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전봉석 2022. 12. 16. 05:34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욥기 20:2-3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시편 18:29

 

 

 

친구 소발의 두 번째 변론이다. 엘리바스와 빌닷에 이은 그의 주장은 다른 내용이 없다. 악인은 멸망한다는 소린데,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4-5).” 평이하고 상식적인 말이다. 스스로 이르길,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하고 자신을 일컫는 말과 같다(2). 저의 말처럼 저는 욥의 말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자신을 스스로 일러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하고 어쩔 수 없이 말한다는 식으로 교만하다(3). 이어지는 주장은 악인이 번영할 수 없는 지극히 일시적이고 허무한 존재란 주장을 늘어놓는다(4-11).

 

저의 말에 부끄러움이 드는 이유는 무얼까? 때론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하는 의혹이 들 때도 있다. 스스로의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곧 우리가 구할 지혜는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하다. 한데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곧 교만이 갖는 폐단은 자신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산다는 것을 오늘 시편의 한 구절로 표현한다면,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시 18:29).

 

주를 의뢰하고 의지하고 달려간다는 것으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바울의 외침이 귀에 우렁찬 것 같다. 이는 순종으로 나타나서 말씀을 받고 행함으로 의를 이룬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곧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 구원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은 속에 숨기고 사는 수치심의 연장이다. 다시 말하면 이로써 주의 진노가 더욱 우리에게 임하신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서로 간에 별 것 아닌데서 감정이 상하고 억하심정이 일어나는 것도 실은 다 자존심의 문제다.

 

소발의 오늘 말들은 그 시작이 벌써 스스로의 말처럼 걸림으로 의미가 없다. 지혜자는 이를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잠 2:5).” 벌써 그 길을 예단한다. 그럴 것이다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 즉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처하는 수가 있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렘 2:35).” 하나님은 이를 싫어하신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우리로 통회하게 하는 마음이 곧 주를 인정하게 한다. 누구의 공격에 비굴해지란 소리가 아니다. 다만 헛되이 말씀을 받으면 자존심을 가지고 경배를 하여 헛될 뿐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 15:9-10).” 이를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영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은 배운 게, 아는 게 오히려 걸림이 되기 십상이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자신이 안다는 것으로 어디 출신, 무슨 공적을 가지고 가는 마음에는 순수하게 들을 수 있는 귀가 너무 높다. 괜히 지적인 교회는 그래서도 배타적이다.

 

가령 누가 어느 교회 제자훈련 선생으로 지내다 어느 교회로 오게 된 모양이다. 목사의 설교부터 성도들의 교회 생활이 자기 보기에 맞지 않았는지, 사사건건 트집이다. 그러면서 늘 되새기는 게 자신이 배웠던 곳의 이런저런 것을 빗대어 설교를 또는 성도 간의 교회 활동을 간섭하고 문제 삼고 심지어는 그래서 교회가 어떻다는 하며 말에 말을 얹는 모양이다. 일찍이 바울은 정리하듯 말하였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고 무딘 도끼는 날을 벼리지 않아 치는 이도 고생이고 받는 이도 아프기만 하다. 오늘 소발의 말에서 그런 생각만 들었다. 저는 후반부에서 악인의 축재한 것이 헛된 결말을 가져온다고 말한다(12-22). 듣다보면 자신을 향한 소리 같다. 더욱이 그런 악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23-29). 그러면서 자신은 이를 말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서운 게 습성은 본성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예외인 경우가 없다. 곧 내가 누구에게 뭐라 할 때 이 말씀을 거울 삼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썩을 구습에 매여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우린 다 별 수 없다. 누가 누굴 뭐라 할까?

 

이런저런 마음으로 시달리다 그게 다 자존심이 상한 결과라는 데서 또 한 번 나의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오후께 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이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쩜 이리도 나아지지 않을까? 내 자신의 본 모습 앞에 망연자실 할 뿐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2-5).”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큰 교훈을 더한다.

