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4 주일
시편 114편
출애굽과 성소, 그의 영토
시 114: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시 114: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들어가는 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번 한 주는 욥기서를 묵상하였다. 욥기 1, 2장에서 욥은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는다. 심지어 몸에는 극심한 질병이 들어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한다. 이를 보고 저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한다. 3장에 들어 욥은 극심한 고통으로 탄식한다. 혼자 독백처럼 하는 한탄이다. 이 말이 빌미가 되어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과 논쟁이 펼쳐진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욥의 친구 중 나이 많은 엘리바스의 조언을 들었다. 특히 4-5장에서 이어지는 엘리바스의 지적은 논리적이다. 철학적이며 이성적이고 세속적이다. 인과응보적으로 현세의 시각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도 해박하다. 성경은 이에 반박한다. 현세적 시각과 성경의 종말론적인 시각이 부딪친다. 인생은 논리적이지 않다. 현실은 비이성적이다. 서로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만큼 크다.
오늘 시편에서 다루려 한다. 먼저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호소에 주목하였다. 어째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할까? 만약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이를 알면 오늘 본문은 자동문처럼 열린다. 시적정황은 출애굽을 회상하는 어느 익명의 시인의 찬송이다. 할렐 시로 공적인 예배 때 구별하여 불리던 찬송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영적인 출애굽’이다. 세상은 죄의 총체다. ‘이스라엘’은 모든 믿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이며 선민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오늘 본문에 앞서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생기는 문제와 마음의 눈을 밝혀야 하는 이유를 먼저 살피고 들어가겠다.
-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발생하는 문제점
1. 죄의 심각성을 모른다. ‘애굽’에 속해 사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죄의 실상을 알지 못한다. 죄의 위력을 모른 채 이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럼 영혼의 태만을 가져온다. 뒤늦은 후회가 소용없다. 또한 선민의식은 약해지고 세상에 대한 소욕은 강해진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게 왜 그리 심각한가?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곧 성령의 소욕을 무시하게 하는 구조가 세상이다(마 12:32). 믿는 사람이라고 방심할 일이 아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다. 교회도 안 가고 말씀과는 담을 쌓고 살면서 자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구원 받아 천국에 갈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나름 믿는다고 여기던 이들이 몰려 항의할 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이에 따른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를 들어, ‘척수성근위측증 치료제 졸겐스마’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올 10월까지 이 치료제를 맞은 환자가 여섯 명이다. 이제 한 명에게만 기회가 남았다. ‘척수성근위측증’은 퇴행성 신경질환으로 척수와 뇌 사이의 무슨 단백질이 감소되면서 근육이 뇌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한다. 이에 근력저하, 근위축 등을 유발한다. 신생아 만 명에 한 명꼴로 그 가운데 40명당 한 명은 유전이다. 그런데 이 치료주사가 한 대에 20억이다. ‘졸겐스마’라는 정맥 주사로 병의 진행을 막고 치료까지 된다고 한다. 척수성근위축증은 아이가 팔다리 마비, 얼굴근육저하, 혀근육저하 등의 장애를 가져오고 호흡곤란으로 2년 이내 사망할 수 있다. 그나마 올해부터 의료보험이 적용되어 598만 원만 본인부담으로 내고 나머지 19억 8천여만 원은 의료보험공단에서 부담한다. 그 비용이 커서 이도 제도도 한시적으로 14명에게만 실시, 올해에는 일곱 명만 적용된다. 여섯 명이 맞았고 한 명만 이제 혜택을 볼 수 있다.
질병의 심각성을 알아야 치료제에 대한 갈망이 따르듯이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구원의 중요성을 안다. 내 아이가 그와 같은 병에 갈렸다면 어떻게든 20억을 구하지 않을까? 한데 우린 죄를 사하는 값으로 십자가의 보혈이 들어서 우린 다만 믿기만 하면 무료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곧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6).”
2.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구원에 필요성도 모르지만, 구원에 치른 영생의 값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모른다. ‘세상’에 속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 달려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치료주사 20억을 감당해야 한대도 그럴 텐데, 우리 영생의 값은 죄 없는 이의 목숨과 바꿔야 하는 값이다. 이를 우리 예수께서 십자가로 대신 갚으셨다. 우린 따로 ‘본인분담금’을 내야 할 게 없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까 귀한 걸 모른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이를 알려면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 ‘그의 힘의 위력’ 곧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가 얻은 ‘출애굽’의 역사가 곧 구원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 마음의 눈이 밝으면 달라지는 것
1. 죄의 심각성을 알면 알수록 ‘그의 힘의 위력’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와 같은 고백에 저절로 나오고,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하는 고백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된다.
2. 그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 곧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을 준비한다. 이를 알고 전부를 투자하는 농부처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지금의 그 무엇도 아깝지가 않다.
3.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점점 커지고 귀하여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려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모든 것 다 걸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끝내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7).” 그때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도 할렐 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노래다. 시적구성은 두 연으로 1연은 1-2절, 선민으로서 출애굽 사건의 의의를 천명한다. 2연은 3-8절로 출애굽 때 여호와의 역사하심을 의인화하여 실감나게 살렸다.
앞서 설명한 ‘마음의 눈을 밝혀야 하는 이유’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두 가지 확신’ 첫째,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의미와 둘째, 구원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고자 한다.
1. 출애굽 곧 구원의 의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1-2).”
우린 함부로 믿음이 있다며 떠벌이기만 하면 안 된다. 과연 내가 믿음이 있는 게 맞나? 테스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른 항목을 만들어 보았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가?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114:7).”
2) 그 값어치를 스스로 귀히 여기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3) 이를 위해 자신을 복종시키며 행하는 바가 있는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9:27).”
4) 부르심에 따른 보내심의 확신이 있는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5) 주를 사랑하고 구원을 자랑스러워하며 사는가?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2).”
6) 인애를 베풀고 살고 있는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7) 천국을 사모하며 영생을 위해 주를 더 알고자 하는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2. 우리 구원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역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7-8).”
오늘 시인은 모든 삼라만상, 바다와 산과 땅을 의인화하여 자연도 그러한데 우리는 어떠한지를 알게 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계절의 변화만큼 뚜렷하고 시간의 흐름만큼 분명하시다. 살면서 이를 얼마나 체험하고, 목격하고, 감격하면서 살고 있는지? 이를 확인하고자 오늘 시편은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널 때,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또한 저들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요단은 물러갔으니(3).” 이를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4).” 곧 산과 땅을 우리 곧 주의 선민을 연결하는 대구법을 사용하여 그 어조나 어구를 연결함으로 보다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그만큼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의도적인 표현법이다. 오늘 시편은 특히 잘 짜인 한 편의 완성된 작품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고스란히 우리의 삶에서 느끼고, 감사하고, 찬송하기를 바란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가령 누가 대신 20억을 내주면서 ‘졸겐스마’ 정맥 주사로 아이의 척수성근위축증을 치료할 수 있게 한다면 평생 고마워하고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며 살지 않겠나? 하물며 우리 영생의 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어주신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우린 과연 얼마나 이를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그뿐인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9).” 하시며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하고 그 은혜로 채우시고 돌보아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이를 실감하며 살고 있는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 하나님의 사역은 오늘도 우리가 이를 삶으로 증명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나오는 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우리의 구원은 그 값이 어마어마하다. 이를 단번에 예수의 보혈로 사하시고, 나아가 영원한 삶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 놀라운 은혜에 따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 행여 ‘롯의 처’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신앙이 없거나 무뎌져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눅 17:34).” 이래도 알지 못하고,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5).” 저래도 알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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