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13편 / 시공간을 초월하여 찬양하라

전봉석 2022. 11. 25. 10:43

221127 주일

 

시편 113편

시공간을 초월하여 찬양하라

 

시 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13: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 113: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들어가는 말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현실과 교회의 갈등은 깊어간다. 신앙 안에서 바로 살려고 하면 현실과의 타협은 불가피한듯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여기서 주목할 것이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직장에 들어가는 일도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도… 심지어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는 바울 개인의 신앙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또한 ‘살든지 죽든지’ …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즉 삶에서 그 목적은 분명하였고, 이는 ‘사나 죽으나’ 곧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이에 따라 저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곧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을 바라는 믿음으로다.

 

이것으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 곧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을 경험하듯이 그리스도로 자족할 줄 아는 삶이 가장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 일체의 비결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곧 그와 같은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주를 사랑함으로 주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 능력,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기까지 한 그 사랑의 힘을 우리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산다는 일은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낀 시간이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3-24).”

 

어영부영 시간을 허비하고 사느니, 일찍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유익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또 하루를 허락하신 이유는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존귀가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를 바탕으로 오늘 시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열 가지 존귀함>다. 먼저 이 열 가지를 언급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 의미를 더욱 확실히 하겠다.

 

첫째,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슬픔이 세상의 슬픔과 결을 달리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둘째, 돌이켜 회개하고 주를 영접한 사실에 대해 그 소중함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셋째, 더 이상 회의와 갈등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넷째, 이제는 악을 악으로 간주하여 이를 경멸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다섯째, 자기 부정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여섯째,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일곱째, 예배가 달라진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여덟째, 나의 약점이나 장애, 결핍이나 노여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아홉째, 사랑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곧 진리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열 번째,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3-24).”

 

그러므로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 1:25-26).” 곧 하나님이 오늘도 참고 기다리시며 긍휼을 더하시는 것은 은혜이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어서 동물과 모든 자연에게도 줄 수 있다. 그러나 은혜는 이에 느끼고 죄책감을 받고 돌이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동물이나 나무에게는 죄책감이 없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물론 찬송 시이다. 초대교회 때는 실제 예배 때마다 시편을 낭송하고 노래했다. 오늘 시편 113편부터 118편은 특히 유대인들의 의식용 공식 찬송이다. ‘제1 할렐 시편’이라 하고, 시편 136편은 ‘대할렐시편’으로 ‘제2 할렐 시편’으로 두었고,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제3 할렐 시편’이라 하였다. 오늘 113편은 유월절 식사 전 두 번째 잔을 비우기 전에 낭송되었다. 114편에서 118편의 시는 식사 후에 네 번째 잔을 채울 때에 낭송되었다. 특히 오늘 113편은 주의 종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촉구하고 선언하는 감사예배 때의 노래였다. 할렐 시편들은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사역을 가장 원론적으로 모은 서시(序詩)에 해당한다.

 

오늘 시편은 2연으로 나누어서 1연(1-3절)은 온 세상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이제부터 영원까지’라는 시간적인 개념과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하는 공간적인 개념을 구사하여 우리의 찬송이 시공간을 모두 채운다는 것이다. 2연(4-9절)은 우리가 여호와를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요약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자이시며 가난한 자와 잉태하지 못한 자들 곧 소외된 자들을 언급하면서 실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주께 받은 은혜로 저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끌어올리게 한다.

 

그럼 앞서 서두에서 바울의 설교를 바탕으로, 오늘 시편을 연결 지으며 우리가 부를 찬송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보자.

 

1. 온 세상에 편만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라(1-3)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113:1).”

 

이를 보다 쉽게 읽어본다면 ‘너희가 그리스도인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는 것이다. 먼저 이것은 시간적으로 변함이 없는 ‘이제부터 영원까지’의 찬송이다. 흔히 우리는 시간의 개념을 직선으로 놓고 오고 가는 순서대로 인식하는데, 이를 동그랗게 말아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비틀어본다면, 아브라함의 ‘이제부터’나 바울의 ‘이제부터’나 오늘 우리의 ‘이제부터’는 서로를 나란히 한다. 그러니까 수천 년 전 저만치에 아브라함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오늘 내가 시작하는 ‘이제부터’와 같은 시간대로 ‘이제부터 영원까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2).”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있는 것 같지만 같은 시간에서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며 살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3).” 야곱이 돋는 해를 보고 지는 해를 보았듯이 모세도 다윗도 예수님도 바울도…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의 시간을 달리하는 것 같은데 ‘이제부터 영원까지’ 같고,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던 것 같은데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같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러므로 저들도 그러하였듯이 우리들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공통된 즐거움이고 찬송이다. 이에 다윗은 노래하기를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 22:27-28).” 하고 진술하였다.

 

선지자 스가랴도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1).” 이를 앎으로 우리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곧 우리의 찬송은 동일하다.

 

2.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여호와를 찬송하라(4-9).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4).”

 

우리의 찬양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 더욱 선명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가까운 훗날에는 분명히 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는 바울의 설교가 그래서이다. 이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곧 우리에게 각각의 인생을 허락하신 것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맛보아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는 것에 찬송하게 된다. 그런데도 10년, 20년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관심에 팔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오히려 퇴보하는 신앙의 그리스도인도 있다.

 

이를 오늘 하나님은 살피신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5-6).” 오늘도 우리 삶에 거하신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와 같은 주의 은혜를 안다면 오늘 우리 형편이 어떠하든지, 주를 바라고 주를 찬송하며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산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아, 만유의 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심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를 오늘 시인은 찬미한다.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7-9).” 이를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주의 이름을 찬송해야 하는 것이다.

 

나오는 말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시 107:41-42).”

 

이를 우리는 찬송한다. 우리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욥 5:11).” 이것을 믿음의 사람들은 실제 자기 삶에서 체험하고 살았다. 그렇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으므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는 성도의 고백이 매 시간, 매 공간마다 찬송으로 울려퍼졌다.

 

그리하여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곧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신앙이 단단해진다는 것은 저마다 이와 같은 찬송과 간증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것이 우리의 남은 생의 목적이다. 그렇게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래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정리하면, 우리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면서부터 첫째,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슬픔이 달라진다. 둘째, 회개하고 주를 영접한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셋째, 더 이상 회의와 갈등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넷째, 이제는 악을 악으로 간주하여 이를 경멸한다. 다섯째, 자기부인 자기부정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올리는 것임을 알게 된다. 여섯째,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 일곱째, 예배가 달라진다. 여덟째, 나의 약점이나 결핍이 노여움에서 그것으로 주를 찬송하게 된다. 아홉째, 사랑에 대한 관점이 세상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열 번째,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로운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