 

여기서 바울의 진심어린 자기성찰이 눈물겹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나를 속이고 나를 죽이는 게 실은 나의 자존심이다. 스스로 옳다 여기며 사는 윤리고 도덕이고 이상이고 아성이다. 고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 곧 우리 속의 죄의 속성은 여전하여서 이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이 고되고 힘에 겹다.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게 그렇게 어렵다. 덕망 높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로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너무 냉철하여 차가운 사람은 결국 자신이 춥다. 누구 같잖은 사람의 말에 앞서는 저의 판단이 무서운 것이다. 어느 집사 내외의 교회 합류가 기존 교회를 뒤흔들고 있는 것도 그런 거였다. 누구의 어려움을 들으며 그렇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저의 난처함이 이해는 갔다. 성경의 경고는 무섭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이는 어려운 말씀인데 의외로 쉽고 간단하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 다소 자기 성에 안 차더라도 이에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것이 인격이고 성품이 된다. 안 그러면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합 2:9-10).” 부디 함부로 아는 것이라 여기지 않도록. 좀 낫다 생각하지 않기를. 이는 하나님 앞에 가소로운 것이어서 하나님은 차라리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11).”

 

그러므로 오늘 시편은 주께 아뢴다. 이는 다윗이 지은 것으로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주 앞에 부른 찬송이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1-2).

 

이를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자는 그 삶의 사소함에서도 주의 돌보심을 누린다. 가령 여러모로 어려운 시국이라 더욱이 사역자로 사는 가정의 이런저런 일에 마음이 자주 쓰였다. 누가 그의 딸이 예고에 입학했는데, 아무래도 특목고라 등록금만 이래저래 2백여만 원에 매번 드는 학비도 돈 백씩은 들 거였다. 그럼에도 아이가 하고 싶어 하니까 하나님이 감당하시려는가, 하고 맡기었다. 혹시 몰라 번 다른 학교에도 합격하는 우수한 결과를 두고 그 마음이 더 어려웠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께 아뢸 뿐인데, 학교의 이러저런 제도는 물론 아이의 실력이 좋아서 등록금으로는 10만원만 그리고 매 학기에 드는 비용은 무슨 명목으로 2만원만… 그러니 그 차이가 너무 커서 혹시나 잘못 들었나? 하고 다시 묻기도 하였을 정도라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능할 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하나님은 이로써 즐거워하신다. 다른 무얼 바라시는 게 아니라는 것,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71:8).

 

우리로 이를 체험하게 하시고 간증하며 찬송하게 하시는 이가 주시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를 말로다 한들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바람이 지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가 않는다. 한데 이는 모두의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즐기신다. 그러므로 우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내가 하려고 하면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게 인생이고 주께 맡기면 주가 대신 짊어져 주시는 게 또한 인생이다. 혹시나 하고 반만 맡기면 반은 내 몫이다. 미덥지 않아 못 맡기는 만큼은 고스란히 자신이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걸 자존심으로 붙들고 살든지 수치심으로 여기고 살든지, 우리를 지으시고 모든 걸 다 용서하신 이 앞에서 혹시 견주어 내세우려 하는 모든 게 결국은 고달픈 생의 무게다. 사는 게 지옥인 까닭은 천국 문을 다 열지 못하고 혹시나 해서 닫아둔 만큼이다. 어쩌겠나? 죽이도 그게 안 되는 사람이면 죽어서야 아는 일이고,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결국은 믿음의 정도가 겸손의 정도이고 겸손의 정도가 고단한 생의 정도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25:1).” 결코 이와 같은 고백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아, 그러니 가장 가벼운 삶이라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사는 일일 텐데…. 이는 그저 선택의 문제나 개인의 삶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구원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그러므로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3).

 

더는 원수 될 게 없다. 어려움이란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4-5).” 하였어도,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

 

이 놀라운 고백이 실은 성도로서 가장 쉬운 일이다. 곧 믿음이 가장 쉽고 사나 죽으나 구원이 가장 거저 얻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공짜가 어디 있나? 한데 이를 거저 주시는 데도 그처럼 어렵다고 한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이지……. “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0-31).” 이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29).

 

그럴 수 있는 비결?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0).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다. 우리에겐 말씀이라는 엄청난 화수분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도 열어보질 못하니…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 그저 딱할 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 그러니 어쩔 것인가?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46, 4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