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전봉석 2022. 12. 18. 05:44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욥기 22:21-22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편 20:5



고난이 악행의 결과임을 엘리바스는 지적하고 있다. 저의 인과응보적인 비현실적인 주장은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그의 죄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서(4-9) 부유한 신분으로 나그네를 보살피지 않고 부정하게 토지를 소유하고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였다는 식으로 몰아세운다.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 추정으로 몰아가는 주장이다.

저의 주장에서 함정은 사람의 의나 그 수고가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곧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2-3).” 하는 소리로 욥이 당하는 고난의 근거를 죄악 때문이라 규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간다. 그러나 철학적인 궤변일 뿐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는다는 주장은 작위적이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와 상관없이 의로우시다. 자칫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의 어떤 의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안 되고 할 수 있다는 해석은 그릇되다. 이는 우리의 한계를 그리 알게 하려 하심일 뿐, 그리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덜거나 더할 수는 없다.

하여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는 고백이 마땅하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가령 나의 이 글이 글로서 문학적인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식의 의도는 불순하다. 먼저는 나 하나를 위해 혹은 누군가 한 영혼이 듣고 공감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 것으로 족하다. 이는 바람과 같아서 그렇게 사라져도 감사할 일이다.

가끔은 어릴 적 그 고생스러웠던 목회일정의 한 일원으로 살았던 날들이 축복이다. 그땐 그게 그렇게 싫고 고생스러워 원망뿐이었다 해도… 우리 어린 형제들은 방이 없어서 교회 마당이나 어느 귀퉁이에서 자곤 하였는데, 그때 같이 교회에 올라와 기도하고 잠들었던 형들이나 누군가가 유익하였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는 ‘숭곡국민학교’를 다녔었는데 그때도 사택이 따로 없어 교회 본당이나 건물 옥상에서 가건물을 짓고 생활하였다. 그때도 보면 늘 교회에 와서 기도하다 곁에서 같이 잠들곤 하던 형들이 있었다. 특히 종암동 어느 교회의 마당에서 같이 잠들곤 하던 네 명들의 형들은 모두 목회자가 되어 목사로 선교사로 신학교수로 사역들을 감당하고 있다.

그때는 그 생활이 어린나이에 열등한 기억이고,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고난의 현장이었을지 몰라도 우리 형제에게는 나름의 어떤 구력이 되었다. 어쩌면 오늘도 다들 여전히 연장선상인 ‘어려운 목회현실’에서 늙어가고 자식들을 키우고 있지만 그때의 그 훈련된 시간들이 오늘의 고단한 사역을 넉넉히 감당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목회에 있어 아버지의 고난은 훈장이었다. 어린나이에도 나는 그런 아버지가 존경스러우면서도 미웠다. 일부러 저러시나? 싶을 정도로 어쩜 그렇게 지지리도 가난하고 험난한 길로만 인도하셨는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때 부모의 심정으로는 어떠하였을지… 이 나이쯤 되어서야 이해가 된다. 겉으로는 어쩜 그리도 당당하고 뻔뻔스러울 정도인지!

엘리바스의 지적이 그때 어린나이의 나의 비난이 아니었을까? 원망스럽고 한심하고 처량하기만 한데, 어디서 그런 당당함이 나오는지! 사택이 없어 상가교회 한 귀퉁이를 꾸며 살면서도, 심지어 옥상에 가건물을 짓고 얼기설기 거지소굴처럼 하고 사는 사택인데, 그곳에 또 와서 같이 자고 얹혀살던 이들이 오늘에 이르러는 목회자로 또는 선교사로 그 삶을 주께 다하고 있는 소식을 들을 때면… 개인적으로도 엘리바스의 비판이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저는 머리로 판단하고 욥과 같이 나의 기억은 삶으로 이를 지나왔다.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남들의 눈총과 온갖 비난들까지도… 그리하여 별로 개의치 않는 구력이 생겨난 것이어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하는 다윗의 고백은 내 것이다.

이는 오늘의 생명을 우리가 값으로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값주고 사신 것이니까…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때도 늘 그러면서도 신기하여서 하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살았다! 실제 우리의 가난은 그 열매가 늘 기이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동생의 말처럼 같이 사는 아내에게도 이와 같은 경험을 주입할 수는 없다. 나는 어릴 적 그러한 현실의 시간들이 이제 와서는 축복 중에 가장 귀한 축복이었음을 알고 있다. 요셉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이를 어찌 말로다 알아듣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삶은 살아봐야 안다. 말로나 글로 듣거나 읽어서는 알 수가 없다. 자칫 삶이 빠진 말씀에 대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누가 보고 주를 바로 섬긴다면 어찌 그리 사는가? 하고는 하지만 나의 구력은 나도 설명할 수 없는 더 오래된 몸이 아는 기억 속에 숨겨져 있다. 나도 모르게 내 몸에 밴, 생존본능 같은 신앙? 어떤 믿음?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그래서 엘리바스의 말과 지식은 다 옳으나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저는 머리로 하나님을 알고 욥은 몸으로 하나님을 안다. 저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욥은 삶으로 하나님을 안다. 그 격차는 어찌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성경의 경고에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하신 것과 같이 나는 내가 어떤 위인인지 잘 안다.

