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1:20-2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편 149:4
축복의 상징적인 인물이면서 또한 고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욥의 이야기는 대할 때마다 벅차다. 저는 다윗 이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자랑할 만한 자이었다. 그의 삶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5).” 늘 주를 경외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그 삶을 유념하는 자이었다.
그런데 다음에 전개되는 다소 어리둥절한 전개는 사탄의 간교와 이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그럴 때 드러나는 사람의 연약함은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가족과 건강과 정신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들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죄 가운데 떨어진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것 같이 엎친 데 덮치고 설상가상으로 일은 일에 꼬리를 물고 고통을 더한다. 한꺼번에 그 부유하였던 가산이 몰락하고 자녀들이 한 날 한 시에 죽고, 육신의 질병과 아내의 떠남을 겪어야 했던 욥은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핍박 받는 자, 미움 받는 자’가 되었다.
한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곳이 저가 살던 곳이다. 저는 “우스 땅에” 살았다(1). 정확히 여기가 어딘지 모르나 학자들은 아라비아 사막 북부지역 어디쯤, 에돔의 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생활을 비추어 시대적인 배경은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시대쯤으로 보인다. 족장의 시대에는 아직 선민도 선민을 위한 약속의 땅도 구분이 없었다. 다만 죄가 범람하는 시대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 하고 저에 대한 소개가 전부이다.
이를 유추하면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죄악이 관영하던 시대였고, 또 하나는 그런 가운데서도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저는 의인이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5-6, 8).” 그러한 때에도 노아와 같이 욥과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든지!
오늘 욥을 허구적인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은 이를 바로 잡는다. 먼저는 에스겔이 이르러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4:14, 20).” 하고 연거푸 저를 언급한다. 또한 야고보 사도도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하며 저의 이름을 정확히 거명하며 실질적인 인물인 것을 밝힌다.
아마도 저를 허구적인 인물로 생각하는 까닭은 그 와중에도 보인 저의 신앙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한데 그 사이에는 시간이 포함되어져 있다. 먼저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20).” 저는 고통스러웠고 괴로워하였다. 하지만 저는 그 고통과 괴로움으로 주를 부르고, 주께 호소하고, 주 앞에 탄식하였다. 같은 구절 말미에 저는 그러한 괴로움으로 ‘엎드려’ “예배하며”가 이를 방증한다. 하며, 저는 주 앞에 고하되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21).” 물론 이와 같은 신앙과 그 자세는 저의 본성과 그 삶이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왜 저라고 슬프지 않고 괴롭지 않고 원망과 절규와 한탄이 그 속에 일어나지 않았겠나? 다만 이를 겉으로 발산하여 자신을 가학한다거나 남에게 겨누어 탓을 한다거나 하지 않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문제로만 국한지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다.’ 하는 놀라운 고백만이 저의 입 밖으로 나올 뿐이었다. 마치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몸을 피할 때 한 주먹도 안 되는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면서도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하고 이것까지도 여호와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과 같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여러 대목이 마음이 와 닿지만 그 가운데서도 욥의 받아들임, 곧 ‘주를 경외하는 자로서의 순응’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순응은 어떤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적응하는 것이다. 이를 욥의 버전으로 해석하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21).” 이것이 곧 우리가 취해야 할 순응이다.
다소 이와 같은 말씀은 당황스럽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와 같은 순응이 모든 재산을 잃고, 열 자녀를 앞세우고 난 뒤에 할 수 있는 소리이겠나? 그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한 자로 살고자 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바울도 베드로도 어떤 자들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예수를 부정하던 열심당원이었던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 한낱 무명의 고기잡이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를 만남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저는 '반석'이 되었다. 곧 우리는 모두 자신을 돌아볼 때 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자’의 특색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달라진 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주를 경외하는 사람이란 '복 있는 자'로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오늘의 나를 비춰보면 그 상태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어떠한지…. 어느 정도인지…. 어디까지 왔는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1-24).” 곧 예전에 좋아하고 즐기던 것들을 더는 멀리한다. 악을 악이라 여기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듯 행하던 것을 더는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미워한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37:9).
가령 난 어제 누구에게서 전화가 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며 받지 않았다. 때론 그리움에 또는 어떤 추억에 젖을 때 저를 늘 떠올린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저와의 대화나 안부를 묻는 일에서조차 마음이 어려워진다. 전에는 모든 일에서 저의 조언이 또는 저와의 만남이 즐거움이고 기쁨이었는데… 나는 저의 이름이 뜨고 전화가 울리는 것을 가만히 보면서 그러고 있는 나를 이상히 여겼다. 어떤 사람뿐 아니라 기호나 즐겨하던 일에서도 전에 같으면 그것으로 위로를 얻고 회포를 풀곤 하였던 것이 이제는 낯설고 어렵다. 그 이유가 무얼까? 성경이 말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그리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 14:8).” 이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래서 누가 나더러 광신자라 한다 해도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그렇다고 나는 결코 욥의 신앙을 감히 흉내 낼 수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주어진 오늘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순응함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이 또한 나의 능력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를 시편으로 노래하며 찬송하면,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149:1).
여러 신기한 일 가운데 하나는, 전엔 몰랐는데 성도의 모임 그 만남과 안부를 나는 반가워하고 있었다. ‘새 노래’는 날마다 매순간의 새로운 날이면서 새로 관계가 형성되는 ‘성도의 모임’으로 연결된다. 단지 새 시대, 새 역사, 우리가 꿈꾸는 나라에서만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를 서로 아는 사람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2).
곧 ‘성도의 모임’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시온의 주민’들이다.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너와 나이다. 교회 안의 우리이나 전부는 아니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또한 전부는 아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가령 우리 교회가 그 교인 수로나 헌금으로는 교회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한 수치인데도 그때마다 후원하는 손길과 마음과 기도로 합력하는 이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때 누가 (저의 형편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닌데) 적잖은 금액을 교회 계좌로 입금한 것을 나중에나 알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어찌 그럴 수 있었는가 물었을 때 한 말, ‘내가 한 게 아니라 내 안에 소원을 주신 이가 하게 하신 일’이라며 오히려 민망해하여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때 우리의 감탄은 저절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2).
주가 나를 부르셨고, 주가 이 교회를 세우셨다. 내가 누구보다 나아서도,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나은 게 있어서도 아닌데… 그래서도 내가 굳건히 붙드는 사실 하나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오늘의 욥의 고백을 사랑한다. 나를 부르신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교회가 더는 유지되기 어려운 날까지… 나는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순응은 곧 순종의 몸짓이다. 마치,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3, 5).
그리하여,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6).
이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뿐이고, 그것이 무던히 누구를 마주하고 사랑하는 일이든지, 묵묵히 내 자리와 시간을 시간을 지키는 일이든지…….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86:12-13).
하여 나는 이제 안다. 앎으로 그저 감당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저마다 주신 은혜가 다르고 맡기신 사명이 다르다면, 나는 노아와 같이 같은 날의 반복을 기도로 여길 따름이다. 그렇게 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하면,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0) | 2022.11.29 |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0) | 2022.11.28 |
그를 찬양할지어다 (0) | 2022.11.26 |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0) | 2022.11.25 |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0) | 2022.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