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욥기 28:23-26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편 26:7
이번 28장은 욥의 변론과 친구들의 반론도 아니다. 욥기서 저자의 서술로 지혜에 대한 진술이다. 앞서 욥의 친구들은 지혜를 가르치려 하고 욥은 인간에게 지혜란 것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저자는 글의 전개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며 지혜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마치 흐트러진 저들 주장의 논점을 바로 정돈하는 듯하다. 친구들이 지혜라고 주장하는 것도 실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욥은 자신의 경험과 통찰이 친구들보다 낫다고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변론의 교착 상태라 할 수 있는 시점에서 저자가 개입하는 것이다.
지혜를 찬양하고 그 가치와 기원을 바로 정리한다. 마치 토론장에서 두 진영의 주장을 멈추게 하고 흐려진 논조를 바로 정돈하는 격이다. 먼저 세상 그 어떤 보화보다 뛰어난 지혜에 대하여(1-11), 우리의 노력으로 찾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초월적인 지혜의 존재를 밝히고 (12-14), 서로 지혜를 가르치려 하는 데 제동을 걸고 그 어리석음을 드러내며(15-19), 지혜와 명철의 출처를 상기시켜(20),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의 금은 보화는 얻을 수 있어도 지혜는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21-22),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며(23), 하나님이 곧 지혜의 원천이심을 밝힌다(24-27). 그러므로 지혜란 신적인 것으로 ‘주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남’이라고 정리한다(28).
이와 같이 모든 ‘됨’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한 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하나님이 곧 지혜이시다(23).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그리하여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24, 25-27).” 이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께서도 이르시길,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29-30).” 이를 근거로 우리의 근심을 없이 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1).” 이사야도 이르기를,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이로써 오늘의 모든 사건과 상황,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가 아신다. 저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곧 우리로 오늘을 살게 하심도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어쩌다 우연히 서로를 알고 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와 같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그러니 어쩌다 오늘도 없고, 어쩌다 너와 나의 관계도 없다. 곧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요 며칠 동생들의 새로운 사역과 그 사는 데 따른 어려움으로 마음이 어려웠다. 가끔씩 젊은 동기들이나 주변의 믿는 자들이 갈 바를 두고 그 알지 못함을 호소할 때는 무어라 말해주어야 할지 먹먹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갑자기 누가 다급하게 전화하여 누가 구강암으로 이제 쉰 살이 되는데 어쩌면 좋은가? 하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순간 예수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각종 병자들이 예수께 나와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그 절실함에 주의 응답이 있기를 속으로 빌었다. 저들 부부의 이름과 나이와 근황을 묻고 메모하며 주께 아뢰었다. 모든 게 주의 뜻이나 이로써 저들 부부가 주를 영접하고 믿음 위에 부르심이 있기를 빌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정하시고 그 경계를 두신 것을 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
나는 나의 문제로 씨름하다, 또는 누구의 다급한 사정을 들으며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으로 부르다가 ‘주의 뜻이 계시다. 너를 더 많이 사랑하신다. 특별한 아이다.’ 하며 눈물로 호소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가 아마 중 1때였을까? 반 년을 넘겨 수면제를 몇 알씩 모아 아무도 몰래 자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도 문득 그리워하던 ‘소녀’와의 편지로도 감당이 안 되는 현실의 무게와 죽음에 대한 동경이 어린 나에겐 매혹적이었나보다. 어쩌면 그 애와도 편지로 이런 마음을 주고받았을까? 사실 그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부쩍, 우리의 만남이나 편지가 잦았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같이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이 불발이 된 것은 친구 누구에겐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렸던 것 같고, 혹시 우리(?)의 시신을 못 찾을까봐 그 날짜를 말했던 것인데….
지금은 어느 교회 집사로 있는 그 중1 때 같은 반 친구는 겁을 먹었고, 이를 선생에게 알렸으며, 선생도 이 사실을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웠는지 어머니를 학교로 불렀고,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며칠째 앓아누웠고, 어쩔 수 없이 나의 정한 날짜는 하루 이틀 미뤄져야 했고, 이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부모로서의 울분과 서러움으로 매질을 하였고… 그때는 그 모든 사실을 모른 채 영문도 모르고 매를 맞다 알았다. 결국에는 숨겨둔 약이 발각되고 밤새 맞다 울다 하다, ‘주님의 뜻이 계시다. 하나님을 너를 더 많이 사랑하신다. 특별한 아이다.’ 하는 맥락도 없는 말로 부둥켜안고 울었던 아버지의 품이 다행이었던가? 돌아온 탕자가 그 아버지의 품에 안겼을 때 들었을 그런 기분이었을까?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그때 아버지도 그리 말하였을까?
오늘은 말씀을 묵상하다, 일련에 벌어지고 있는 나의 주변의 일들과 또 누군가의 다급하고 조마조마한 기도제목을 들으며, 이 모든 게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가장 치밀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이를 알게 하는 것은 말씀뿐임을.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 이미 말씀하셨다.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미 우리는 충만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잃어버린 충만함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3-14).”
그의 가득하심, 충만하심을 우리는 어디서 잃어버리고 이처럼 헛되이 피곤한 것일까?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 결과 위에 집을 짓고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2-25).” 모두가 자처한 일이다. 또는 처한 상황에서도 주를 찾으려 하지 않는 불신앙이 문제이다. 반드시 그 날이 오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3).”
너무 늦은 이도 있겠고, 아직 늦지 않은 이도 있을 텐데… 이를 여전히 알고자 하지 않을 때는 감당이 안 된다. 누가 급박하게 기도를 부탁하는데, 저이는 어디 용한 점쟁이도 찾아가고 소원을 빌고 기원할 수 있은 여러 것 가운데 하나로 나의 기도라도 원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의 알지 못함까지도 주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나는 이 말씀을 확신하는데 무려 50년은 족히 걸렸는가보다. ‘주의 뜻이 계시다. 너를 더 많이 사랑하신다. 특별한 아이다.’ 하였던 아버지의 말씀이 이제야 분명하게 들리는 걸 보면.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1-2).
오늘 시편은 자신을 자신하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주가 어찌 붙들고 계시는가, 확신하기 때문에 당당하다. 세상살이 그 악의적인 고달픔에 속내를 알고 나면 더는 나 자신조차 어려울 것이 없다. 내 문제로 더는 짓눌릴 것 없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그러므로 정작 두려워해야 한다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28).” 영영 더는 그 기회조차 잃을까 하여,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신 주의 당부시하심을.
그리하여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이에 기도한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31:13-14).
곧,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26:3-7).
이는 남은 날의 나의 다짐이고 서원이며 기도이고 소망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이때 나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고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 그리하여 주만 바라며 살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8-9,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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