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전봉석 2022. 12. 23. 02:48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욥기 27:2-4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편 25:7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그 결백을 고수한다. 욥은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를 가리켜 맹세한다. 이는 역으로 자신의 뚜렷한 한계를 노출시키려는 의도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친구들이 알기를 바란다. 고난은 우리를 일깨우는 것이지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신앙의 단련을 가져온다. 이를 시편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 71).

 

이와 같은 고백을 훗날에 욥의 진술로 다시 들어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러므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고난은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기도는 주를 찾고 주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렇게 고난의 목적은 뚜렷하여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고난으로 우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다. 곧 하나님의 징계는 이를 위한 것이다.

 

진리는 타협할 수 없다. 욥은 말하길,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4).” 하고 선포한다. 진리는 분명하여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이것이 곧 다가오는 성탄의 의미이고, 그 의미와 목적은 ‘성육신과 거듭남’이다. 저의 성육신이 없었다면 ‘예수’라는 이름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가 없었다면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게 구원하는 일’도 없어서, 우리의 거듭남도 없었다. 성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예수라는 이름을 더하셨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이것이 성탄이고 진리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하는 바울 사도의 결연한 선포는 참으로 모범이 된다. 이에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2).” 마치 오늘 우리 사회에 따른 예언과 경고의 말씀이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2-15).”

 

곧 오늘 우리의 출애굽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그럼에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짝하여 살고 있다면 스스로 삼가지 못하는 것으로 오늘 욥의 선포와 같이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6).” 하나님 앞에 의연하고 떳떳할 수 있는 삶으로, 더는 다툴 게 없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딤후 2:14).” 설왕설래 서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게 아니다.

 

이런저런 사회 현상을 볼 때면 마음이 안 좋다. 마치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강요당하는 것 같아 그 가치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더욱 주를 바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4-15).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들 따름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고, 그를 알고, 그에게 구하리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에 소망에까지 이른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이것이 성탄의 이유이고 사실이다. 고로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34:15-16).

 

앞서 이를 욥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을 향한 말도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서로가 알지 못하고 시대가 다르고 처한 모든 상황이 다를지라도 성경이 성경으로 이어지며 이끄시는 말씀이 참으로 귀하고 선하시다. 이렇게 새벽 시간에 주 앞에 앉아 말씀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말씀이 말씀으로 나를 이끄시는 놀라운 사실이다. 어릴 때 내가 아직 주를 바로 알지 못할 때, 지금 와 생각하면 모든 게 다 연관이 있고 목적이 있었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가난하여 고달팠던 유년의 목회 참여나 나환자촌에서의 사춘기 시절은 어느 때보다 하나님이 공들여 나에게 선사하신 시간대이다. 그땐 그게 왜 그처럼 억울하고 분하기만 하였던지…. 그때마다 하나님은 시의적절하게 어울리는 사람을 주셨다.

 

문득 기억에 남는 한 장면, 그때 나는 수술 후에 중학교 입학을 미루고 한 학년을 쉬고 있었다. 덩그러니 채마밭이 달린 빈 사택에서 오후 한때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때, 한 소녀가 나타났다. 목사님을 찾아온 것은 그 애가 다니는 미션스쿨에서 전주일 교회주보와 담임목사의 증명을 받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어린 나는 바깥의 나환자들과 그 동네 특유의 구린내를 역겨워하며, 마치 ‘자살’을 비상금처럼 가슴 한 편에 숨기고 있었을 때였다. 이사 오기 전 서울 성북구 어느 개척교회 옥상에서 살던 때에 같이 살던 친구 형이 도봉산에서 실족사로 죽었다. 서울대를 갈 정도로 수재였던 그의 죽음은 초등학교 5학년의 나로서는 신비하였고, 실은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자살’이었다는 데서 상당한 충격과 함께 매료를 느꼈던 것 같다. ‘아, 인생에는 그런 좋은 수가 있었구나!’ 하는 어떤….

 

어린것이 자살을 동경하며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비상금으로 품고 있을 때, 나의 첫 사랑이기도 하였을 그 소녀의 등장은 극적으로 고요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3년 반 동안의 편지와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이야기에서, 저의 생의 질곡 또한 깊고도 고요하였다는 데서 안도하였는지도 모른다. 음성나환자인 부친은 눈알이 한쪽 없고 사지가 뒤틀렸으나 움직일 수는 있어서 크게 양계장을 하고 있었다. 저의 모친은 상대적으로 곱상하니 심한 절름발이였다. 자신이 입양된 것을 털어놓던 날,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고 꽤 먼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하루하루를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하루 일과의 시작이 그 애의 편지였고, 하루의 마무리도 그 애의 편지였다. 교회 변소 옆 그러니까 사택 마당 뒷문으로 오래된 떡갈나무가 있었는데, 우리의 키 높이만한 곳에 옹이진 구멍이 있었는데 꽤 깊고 넓은 편이어서 그곳이 우리 둘만의 비밀교환 장소였다. 아이가 밤새 쓴 편지를 등굣길에 먼저 넣고 가면서 늦은 밤에 내가 쓴 편지를 가져갔고, 하굣길에 내가 학교에서 쓴 답장을 넣어두면 그 애가 지나는 길에 그것과 자신이 쓴 새 편지를 바꾸어 가져가는 식이었다.

 

뜬금없긴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다, 말씀이 앞서 내 삶에 배어 있는 것 같은, 아직 알지 못하던 때에 주가 이미 함께 하셨던 기억들이 새롭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하는 말씀이 확장하면서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오늘까지 이른 것과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 너희에게 행하신 일…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신 11:2-7).” 나로 하여금 보고 듣고 느끼게 하신 주의 사랑을 나는 이제 사랑한다. 늘 그때마다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이를 알게 되면서 확신하는 바는,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119:98).

 

이제 와 돌아보면, 어느 것도 버릴 게 없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때로는 지긋지긋하였던 가난도 슬픔도 소외도 낙심도 때가 되면서 주를 찬송하게 하셨으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시편을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러하였고 그리하신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 욥의 단호하고 결연한 선포에 고무된다. 나에게도 그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11).” 이를 나의 삶에도 심어두셨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5:1-2).

 

곧 우리의 소망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이시다. 그렇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그렇듯 내 안에 두신 어떤 힘, 주의 권능은 나의 아주 사소한 데까지 스며져 있었다. 심지어 내가 주를 멀리하고 떠나 있을 때에도,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6).

 

그래서였구나!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하여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2).” 그렇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7).

 

내가 늘 주께 구하고 바라는 기도이며,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86:4).

 

하면,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25:8).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사용하심인데,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9-10).

 

그러므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0-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