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전봉석 2022. 11. 29. 05:03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기 3:24-2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극도의 고통이 저로 독백하게 하였다. 욥의 이와 같은 읊조림으로 친구들과의 논쟁이 시작된다. 독백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다. 혼잣말이다. 생각과 같다. 하지만 이는 곁에서 같이 슬픔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친구들로 인한 읊조림 같은 것이다. 욥은 괴로움으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다. 사산되어 나지 못한 것을 탄식한다. 고통스런 삶의 연장을 회의하고 탄식한다. 후에 이어지지만 이럴 때 친구들이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라게 하였더라면… 그런데 친구들은 현세적인 시각으로 이 말에 응수하듯 인과응보적인 주장으로 저의 말을 조목조목 따지게 된다.

 

결국 욥의 독백은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다. 곧 죽음을 안식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극심한 고통으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마음의 방향은 탄식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순화는 긍정보다 부정이 더 많아서 그것으로 익숙한 영혼이 절제 없이는 무엇도 이룰 수 없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서 절제를 맨 뒤에 놓고 사랑을 맨 앞에 놓은 의미를 여러 번 묵상해도 같다. 사랑이 끌어가고 절제가 밀어줘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열매 하나하나에 사랑과 절제가 동시적이지 못하면 완전하지 않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도 절제 없는 사랑은 집착이고, 절제 없는 희락은 쾌락에 불과하고, 절제 없는 화평은 안일한 회피와 같고, 절제 없는 오래 참음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절제 없는 자비는 위선에 가깝고, 절제 없는 양선은 위선을 떨게 하고, 절제 없는 충성은 간신으로 만들고, 절제 없는 온유는 방관자가 되게 한다. 하물며 절제 없는 절제는 자학에 이를 뿐이다.

 

여기에 사랑의 견인이 없으면 사랑 없는 사랑은 자기만족을 유발하고, 사랑 없는 희락은 소비적이며, 사랑 없는 화평은 타협이며, 사랑 없는 오래 참음은 자기 신념이 되고, 사랑 없는 자비는 허세나 위선이고, 사랑 없는 양선은 일시적인 감정의 만족이며, 사랑 없는 충성은 무자비하며, 사랑 없는 온유는 무책임하고, 사랑 없는 절제는 아집일 뿐이다. 사랑은 곧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곧 절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순종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이를 베드로 사도는 곁에서 보고 후일에 가르칠 때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곧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하는 믿음과 신앙의 덕목으로 담았다.

 

그 믿음에는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덕을, 남을 생각하는 덕에는 바른 지식을, 그리고 말씀을 바로 아는 지식에는 바로 저 절제를 더하였다. 잠시 여기서 끊고 보면, 안다고 하는 지식에 절제가 있지 않으면 과잉이 따라 붙는다. 가령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마다 과잉이 붙는다면 순간 그것은 열매 같지만 썩은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위선과 가식으로 카펫 밑에 숨겼다 해도 냄새는 어쩔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절제는 또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인내는 경건에서 오는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생겨나는 인격이다. 경건은 혼자 우아한 게 아니라 형제우애라고 하는 실질적인 생활의 현장에서 지긋지긋하게 겪는 일들 가운데서 이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인 것처럼 형제 우애에는 반드시 사랑이 따른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극도의 고난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독백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1).” 이어서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2).” 연거푸 이를 강조하는 덴 긴 침묵과 함께 저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음을 두 번씩이나 강조했던 앞서 1, 2장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2).”,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2:10).” 이러한 데 따른 오늘 3장의 첫 강조점은 사람으로서의 인내와 절제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저는 결코 의인이 아니다. 노아도 결코 스스로가 의인은 아니었다. 은혜를 입었음으로 의인이다. 우리도 같다.

 

실제 성경의 강조점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고 분명히 명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인인 까닭은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3:23-24).” 이를 분명히 하여야 오늘 욥의 한탄과 절규에 동감하고 앞으로 이어질 저들 친구들과의 무수한 논쟁에 나 자신도 화자로 참여할 수 있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일체의 죄가 없으신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의인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 1, 2절의 강조점은 말의 절제가 얼마나 우리의 영적인 삶에 지배적인가를 알게 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아니면 아니다, 옳으면 옳다 하면 된다. 덧붙이는 말에서 악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유독 정치 이야기를 누구와 나누지 않는다! 또한 얼굴에 웃음보다 수심을 담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이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전 7:3).” 또한 말에는 굴레 씌우는 게 최고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곧 실 없는 소리, 웃자고 한 말, 농담, 빈말 따위가 우리로 채신머리없게 하는데, 채신머리없다는 것은 채신없다는 말로 신망을 잃게 하고 그 행동을 경솔하게 하게 한다. 웃자고 한 말은 남을 떠보는 것이며, 농담은 진심을 은폐한다. 그리하여 말이란 아끼면 아낄수록 지혜가 쌓인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7).” 그러므로,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시 10:7).

