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34: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시편 32:1, 10
욥의 주장에 대해 엘리후가 비판한다. 자신은 의로우나 하나님은 까닭 없이 자신을 징벌로 고난을 더하신다는 욥의 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그런 욥을 악한 자와 한패라 하였다. 이는 욥을 비난하기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왜곡한 데 대한 참을 수 없는 주장이다. 우리는 분별이 필요하다. 우리가 존귀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존재의 가치가 있다. 엘리후의 주장에서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3).” 우리 몸의 부분 부분이 제 역할을 할 때 정상인 것과 같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오늘을 사는 동안 삶의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나는 어쩌다 생겨난 존재가 아니고, 주어진 오늘 하루도 무수한 여러 날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곧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그의 창조와 구속의 값으로 얻은 바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세상에 무의미한 존재는 없고 모든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엘리후는 말하지만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4).” 우리로 알 수 있게 하신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은 이르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를 위하여 더는 중요한 게 앞설 수 없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곧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포기하는 모든 것은 훗날에 영광이 된다.
앞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하여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24-25).” 또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
저들은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랐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그럴 수 없어 근심하며 돌아가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앞서는 모든 마음의 소유를 내려놓는 것일 텐데,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이에 근심하며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뿐이시다. 이에 오늘 엘리후의 과오는 스스로의 주장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한데 저는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욥 34:4).” 하고 나섰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우리 안에 드는 스스로의 판단이 얼마나 우리를 그릇 행하게 하는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누가 누구를 판단한다는 일은 어떠하든지 함정이 될 수 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서로가 지지하는 사람을 우선하여 그 시각은 비판적이게 되는데,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다는 사실.’ 이를 인정한다면 묵묵할 수 있다.
더욱이 자신보다 못하다 여기는 사람에 대한 비난은 가히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성경은 엄연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하나님만이 하신다. 우리의 의는 상대적이어서 공격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구원을 생각한다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주 앞에 겸허할 수 있어야….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다는 말씀 앞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그러므로 다만 서로를 향하여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를 오늘 시편의 말로 고하면,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32:9).
‘무지한 말’ 곧 그 모든 결국을 알지 못하면서 떠벌이는 것이나 말이나 ‘노새 같이’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곧 현실의 모순된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자주 묵상하는 구절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은 의를 이루신다. 저는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렘 11:20).” 예수님도 모든 판단을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여러 생각들을 자주 주 앞에 펼친다. 우리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데 있어 하나님의 일하심이 신묘하시다. 어찌 가늠할 수가 없다. 함부로 예단할 수도 없어 말씀으로 마주할 따름이다. “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렘 32:19).” 이에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62:11-12).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나를 돌아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누구 일로, 또는 어떤 상황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은 말씀으로, 세상 속에서 주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드는 마음으로,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32:11).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61:7-8).
이러한 기도와 찬송으로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사 29:19-20).” 뉴스를 보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유심히 살피면 보인다.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8).” 다들 나름의 이상과 꿈을 따라 달려가지만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9).” 이와 같은 경고 앞에 멈칫,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 엘리후의 자신만만한 판단 앞에서 나는 두려움이 앞섰다. 우리는 다 어떠한가? 오늘 시편은 이를 말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1).
상대적으로,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0).
이를 목도하며 살 수 있다는 것,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11).
이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주가 기뻐하신다. 누구라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고로 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데서 주 앞에 자복할 때 주의 은혜가 넘친다. 곧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하여 우리가 우리 죄를 덮는 유일한 길은 회개뿐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삶에 있어 가장 단순한 일, 잘 먹고 잘 싸는 일보다 귀한 은혜도 없는 것 같다. 노인이 되고 장기능이 원활하지 못함으로 변을 보지 못하는 고통은 가히 처량하다. 나는 야채가게에서 사과와 양배추를 사다 아침마다 어머니께 갈아드리라고 주었다. 늙어도 부끄러움과 수치는 여전하여서 나는 더욱 조심하게 된다. 한 사람을 돌본다는 일, 그 영혼을 두고 주 앞에 아뢰고 고한다는 일, 더욱이 어린아이 때와 달리 노인을 모시는 일은 노새의 고집과 다투는 것이어서…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3-4).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그럴 수 없겠는데 그럴 수 있는 길은 오직,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본능적으로 가식이 들어가고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하나 주 앞에서는 내 모든 허물을 자복할 수 있으리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로써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7).
한 번 주께 아뢰면 모든 것에서 놓여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10-11).
그러니 문제는 우리의 고집이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한 같은 어려움은 반복될 뿐이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러니 사는 게 고역이라. 우리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였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느 8:3, 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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