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기 38:1-2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편 36:5-6
욥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신다(38:1-42:6).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다루신다. 그 선언은 욥을 향한 책망(38:4-39:30, 40:15-41:34)과 욥의 회개(42:1-6)가 따른다. 오늘 하나님은 물으신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이에 욥은 답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하나님은 부르짖는 소리에 반드시 응답하심을 본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38:1).” 이는 믿음의 사람들은 알고 있고 이에 모두가 주께 향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8:1).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사울 왕은 이에 영매를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영을 끌어올리기도 하였다(삼상 28:15). 하나님의 닫힌 응답에 우리는 몸서리를 친다. 우리의 가장 큰 영화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그러므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곧 우리의 부르짖음에 따른 응답은 ‘폭풍 가운데서’ 일어난다. “그 때에”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38:1).” 이에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29:7-9).
그 소리는 위엄차서,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6).
당시 구약에는 하나님을 뵈면 죽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시대를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뿐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그럴 수 있다는 벅찬 감동….
늙으신 장모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구원론을 설명하는 데 있어 내가 더 벅찬 감동을 받는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설 때에 듣는 자와 달리 전하는 자의 속에 내주하심이 크다. 이에 다시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선은 이와 같은 부르짖을 수 있는 특권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 곧 그의 성소로 들어가는 담대함,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얻었을 때 구원의 확신도 자라가야 한다. 아이가 태어났으면 자라가야 정상인 것처럼, 한데 그렇지 못한 상태로 머묾은 그 영혼이 더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하는데… 그렇듯 아이도 가진 힘을 다 써 자라가는데 하물며 한 영혼의 안이함이라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렇게 자기 부인이 어려운 것이다. 곧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 자기주장 자기 의를 버린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고백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가보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0-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를 움찔하고 내가 그러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 돌아보고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이를 인정하는 데서 회개는 터져 나온다. 교만은 그처럼 무서운 일이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하실 때에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 하고 불만이 먼저 인다. 스스로의 의를 굽히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
흔히 우리가 죄인이라 하면 추상적으로는 인정하나 구체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예수께서는 와서 배우라, 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그런데 나도 경험했던 것처럼 이게 그렇게 어렵다.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인정할 수가 없다. 자신이 옳다. 이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뼈저리게 경험하였던 바울은 이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아내와 장모와 같이 둘러앉아 우리가 언제 어떻게 예정하심을 받았는지. 왜 우릴 택하시고 부르셨는지. 오늘의 이 모든 순간이 언제 계획되었고, 어디로 향하는지…. 우리는 이를 에베소서 1장에서 찾아 그 근거를 삼아 ‘보증’서를 찾았다.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이 놀라운 경험은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가 없다. 말하는 나로서도 새삼 놀랍고 듣는 이들도 새삼 기이하다. 곧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 나는 그리하심을, 함께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하심을 할 때마다 경험한다.
무슨 말로 이 두 모녀의 완고함과 굳은 신념을 상대할까 하고 걱정이 앞섰다가도 말씀을 전하다 보면 내가 허물어지고, 듣는 저들의 심령이 주를 바라게 되는 것을 느낀다. 팔이 부러져 잠시 우리와 살기로 한 것인데 어쩌다 이제는 남은 생을 같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소름이 돋았다. 아내에게도 일러 단순히 친정엄마를 대하는 일이 아니라 한 영혼을 주 앞에 인도하는 것이었으니,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사명이 복되면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시작이 어렵지 함께 마주 앉기만 하면 주가 이루신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3-4).
새삼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심을 놀라워하였다. 서로가 말씀 앞에 아멘, 하고 이렇듯 마주하고 앉을 날이 올 줄이야…….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143:5-6).
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와 같이 오늘도 하나님은 절정의 순간으로 우리와 마주하신다. 악의 본질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으로,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6:1-2).
그러고 살았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우리는 이제 돌아보며 주를 바란다.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사 5:24).”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5-6).
이를 알 때 참 회개와 온전한 감사가 나온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노인의 때에 곧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면서도 생에 대한 갈망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것이어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이를 날마다 누리며 살고 있다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7, 9).
그러므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 11-12).” 새삼 꿈이 하나 생겼다면 생의 마지막에 선 사람에게 주의 살아계심과 그가 기다리시는 천국을 바라게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은 마음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막연하게 바라는 천국과 그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생의 막바지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하고 더하시는 마음에 대하여 주의 일하심이 어떠하실까? 기대하게도 된다(히 12:15). 곧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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