람들이다.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에 7:3).” 주가 우릴 위해 우리 곁에 두시는 그때마다의 사건과 사람과 상황을 잘 안다. 곧 우리는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이 복음을 증거하고 죄를 드러내어 주의 공의를 바란다.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4).” 오늘 에스더의 한 부분과 다윗의 일화가 하나인 듯한 세계 안에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왜 우린 다 이긴 싸움에서 늘 다시 패하고 살고 있는지……. 우리에게도 확신이 필요하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러므로 다윗은 오늘도 주의 이름을 송축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
자신의 억눌린 죄악으로 자책하고만 있지 않는다. 보다 진취적인 기쁨을 얻고 하여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역 4:10).” 즉 하나님을 자기 삶에서 인격적으로 느끼지 못하면 남의 간증은 그저 감동뿐 그런가보다, 하는 직관밖에는 없다. 실제 그 세계를 살지 못하면 명화 앞에 종일 서서 감상하는 정도의 즐거움밖에는 얻지 못한다. 하여,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3).
스스로 자기 삶에 하나님이 어찌 간섭하셨고 개입하셔서 오늘의 자신이 가능하였는지를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안다.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삼하 22:49-50).” 곧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3).”
서로의 간증은 유익하지만 그 들은 것이 말씀을 삼킬까 두렵다. 이를 알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줄인다. 말씀으로 말씀만 일하시게 하고자 한다. 누구에겐 지루하고 재미없다. ‘늘 같은 말’로 들린다는 친구의 표현도 아직 저가 그 가운데 말씀의 맛을 보지 못하여서이다. 남의 이야기, 어떤 가증이 주는 유익은 분명히 있지만 그게 내 것이 되지 않으면 허사다. 저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럴 때 나의 이야기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이야기, 그 말씀을 비로소 듣게 된다. 종종 누가 물으면 나는 내 글이 아주 재미없고 이상하고 늘 같은 말 같은 소리이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실제 말씀으로만 말씀을 전하면 지루하니까 양념을 치듯 간증을 더하고는 하는데, 주객이 전도될 때가 많다. 설교 끝나고 예화만 들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하루 이틀 사이에 시들해진다. 남의 이야긴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여,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4-7).
내가 나의 간증을 가지고 산다는 일은 말씀의 기쁨을 알면서다. 전에는 슬프고 억울하던 기억이 이제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증거가 된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우리가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때 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주 목적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8).
이를 자기 삶에서 느꼈고 실감했고 실제를 살았으면 저는 다시 이것을 잃지 않으려 목숨을 다한다. 곧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104:1-12).
이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9).
이를 알면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4).
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알고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은 굳건하다. 곧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그래서 나는 친구가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도 응원한다. 그러할 때,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145:15-17).
이를 확신할 수 있었던 계기가 간증이겠으나 말씀을 토대로 이를 벗어나지 않을 때 확산할 수 있다. 곧 오늘 본문 에스더와 시편의 세계는 하나의 시공간에서 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18-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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