 

그렇다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그래야 하는데 그러기가 참 어려운 것이 감정은 항상 입을 먼저 벌린다. 욱, 하고 내뱉는 말은 후회뿐이고, 홧김에 한 말치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없다. 훗날에 우리 힘으로 이 모든 말들을 주워 담아야 한다면 그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를 은혜로 없이해주지 않으시면 영원히 자신이 쏟아낸 저주만 들어야 한대도 치가 떨린다. 이를 차단하고 단속할 수 있는 것은 감사뿐이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5:4).” 아주 작은 일 하나하나에 감사하면서 누추하고 어리석은 말을 줄여갈 수 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하기 나름의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문제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누군들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불행을 멀리하지 않겠나? 그렇게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도 턱, 턱, 가로막는 것이라면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처사는 하나뿐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이 글을 쓴 솔로몬은 누구보다 이를 회피하고 저를 추구할 줄 알던 사람이다. 그에게 주신 지혜로 이를 인위적으로 누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러했던 저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곧 우리의 어떤 노력도 헛되고 헛되다. 주의 은혜가 아니시면 모든 게 다 헛되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욥이 열거하는 저의 탄식을 일일이 거론할 마음은 없다. 저의 그러한 심정이 때론 내 것과 같아서… 나는 종종 이런 내가 목사로서 이 사명의 길을 계속 가도 되나?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인성검사에서 목사안수 부적격판정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그때도 3차 시험 후 면접에서 이 사람을 어쩌면 좋은가? 하는 표정으로 면접관이었던 원로목사의 물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번에도 안 되면 다음에도 또 응시할 것입니까? 할 때 나로서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네! 그러니 계속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을 더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확신하고 있던 것은 이런 나를 뻔히 알면서도 여기까지 오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면, 굳이 꼭 목사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다시 응시하고 떨어지고 다시 응시하고 떨어지고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기어이 하나님의 일을 하실 테니까! 그렇게 해서 2013년 4월 22일 목사안수를 받았다. 나는 이 패를 옆에 두고 자주 본다. 솔직히 영광스럽기보다는 여전히 부끄럽고 똑같다.

 

모르겠다, 오늘 욥의 말을 부정적인 저주의 말로 받아야 할지, 어떨지… 나 또한 다르지 않을 때가 많아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그때 그 원로 면접관 목사는 딱한 눈빛으로였는지, 가상하다는 눈빛으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한참을 말이 없이 나를 응시하였고, 나는 그 시선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물러설 곳이 없었고, 죽이시든 살리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라는 심정이었는데, 지금도 나의 하루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71:20).

 

아니면 그 또한 어쩌겠나? 한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최소한 내가 참새만 못하겠나? 고난은 사탄의 상투적인 공격이다. 당하면서도 굳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 13:14).” 그리하여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이 소망이 어디서 생겨나는가 했더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그렇다면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 뒤로 나는 나의 약함을 사랑한다.

 

싫고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욥의 탄식과 절규와 같이 나로 우울하게도 하고 저주하게도 하지만… 신기하기도 하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즉,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7).

 

이처럼 나로 말씀 앞에 자꾸 앉히는 것이 실은 평안함 때문이 아니라 고통 때문이고 하면? 오늘까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하는 심정이 은연중에 나를 붙들게 하신다. 궂은 날씨에 몸은 아우성이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빈맥은 저 혼자 요동쳐서 때론 불안이 또는 공포가 나를 우울의 늪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지만, 그래서 오늘은 설교원고만 쓰고… 이 새벽에 눈을 떴으니, 여기까지만… 하는 마음을 감히 주를 사모함이라 말할 수 있을까? 분명히 하나님은 또한 피할 길도 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은 다시 또 시편 1편으로 시작한다. 모든 말씀을 시편으로 연결하여 묵상하는 것은 주를 찬송하는 것을 빼면 성경은 박물관으로, 그 말씀은 격언으로 전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편을 산다는 것,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이가 창세전에 미리 예정하신 일이다. 나는 그리 확신하는데 이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길뿐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주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손에 쥔 걸 붙들고도 주를 따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23).” 그렇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가질 거 다 갖고 누릴 거 다 누리면서, 천하의 솔로몬도 그 말로가 불쌍하게 되었다.

 

복 있는 사람은 결국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왜 야고보는 욥의 인내를 꼽느냐하면 주께서 주실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악이란 결국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서이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2).” 그러니 어쩌겠나? 세상을 등지고 살 수도 없고… 다만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할 뿐인지 되새겨 알면 알수록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그래서 우리는 악인들과 다를 바 없는 거 같으나,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3-4).

 

우린 서로 뿌리가 다르다. 같이 푸르러 그게 그거 같다 해도 저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사라질 때 우린 시냇가의 나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래서 욥은 후에 변론하기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욥 21:23-26).” 서로 같으나 다르고, 다르나 같은… 그리하여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4-5).

 

이와 같은 결말을 말씀은 누누이 강조하고 우리는 이를 주야로 묵상하는데,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래서 오늘도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그 놈이 그 놈 같지만 본질상 다르다. 결국은….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