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욥기 5:27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시편 3:4
욥의 나이 든 친구 엘리바스의 말이 이어진다. 고난이 악으로부터 온다는 저의 말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한다는 욥의 말에 대한 반론이다. 결국 엘리바스의 주장은 경험에 따른, 연구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욥 5:27).”
다 저녁에 누구와의 통화가 생각난다. 운전을 하다 갑자기 죽을 사람처럼 예전 일들이 떠오르면서 뜨거운 눈물이 퍼부었고, 저는 흐느껴 울다 이것이 회개라고 말하였다. 이후 누구에게 물어 하나님에 대하여 배웠고 저는 이를 따른다고 하였다.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눌 통화도 아니었고 저의 경험은 스스로의 말처럼 신기한 것이어서 뭐라 이른들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달리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다르다. 이상하게도 ‘~에 대해’ 아는 것을 더 고집한다. 이는 마치 엘리바스의 주장 같다. ‘~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을 굳이 주장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 오늘 엘리바스가 보이는 말과 그 행태는 스스로 표현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연구하여’ 아는 것‘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나는 이를 경험과 실제의 한계라고 본다. 경험은 그리 겪은 어쩌다의 일이고 실제는 늘 그러한 일상이다. 간증이 당사자가 듣는 이를 혹하게 하는 것도 실은 어쩌다 그리 된 일의 놀라움 때문이다.
예수님을 들어서 아는 사람과 같이 겪으며 아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제자들이 확신하는 바는 여느 사람들이 들어서 아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를 내 아버지에 대해 들어서 아는 사람보다 확신하는 것은 누가 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보다 확실한 것과 같다. 간증은 일시적이고 일상은 실제적이다. 누구를 아는 것과 누구에 대해 아는 것의 차이는 크다. 오늘 엘리바스의 말은 대부분 옳다. 어떤 것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누구의 신기한 경험을 듣고 같이 공감하면서 그럼 요즘은 어디 교회에 다니시냐? 하고 물었더니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또 한참을 하나님에 대하여 그러나 믿기는 한다는 말을 연거푸 강조하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마무리하며 전화를 끊었다. 물론 새삼스러운 통화였고 하나님이 무슨 계획이 있으신가? 하고 혼자 고개를 갸웃하다 집으로 갔다.
실제 ‘그런 말’ 곧 일상의 말과 이론의 말은 마치 오늘 엘리바스의 첫 구절의 주장처럼 맹랑하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1).” 저의 이 한 마디가 그 뒤에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주장들을 허무하게 한다. 어쩌면 저가 시편을 모르거나 시편을 살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께는 어떤 말을 아뢰어도 된다. 못할 말이 없다.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하였는데,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간구하면 소용없다는 말이 아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다 보면 정작 염려를 가지고 엎드렸는데 그 염려가 더는 염려거리가 되지 않는 식이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하는 말씀을 비추어도 엘리바스의 질문은 그 자체로 이미 조롱이 섞였다. 물론 분노와 시기의 감정으로는 기도가 나오지 못한다. 엘리바스의 다음 말이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2).” 하지만 이는 경험하지 않아도 격언이나 속담 정도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저는 이와 같은 보편적인 주장을 근거로 하여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3).” 하고 은연중에 자신의 허점을 드러낸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3-4).” 그래서 여린 자가 용사보다 낫다고 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3).” 그래서도 간증은 하는 자나 듣는 자나 가려서 하고 들어야 한다. 감동은 순간이고 감각은 늘 따른다. 그래서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20:22).” 하고 지혜자는 더하여서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듣고 말면 잠깐인데 화를 내면 더 마음이 오래도록 상하기 마련이다. 누구에 대한 미움을 안고 주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도 말씀 앞에 자신을 앉히고 들어야 한다. 하다못해 상담의 기본도 듣는 데 있고 위로의 절반은 가만히 있는 것으로도 족하다. 우리가 망하는 이유는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해서이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렘 11:8).” 실제 당하는 일의 대부분은 자신이 했던 말이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래 맞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하였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6).” 하고 자조적인 말로 고개를 흔든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시 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4:3).
결국 우리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듯 누구도 알 수 없다. 함부로 속단하고 판단할 것이 없다. 무서운 것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그러니 스스로 자중하고 주 앞에 경건하기를.
나는 종종 내가 늘 주께 받는 은혜가 남다르다는 것에 혼자 놀란다. 굳이 누구의 어떤 일을 두고 견주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늘 그렇다는 것이다. 곧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롬 4:6).” 이로 연상하게 되는 이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스스로 의롭게 될 사람은 없다는 소린데 이는 모두가 다를 게 없지만 <이신득의> 교리의 바탕이 된다. 앞서 3-4절에 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3-5).”
