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욥기 29:2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욥은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고난 이전의 때를 회상하고 있다. 그 축복과 영광을 회고하고(1-25), 상대적으로 비참한 현실을 탄식한다(30:1-15).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육간에 탄식하고 절규하며(16-31),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31:1-40). 앞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축복의 날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고, 존경받던 날들을 회상한다.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낙관하고, 과거에 무리의 지도자로 지내던 날을 회고한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한 지경이고 이를 부각시킴으로 자신의 탄식을 정당화한다. 과거의 행복이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고로 오늘의 고난이 죄악으로 인한 게 아님을 드러내려 한다. 여기서 욥의 상태가 흔들리고 불안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의 의나 능력을 회고하고 맹신하는 마음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흔든다.
지혜자는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우리 인생의 됨됨이가 주께 있음을, 그리하여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주께 그 걸음을 맡기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3:5-7).” 곧 우리가 주의 뜻만을 바란다는 것은 우리 주님의 기도와 같이,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때론 원치 않은 일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탄절 아침 이른 시간에 이와 같은 욥의 회상을 들으며 우리 모두가 병들고 나이 들었을 때 그리워하게 될 것을 상상해본다. ‘그때가 좋았었지…’ 하는 날들이 결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는 없다. 그 모든 게 주께서 안전하게 지키시고 경계하셨음을 고백하는 것,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3).” 하는 욥의 고백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때 그 시절, 하나님이 나를 어찌 보호하셨는지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7:1-2).
우리 신앙의 발판은 지난날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은혜 가운데 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곧 우리 안에 두려움은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생겨나는 당연한 마음이겠다.
모든 삶이 그러하지 않을까? 누구도 살아본 날을 살지는 않는다. 늘 새로운 날 앞에서 어떤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때에 외쳐 말하길,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이를 확신하는 것은 지난날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이를 잘 알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사는 오늘의 힘은 내일의 소망으로가 아니라 어제의 은혜로이다.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9-10).” 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제의 하나님이 오늘도 그러하고 내일도 그러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하는 소망은 아주 오래 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왔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염려하지 않고 주를 바란다.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염려함으로 탄식한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73:23-25).
우리의 남다른 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망상으로 비치겠으나 오히려 저들의 낭만을 우린 우려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하여 오늘 욥은 이러한 진리 앞에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건강과 부를 자신만을 위해 누리지 않았음을 밝힌다.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13).” 곧 자신에게 주신 것을 맡은 자로 여기며 살았다.
내 것이라 여길 때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게 삶이었다. 건강이 그러하였고 부와 명예가 그러하였다. 누가 순간 어떤 병에 걸려서 곧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미처 자기 외에 바로 알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이를 두려워하며 후회하는 이가 있은가 하면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억울함만을 호소하며 한탄하고 원망하는 이도 있다. 주는 오늘도 찾으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 12:42).” 오늘 나의 모든 게 주의 것임을. 이를 맡은 자로 청지기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것임을.
성탄절 아침, 그저 다들 그러는 데 덩달아서 들떠하며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주가 성육신으로 오셔서 모든 걸 다 주고 가셨음을 회상할 때 도리어 숙연하고 감격하는 날이 되기를. 그리하여 누구는 없는 살림에도 나누려하고 힘에 넘치게 함께 하려 한다. 서로가 다르나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그런데 내 것이라 여길 때 십일조나 감사헌금마저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욥은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14).” 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뢰하며 행하였던 일들,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15-17).” 하고 그날을 기억한다.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실 것이다. 하여 두려운 일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우리가 다시금 되새길 것은,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남들보다 좀 나은 삶을 누리고 산다면 그 맡은 것을 감당해야 한다.
예전에 월반을 하여 조기졸업으로 영재고등학교로 올라가는 아이가 있었다. 나는 저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당부하였다. 좋은 환경과 타고난 재능으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할 때 그것은 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 33:6).” 그때 왜 글방 선생이 그런 소릴 해주었는지, 언젠가 훗날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살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고 아이는 고백하였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이런저런 모양의 구제도 있고 헌신도 있겠으나 돌아오는 인사와 찬사를 바랄 때 그 일은 허사가 될 수 있다. 지혜자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누가 가질지, 어떤 이로 고마움을 돌려받게 되지 않도록… 결국은 사랑으로 하는 일인데, 이 사랑은 주님의 것으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흔히 생색을 내고 찬사를 바랄 때 그의 선행은 의미 없음이 된다. 저는 이미 그 상급을 받았다. 결국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우리가 누릴 천국의 확장이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전에 어느 특수장애인시설에 주말마다 놀러갈 때, 하루는 담장을 사이에 둔 대형 교회 마당에 두 대의 큰 관광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더니 곧 성탄절을 맞이하며 멀리 어디에 있는 무슨 기관으로 봉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보모누나가 그 말을 해주며 씁쓸하게 하는 말은 바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곳 시설이 있는데 돕지 않는 것은 저들의 헌신과 봉사가 일회성으로 ‘보여주기식’이라는 거였다.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대형버스까지 대절하여 가는 곳도 어려운 처지의 곳이겠지만 바로 담장 하나 사이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는데… 행여 성가신 것이다. 혹여 책임질 게 두려웠던 것인지도.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우리에게 참 필요한 지혜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저마다의 사정과 여건이 있겠으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말씀의 확신이 없다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기가 어렵다. 주가 도우신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하는 삶으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곧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0-31).” 주는 내 편이시다. 그러므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것,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65:4, 84:2).
비록 이 땅에 사는 동안 온갖 시름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나,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27:5).
이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삶의 은총에 대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신 33:27-28).” 그러므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8-9).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1, 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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