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전봉석 2022. 12. 3. 05:01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욥기 7:17-18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편 5:1

 

 

슬픔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다. 저는 엘리바스의 말에 반박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기도가 되었다. 인생의 허망함과 고달픔에 대해 말하다 본문 7절부터는 주께 아뢰는 말로 바뀐다. 우리 믿는 자의 같은 방향이 아닐까? 결국은 주께로 향하는 마음, 오늘 다윗의 노래도 슬픔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7:2-3).

 

우리는 주께 향한다. 주를 필요로 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겠으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리하라고 이 귀한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셨다. 날마다 금이 가고 깨지고 항상 주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39:5).

 

둘러보면 모든 게 그러하고 인생사 다들 다를 게 없다. 아침 일찍 친구는 교회 어느 권사님 남편분의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머니와 시간을 맞추느라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하였다. 이제 예순 초반의 나이에 무슨 병이다 하고 진단을 받고 채 1년여 만에 데려가심을 받았다. 교회에 열심이고 서로 교제가 두터웠던 터라, 늙으신 모친의 상심이 크실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요즘의 60대면 한창인데, ‘우리 날이 한 뼘 길이만 못하다.’ 그러할 때 우리의 가장 귀한 고백이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그것이다.’ 우리로 그리 살 게 하신 귀한 보배를 가졌다. 살면서 사는 동안에 우리는 얼마나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던가? 어려서는 공부하느라, 나이 들어서는 일하느라, 늙어서는 어디 아픈 데를 견디느라… 사는 게 다들 고역이라. 이를 솔로몬은 이 모든 게 주가 하시지 않으면 허사인 것을 노래하였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2).

 

그러므로 편히 누워 잠드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7-8).

 

우리가 결국은 주를 바란다는 것이 그가 더하시는 평안으로 우리가 산다.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렘 31:25-26).” 상대적으로 우리가 누리고 산다는 이 땅에서의 영화와 안락이 얼마나 허무할 뿐인지를, 욥은 이를 알게 하시는 인물로 세우셨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욥 7:1).” 다들 사느라 사는 데 빠져 산다고 산다. 마치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2-3).” 저마다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날들이다.

 

아, 그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4-6).” 저의 말에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생이란 그러할 뿐인데 우린 서로 무엇을 그토록 바라면서 사는 것일까?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이를 알면 알수록 주께 향하여 주의 말씀을 붙드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5).”

 

시간은 광음 같다는 말, 낮과 밤이 오고가는 일처럼 사소할 뿐이나…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90:4-6)

 

그렇듯 오고 가는 인생이란 게 고작,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0).

 

그나마도 훌쩍 날아가고 없다. 이에 말씀은 우리를 붙들고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늙으신 장모를 모시고 살면서 저의 날들이 한낱 읊조리면 그만일 뿐이었던 것에 놀리고는 한다. 이제 곧 아흔을 바라보면서 저의 말끝이 향하는 것은 하나가 아닐까?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 4:5).” 지혜란 주를 알고 바라는 것, 우리가 바라고 향할 곳은 저 영원한 나라인 것을.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있어 저만치 보이는 푯대가 그곳이지 않겠나? 곧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 저마다의 꿈이 있고 낭만이 있었으나 지나오면서 모든 게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서정인의 소설 <강>에서도 말하고 있었다. 그렇듯 살 소망이 없는 곳에서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하여,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2, 3).

 

바울도 그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이를 오늘 욥의 기도로 다시 들어보면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욥 7:13-14).” 그리하여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16).” 그러한 저의 고통의 날이 저로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17-18).”

 

주의 은혜가 참으로 귀하다. 이처럼 주 앞에 나와 말씀 앞에 앉으면 주가 들려주시는 소리에 나의 영혼이 쉼을 얻는다. 이를 오늘 다윗의 시로 그대로 이어보면,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5:1-2).

 

기도하게 하심은 인생을 보고 위로를 얻을 길이 없고, 사람으로는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이러한 마음 곧 깨달음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게 하신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33:15).

 

그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키시고 감찰하신다는 것에 안도한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처럼 말한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그런즉 이제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하니라(대상 28:9-10).” 이를 바울도 알고 있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곧 우리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을 아시고’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이면 서둘러 주 앞으로 달려와서 엎드린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3).

 

곧 나의 악함과 약함과 부족함을 아시오니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서로가 그 마음을 들추어 다 볼 수 있다면 살 수가 없을 정도로 추하고 악한 것들 뿐이어서…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46:5).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59:16).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88:13).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119:147-148).

 

그리하여 오늘 시편의 노래와 같이,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5:7).

 

눈을 뜨면 서둘러 주 앞에 나와 먼저 말씀 앞에 세우는 것도, 그렇지 않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어서이다… 어쩌면 결국 주 앞으로 나오는 것은 막다른 길이어서 안심이다. 비로소 안도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하루라도 못 보곤 못 살 것 같던 선생의 전화가 들어오는데도 나는 망설이다 이내 받지 않았다. 동기들이 단체방을 만들어 서로들 반가움에 이런저런 말이 오갈 때도 나는 슬그머니 그 방을 나왔다. 더는 바랄 것이 없다는 말, 의지도 위로도 삼을 수 없는 것을 두고 너무 많은 시간을 헛되이 사랑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우리 주님은 긍휼하심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