어제도 친구와 통화하면서 고백하기를, 나로 목사를 세우신 것은 오죽하니 나를 붙들어 온전히 살게 하려 하심이다. 왜 나 같은 자를 목사로 세우셨을까? 하고 남들과 견주어 교회도 목회도 어떤 변변한 구실도 못하고 있으면서 어느새 목사로 세우신지 10년 시간이 다 차 가는데,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답답해하다 보면 문득 날 위해, 나 하나를 위해 주님이 베푸신 은혜가 아닌가, 하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때에 나로 주 앞에 바로 설 수 있게 하시려고. 일찍이 나의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은 그러하셨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아직도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특히 아내를 대할 때면 이를 절실히 알 것 같다. 어쩜 그렇게 이기적인지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 앞에 번번이 또 좌절한다. 그래놓고는 말씀 앞에 앉으면 한숨뿐이다. 주 앞에 아뢸 말이 없다. 송구하고 면구스러워 도대체 어찌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두고 주께 씨름한다. 그러니 어찌 나 같은 자로 주의 종으로 삼으셨는가? 하고 생각하다 보면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라는 대답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5).” 그러니 이러한 말씀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내가 누구에게 전할 수 있는 소리이겠나?

감히 나 같은 죄인이 목사라는 직분으로 살게 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어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이 말씀이 내 것이다. 친구는 강원도 원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 돌아오는 29일에 초등학교가 방학을 한다면서 매번 방학 때라도 한 번 찾아온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대중교통으로 오면 서너 시간, 자가용으로 와도 두어 시간 반 이상은 족히 걸리는 길을 마다 않고 오겠다고 하니… 나는 사실 주 앞에 송구하고 두렵다. 내게 복을 더하심이 참으로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시다. 여기서 막(莫) 자는 없을 막, 덮을 막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뜻한다. 전혀 예상할 수 없어서, 신기하고 묘하여 미리 예측할 수가 없는 그런 하나님이시지만 그러한 사랑으로 나의 온 생을 다 가지셨다.

어릴 때를 돌아보면 기억이 다다를 수 있는 지점에서부터 하나하나 ‘아, 왜 그때 하나님이 그리하셨는가?’ 하는 것을 목사가 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설교 원고나 묵상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난 늘 누구를 위해 설교를 하고 그리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목사로서의 사명은 그러하겠는데, 나 역시 내게 맡기신 한 영혼이라……! 아내 또한 사랑해야 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성도로, 주의 자녀로 내게 맡기신 한 영혼이라…. 나도 내가 아닌데 하물며 아내나 가족은 오죽하겠으며, 나아가 남들 저 한 영혼의 일에 대하여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겠나? 나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여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말씀 앞에 늘 좌절뿐인데, 하물며…. 그런 차원에서 나는 엘리바스나 그 친구들의 공격적인 말들이 저들 자신을 향한 총구 같아서 위태롭기만 하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저가 남은 생을 온전히 그러하였을 그의 몸부림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내가 나의 오늘, 이 한심하고 답답하기만 한 나 자신을 두고 어찌 해야 할지 주 앞에 씨름하는 일을 사랑한다. 그리하게 하시려고 고난도 두신다. 죄악 때문만은 아니다. 고난도 주의 사랑이라. 나의 아버지의 가난이 저의 훈장이 된 것을 그의 자녀들인 우리 형제들이 이제야 하나하나 증거가 된다. 가장 뒤늦은 나로서도 이제는 이를 인정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고난도 은혜다. 고난은 하나님의 최후의 은총이다. 이에,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시 20:1-3).

바울의 설교로 보면, 환난으로 소망을 이룬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오늘에 이르러 이를 비로소 알겠는 것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4-5).” 아, 이게 사랑이었음을….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107:19-20).

고통이 없었으면 내게 말씀이 이처럼 절실할 수 있었을까? 누가 나더러 이처럼 일정하게 쓰는 묵상 글쓰기가 대단하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이것밖에 더는 남은 길이 없어서다. 나의 이 절박함을 나는 사랑한다. 목사고시를 몇 번씩 떨어지면서도 괜찮았던 것은 다시 또 할 수 있어서이다. 주의 은혜는 그와 같아서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아니면 언제 또 이처럼 부르짖을까?

하나님도 알리신 것처럼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그래서 나는 내가 좀 아는데, 하나를 허용하면 열을 요구하는 기질이라, 혼자 각오하기를 죽기 전까지는 묵상글을 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다행일 때는 그래서 설교원고를 작성한다. 말씀을 펴고 주 앞에 앉아 ‘어쩔 수 없어서’도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하면,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러하심이 곧 나의 날들이었다. 이 증거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러니 갑자기 눈물이 터지고 어깨를 들썩이며 감사의 마음이 치솟는 것도 당연하였다. 나 같은 게 뭐라고… 이처럼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그래서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살았다.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말씀은 사는 것이지 아는 게 아니다. 음식은 먹는 것이지 보는 게 아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고, 인생도 사는 것이고, 영생도 누리는 것이지 그렇다는 게 아니다. 정의할 수 없는 게 삶에 더 많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9).” 아, 이 놀라운 한판 승부!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4).

그러므로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몰라서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데도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자.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그러므로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그러니 가장 무서운 적수는, 당해보면 안다. 당면하면 그때서야 내게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 수 있었다는 것을 새들은 땅끝까지 떨어지면서 알게 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그러니 갈 데까지 가보는 것도…….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6).

이를 내가 목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어찌 알았겠나?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같으나 최소한 나 하나는 주 앞에 바로 세워져 갈 수 있으려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