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전봉석 2022. 12. 17. 04:33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욥기 21:12-15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9:7-8

 

 

 

하나님을 거부하고 악인으로 죽은 영혼은 죽어서도 하나님을 부인한다. 소발의 반론에 변론하던 욥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곧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12-13).” 인생에서 누릴 것을 실컷 누리고 살다, ‘잠깐 사이에’ 지옥으로 갔다. 우리가 알기로 그때에는 후회하고 회개하며 자복하고 용서를 빌 거라 생각했는데, 저들은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14).” 하고 당돌하다. 그 상황에서도 돌이킬 마음이 없다. 주를 인정할 수가 없다. 곧 우리의 죄란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알 것 같다. 저들은 그 고통스러운 지옥에서도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15).”

 

아,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18).” 그럼에도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죄였다. 어떤 두려움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다. 그래서도 속량함을 받고 의인이 되어서도 이 끔찍한 죄성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며 바울은 절규하였구나. 이는 우리 속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와 같이 우리의 내적 싸움이 치열하였던 것이다.

 

왜 좀처럼 나아지는 게 없을까?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포도나무 가지는 살았어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스스로 답답해하던 바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곧 우리의 죄성이 그렇게도 지독하고 끈질겨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시는 말씀에서 암시하는 뜻을 알겠다. 이는 우리 몸의 죄악 됨이 그렇듯 고약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주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어 거듭난 영혼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9).” 몸을 입고 사는 동안 그렇듯 일부분밖에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도 나의 약함이 은혜였구나, 하고 인정하게 된다. 곧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왜 우리의 어려움을 두고 보시기만 하시는가를 알 것 같다. 즉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는 것을 왜 보고만 계셨는지를, 시인은 찬송한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 17-19).

 

그러니까 얼마든지 우리의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실 수 있으면서 우리로 즉자적으로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곧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동반되는 고난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이를 요셉의 진술로 돌이켜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곧 우리의 고난은 그로 인하여 우리를 정금 같이 단련하시려는 것이다. 동시에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곧 우리가 이를 알고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1-3).” 그러니까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생에서의 회개와 회심, 고백과 거듭남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우리로 영원히 살 은혜였다.

 

상대적으로 ‘저들은’ 죽어서 스올에 던져진 바 된 뒤에도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욥 21:14).” 하는, 이 끔찍한 지경에서 하나님을 명렬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15).” 이 놀라운 어쩔 수 없음과 아무 공로 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이 극렬하게 대비한다.

 

곧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 13:22).” 그리하여 헛되고 헛되다 하는 것인데 악인들은 이에 대해 알려하지도 들으려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외치기를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고 자긍하는 것이다(단 4:30).

 

그만큼 끔찍한 것이다. 우리의 죄성이란 게 얼마나 더 두려워야 하나? 속량하심을 받고도 번번이 죄를 기웃거리며,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언제든지 혹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고 바울은 그처럼 죽는 날까지 자신을 복종시키려 몸부림쳤던 것이구나.

 

이래저래 마음이 어려웠던 날, 내가 가는 길이 맞나? 하고 새삼 몸서리쳤다. 해도 해도 소용이 없구나, 하고 자신을 두고 심한 좌절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부질없는 절망이 또 한숨이 나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그게 결국 내 안의 죄성 때문이었다. 상한 영혼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를 더욱 찾거나, 주를 멀리하며 산다. 나로 주를 더욱 바라며 주만 의뢰하게 하시려고,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하는 고난의 강을 건너가게도 하신다. 그러는 동안 우리 죄의 속성이 집요하고 끔찍하게 반응한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하는 이유 있는 절규가 우리 안에 고인다. 곧 우리로 죄악에게 사로잡혀 영영 그릇된 곳으로 끌려가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징계 곧 어려움도 겪게 하신다.

 

마음이 저 혼자 그러하여서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을 뒤척거리다 일찍 교회로 올라왔다. 나로 이처럼 주 앞에 나오게 하신 것이 은혜이다. 그 자체로 복이다. 앞서 바울서신의 내용처럼,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어려움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으신다. 일찍 죽이시더라도 살게 하신다. 그러기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와 같이 주의 뜻을 이루시는 데 있어 자신까지 아끼지 않으시는 사랑으로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다. 가령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롬 11:30).” 그러면서 바울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2-33).”

 

이러한 주의 뜻을 누가 다 알 수 있을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4-35).” 아, 이와 같은 진리가 참 깊다. 오늘 우리로 어떤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 것도 그 의도하시는 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러니 그러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이를 오늘 욥은 우리에게 밝혀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욥 21:22).” 이를 다시 바울의 건축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를 우리는 측량할 수가 없다. 죄가 아무리 끔찍하고 지독하다 해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충만하시다. 용서 못하고 감당 못하실 죄가 없다.

 

다만 멸망하는 죄인은 멸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그 사랑을 거절하였다. 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저들과 나의 차이는 주를 인정하는 데서 벌어졌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9:9-10).

 

우리로 주를 알게 하심이 자연과 말씀의 계시로 열어 보이시는 세계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이와 같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4).

 

아, 이 놀라운 증거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이를 오늘도 말씀 가운데서 드러내고 계신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하여 우리는 고백하게 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4).

 

이처럼 주를 바라고 사모하는 심정이 주께 드려지기를. 하여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생활 그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기를. 그렇게 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9-10).

 

이 귀한 맛이 우리의 괴로움 가운데 감추어져 있었다. 하여,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1).

 

이로써 알게 하시려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