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욥기 33:13-1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편 31:24
엘리후는 신중하게 들어주길 바란다. 우리에게 더하신 은총은 듣고 이를 생각하여 유익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들어야 한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1).” 하고 엘리후는 말에 앞서 상대의 경청을 부탁한다. 자신도 그러하였음을 앞서 말하였다.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32:11).” 말의 기술은 하는 데 있지 않고 듣는 데 있다.
성경은 누누이 듣기를 바란다.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32:9).” 사도들도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말에 귀 기울여주기를’ 당부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듣기의 다음은 진실 되게 말하기이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엘리후는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3).” 하고 자신의 말을 공인한다. 말하기의 유혹은 위선과 궤변이다. 중언부언과 임기웅변이다. 서로 진실하다는 것은 말에서 우러난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 그러려면 거짓을 버려야 한다. 이는 정직으로 여호와를 의식함에 있다. 우리가 서로 한 지체됨이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하나 더, 말의 기술은 자세이다. 대등한 사이로 서야 한다. 곧 오늘 엘리후의 진술처럼 우린 모두 하나님 앞에서 흙으로 지음 바 된 존재다.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6-7).” 오죽하니 요즘은 ‘꼰대’를 싫어한다. 속칭 가르치려 드는 말로 ‘나 때는…’ 하는 식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우위에 놓고 마주하려 하니까 상대가 어려워진다. 베드로는 이에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가만히 본이 되는 게 훨씬 크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처럼 ‘듣기와 말하기’는 타고 난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초조해하지 않는 데 있겠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은 영혼,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이를 지혜자의 격언으로 옮긴다면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그러므로 우리의 말하기와 듣기는 우리가 누리는 복록의 정도가 된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13:2).”
‘말이 씨가 된다’는 말, 고로 우리는 주를 인정함으로 기쁨에 이르고 우리가 하나님으로 기뻐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이것이 우리의 장래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55:12-13).” 우리가 여호와의 기념-영광이 되고 영영한 표징이 되는 것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61:10).”
이러한 주를 찬송함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신다. 어떤 일을 맞으며 그 일을 마주하고 설 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러할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하여는 먼저가 정직한 마음으로이겠다. 엘리후는 이를 강조함으로,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3).” 이는 예수님이 바라시는 마음이기도 하였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이를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정직을 사모하고, 주를 바라는 마음의 주축이 된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고로 우리의 헛되고 헛됨을 되풀이 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나름들 산다고 사는데 그 삶이 그러하여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8).” 이는 늙음과 젊음의 상관이 아니었다. 늙으신 장모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어떤 벽’을 느낀다. 어제도 들어가는 데 아내는 어머니에게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인감이 손위처남에게 있다는 데도 나머지 막도장을 버릴까 하여 그것을 인감이라 우기시느라 그랬던 것 같다. 장모는 병적으로 버리지를 못한다. 쓰던 휴지 하나도 그냥 버릴 수 없어 손에 쥐고 감춘다.
들어보면 어릴 때 소유하지 못했던 결핍이 애착본능으로 고착된 것 같다. 어제는 같이 앉아 어릴 때 일찍이 부모를 잃고 남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하여, 또한 없이 살 던 시절의 서러움과 그 마음의 노여움이 억척스럽게 생을 꾸려왔다. 그러다보니 버리면 벌 받는다는 강박이 자신의 소유본능의 기제가 되었다. 이를 이제 맡겨두고 자식들의 손에 의탁하시라, 우리가 주를 의지한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내가 어쩌든지 쥐고 있으려는 것을 내어드리는 것이라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몸은 그러하고 기억력도 가물가물해도 그 고집이 황소심줄 같아서… 아내는 길게 한숨을 쉬고 나는 중간에서 난처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 기도로밖에는! 주의 영이 아니시면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게 사람이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오늘의 한 영혼은 장모인가? 하고, 나는 요즘 저를 두고 주께 아뢰는 시간이 늘었다. 믿음의 확신은 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여러 파생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은 생에 대한 집착이다. 소유욕과 애착이 끔찍할 정도로 강하다. 놓으시라, 해서 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령 오늘 새벽 일찍 오겠다고 한 친구는 스스로도 자기 것을 버릴 수가 없다고 자인하였다. 자기 것을 주느니 같은 것을 사주는 쪽이 더 편하다. 굳이 안 쓰고 처박아두어 삭아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내 것에 대한 강박’은 저로 주를 온전히 모시지 못하게 한다. ‘굳이 뭘…’ 하는 게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은혜가 ‘남들은 간증하는데’ 자신은 별로 와 닿지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여하튼 연차가 남이 오늘부터 연말휴가라며 길 막히기 전, 새벽 네 시에 출발한다고 하여 나도 덩달아 더 일찍 일어나 이처럼 말씀 앞에 앉기는 하였는데…….
아무튼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10).” 집착이나 애착보다 무서운 병도 없다. 스스로도 인정하면서 저도 어쩔 없다고 고백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주의 영이 아니시면 우린 무엇으로 우리 스스로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 이를 위하여도 말씀이 있어야 한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이는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말씀으로,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러할 때 가능하였다(5). 하여 오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놀라운 은혜로 나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사는 보물이 있었으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그럴 가치를 느껴야 값어치를 알 것인데,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이게 그러니까 아무나 그리할 수 없는, 피 값으로 사신 자의 권능이었다. 그것을 더러는 심리학적으로만 접근하여 어릴 적 유년의 가난이나 혹독한 결핍을 이유로 들기는 하지만 실은 다 죄의 문제이고 동시에 사람의 됨됨이는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우린 어찌해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두려워할 수 있을까?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욥 33:6-7).” 엘리후의 말처럼 우리는 지으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 우리 손으로는 우리를 누를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권세가 있었으니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곧 내가 나를 버리고 비우고 낮아지고 낮아져도,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시 21:1-3).
‘하나님의 이름’이 ‘성소에서’, ‘시온에서’ 나를 높이 드신다. 하면 우리의 순복(順服)은 더 많은 것을 더하시는 통로가 된다. 순복, 순순히 복종할 수 있는 것이 믿음에 따른 구원의 확신으로였다. 감추어진 엄청난 보물을 샀는데, 다른 무엇이 아깝겠나?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를 엘리후는 반문하고 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욥 33:13).”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은,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37:4).
이 놀라운 비밀의 열쇠가 우리에게 있다. 나에겐 그 기쁨이 아침에 더욱 주로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90:14).
이게 그러니까 어찌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생명의 길’을 보이심이다. 주의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이를 내가 사는 동안에는 어찌 증명할 길이 없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다름 아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내 영혼의 먹고 마심으로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어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그 값어치를 알면 얼마나 되었든 그 값을 치른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다 지으셨고, 오늘도 조성하신다는 것.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6).” 하여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45:9).” 이에,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더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데서 안도한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9:9-10).
이로써,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31:1-3).
아, 이 당당한 요구와 바람. 그러할 때,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5-6).
이보다 더 신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또 있을까? 더 놀라운 것은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이 단순명료한 사실 앞에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5, 7, 14).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15, 21).
우리 둘만 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비밀….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23-24).
더 말해 무엇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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