이를 나만큼 실감하고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종종 내게 더하시는 은혜가 염치없고 죄송하기까지 하다. 앞서 누구의 말마따나 신기한 경험으로 치면 나는 그게 삶이라 굳이 뭐라 더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어제도 실은 교회 임대료 내는 날인데, 다소 병적으로 나는 그 날짜를 지켜야 한다. 한데 하루 이틀 전에 얼마 있던 것마저 써야 해서 교회 통장에 달랑 만원이 남아 있었다. 딸애가 월급을 받고는 십일조헌금을 부쳐서 그 모자란 돈을 딸애에게 꾸어서 우선 임대료를 맞추었다. 저녁을 먹고 가정예배를 드리려는데 누구의 카톡이 들어왔다. 기도해주어서 신랑이 공인중계사시험에 합격했다며 감사헌금을 조금 드렸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어찌 되었나? 하고 궁금한데 묻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저를 축하하고, 저녁예배를 드리고 무심히 교회 통장을 열어보았더니, 딱 그만큼…!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에누리가 없으시다. 나를 잘 아시니까, 신대원 때도 그렇고 무모하고 교회부터 덜컥, 시작하고 난 뒤에도 늘 그렇고… 그러니 나는 누가 어떤 간증으로 혹은 경험으로 놀라워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나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이는 오늘 시편의 한 구절 같이,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4).
곧 나의 하나님을 나의 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 특권으로 저는,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이는 모세가 선창하고 이스라엘이 따라 부르는 찬송이다. 다윗 또한 원수를 피해 다니면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2).
하는 노래가 어디 아무나의 것이겠나? 그야말로 때론 참 사는 게 지옥 같다. 다들 이래저래 애쓰지만 어렵게들 산다. 사느라 사는데도 그 삶이 고단하기만 하여 애곡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종종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도 저의 삶이 기구하여서다. 한데 나는 ‘아브라함’과 같이 한 게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일 안 하는 자’, ‘일 못 하는 자’인데도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구구절절 오늘 엘리바스의 말이 다 옳은데도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구의 간증이 혹은 희한한 경험이 크게 놀랍지 않은 것도 그것이다. 어제는 가정예배 후에 장모의 이런저런 말을 듣게 되었는데 물론 다 수차례 들었던 이야기다. 당신이 신내림을 받은 여동생을 따라 중곡동에서 5년을 살던 때의 이야기다. 그때 우리가 여러 날 기도하다 대책을 세워, 경찰을 앞세우고 두 양반을 정신병원에라도 넣는다고 강압적으로 밀고 들어가 구하였던 이야기다. 돌아보면 그때가 항상 신기한지 무슨 말 끝이면 늘 그때 이야기다. 하긴 우리에게 가장 신기하고 놀랍고 희한하고 기인한 경험이라면 예수 앞으로 돌아온 것이지 않을까? 어쩌다 우연 같지만 그보다 시끄럽고 이상한 일은 또 없다.
곧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 15:6-7).” 왜 하필 그게 나인지 우린 알지 못한다. 다만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그건 결국 자기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기가 전하는 모든 이를 향한 이야기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이 놀라운 사실은 사역이고,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남은 생을 다해야 하는 목적이다. 그리하여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6).
이것이 나의 간증이고 찬송이고 일상이다. 소소하고 지극히 사소한 모든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가 개입하신다. 그러할 때 어떤 환난 중에라도 우리에겐 ‘나의 목소리’로 부르짖어 아뢸 수 있는 ‘나의 하나님’이 계시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1-2).
이 시는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이다. 그런 상황에 이런 노래가 나올까? 싶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
그러니 우리가 남다른 것이어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면 다른 무엇인들 나를 어쩔 것인가? 우리에겐 이미 주어진 결론이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다들 사느라 지옥인 것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어서일 텐데,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시는 이가 나의 아버지시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89:26).
그러니 무엇이 어떻다 해도 고작 그래봐야 세상이고, 여기서의 일일뿐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끝이 난다. 그때그때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아무리 세상이 어쩌니 해도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10).”
이제는 누가 전화해서 별 일 없으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허허, 웃으면서 날마다 별 일이다! 하고 대답한다. 늘 들어앉아 혼자 책 보고 글 쓰고 누구 전화 받고, 하고 그러다 들어가 자고 또 일어나 나와서 이처럼 말씀 보고 글 쓰고 하는 일이 전부인데… 하는 일도 없이 나야말로 자꾸 의롭다하시니, 누가 카톡 말미에 고맙다고 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고 얼굴만 화끈거린다. 그렇게 머리를 숙일 때 주가 내 머리를 드시면서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뜨거운 눈물이 먼저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4-5).
주가 내게 더하시는 평안이 과분하다. 할 때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9-11).” 살면서 사느라 사는 동안에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시는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이다. 그러니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6-7).
이렇게 당당히 또는 뻔뻔하게 바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4-25).” 동생들 일로, 그들 사역과 그 가는 길의 고단함을 두고 마음이 어려웠다. 장모와 아내와의 일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다. 아, 고단하다 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 이처럼 일찍 나를 깨워서 부르시더니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하고 속삭이신다. 하는 일도 없고, 할 줄 아는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부끄럽기만 한데…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2-3).”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이 되었을 때,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7).” 하신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11).” 이에,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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