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전봉석 2023. 1. 5. 05:02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기 40:4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38:9

 

 

 

하나님의 주권을 하나님이 스스로 선언하심은 이를 알 수 있는 자가 없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까닭도 하나님 외에 기쁨의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의 뜻을 바라기보다 나의 뜻을 관철시켜 주의 뜻을 바꾸려 한다. 한데 이 모든 일을 겪으며 욥은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나름은 할 말도 많고 따져 묻고 싶은 것도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찌 내게 그러실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왜 그럼 안 되냐’고 되물으시더라는 현재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고백이 생각난다. 저가 아들을 잃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들었던 기도라 하였다.

 

그 하나님이 오늘도 물으신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2).” 이는 수천 년 전 욥에게 하신 질문이 아니다. 여전한 우리에게 되물으시는 질문이다. 여기서 ‘트집 잡다’는 변박하다, 설복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알아듣게 말하여 수긍하게 하는 설복과 옳고 그름을 따져 가리고 논박하려는 게 변박이다. 피조물이 조물주께 그럴 수 있겠나? 저는 전능자이시다. 어찌 그러실 수 있나? 하고 호소할 때 왜 그럼 안 되나? 하고 되물으시면 할 말을 잃는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우리는 이상하게 주를 두려워할 줄 모른다. 누구는 무슨 일이 터지면 다 하나님 탓이다. 저를 원망하느라 자신을 돌아보아 아뢸 기회를 잃곤 한다. 마치 그리 대해도 되는 상대처럼 함부로 여길 때도 있다. 그러나 주를 알면 알수록 자신의 미천함에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감히 내가 뭐라고 주 앞에 설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우리의 반응은 이와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여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5).” 이는 저들만의 고백이 아니다. 전엔 아무렇지도 않던 마음이 혹은 생각이 이제 부끄럽기만 하다. 다, 그러고 사는 거지 뭐!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낯을 들 수 없게 하는 부끄러움이 되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시 22:6).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이를 늘 되새기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어제 누가 왔었는데 저는 어떤 어려운 마음을 고백하였다. 중국에서 선교하다 공안당국에 의해 추방당한 선교사를 저들은 후원하고 있다. 자식이 다섯이고 시골에서 무료로(?) 목회를 하는데 그게 안쓰러워 자신들이 타던 2년 된 SUV중형 자동차를 드렸다. 그리고 나름 힘이 닿는 대로 매월 얼마씩 후원도 한다. 선교사는 가끔 목회보고서(?)을 보내오는데, 얼마 전에 차가 더 큰 게 필요하겠다는 것과 무료 목회가 어렵다는 하소연을 적어 보냈던 모양이다. 순간 마음이 상하고, 자신들도 한다고 하는데 이 일이 부담스럽다며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고 마음을 털어놓았다. 뭐라 이르기가 어려운 문제 앞에서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일체 보고서도 고맙다는 표현도 가급적이면 피한다. 저는 날 보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면 갚으셔도 하나님이 갚으셔야 할 일일 테고….

 

사람과 사람 사이 아주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하고 되레 어려워질 수 있다. 물론 고맙지! 나로서는 받을 자격도 갚을 능력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주께 아뢴다. 어제도 기부금영수증을 만들면서 나는 그 이상으로 마구 적어 금액을 부풀렸다. 배로 그 이상으로 적어주는 것은 ‘어느 악한 종의 지혜’로 면피하려는 속셈으로다.

 

하루는 주인이 불러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실 때 속으로 생각한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하고 생각한 일이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하고 묻자 “기름 백 말이니이다.” 하니,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묻고 “밀 백 석이니이다.” 하니,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며 일처리를 하였다. 그럼 우리 생각엔 주인이 더 그 죄를 물을 것 같은데,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하고 저를 칭찬하시는 것이었다(눅 16:1-8).

 

나는 이 내용이 어찌 이런가, 하고 생각을 많았다가 하나님을 알면서, 알면 알수록 알겠다. 후히 흔들어 넘치게 더 주시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그러나 난들 무엇으로 갚겠나? 먼저는 저들이 날 보고 주는 게 아님을 알았다. 내가 받은 게 아니니 나는 상관없고 하나님이 상관하실 일이다. 곧 내가 아는 하나님은 하나를 열로, 열을 백으로 갚으시길 기뻐하신다.

 

이를 요즘 장모와 같이 지내면서 자주 느낄 수 있다. 아내의 짓궂음을 고자질하며 못됐다고 흉이라도 볼라치면 어찌 그리 잘 돌려 엉뚱하게 해석하고 이해시키는지… 가령 뭐라 자꾸 잔소리한다고 말씀드리니까,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똑부러져 그런다고 해석한다. 하루는 어머니께 너무 함부로 구는 것 같아 뭐라 하려니까, 내가 다칠까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하고 딸을 두둔한다. 부모 마음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시랴!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것인데, “그 때에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나, “전에는 …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이는 결코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이와 같은 말씀을 같이 나누면서 내가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엡 2:1-5). 어쩜 그리도 다 내 이야기인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터…….

 

오늘 욥은 주 앞에 서서 고한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 그리고 저는 덧붙이기를,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5).” 곧 이제껏 사람 앞에서는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할 말이 많고 따질 게 많았는데, 더는 말할 게 없다는 소리다. 염치없어 내가 자주 느끼는 것처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그 뜻이다. 앞서 저는 억울하였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2).” 주 앞에 할 말이 많았다! 심지어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도 했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14:15).” 그랬던 그가 유구무언이라!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39:9).

 

아직 할 말이 많을 땐 멀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사 30:15).” 누가 주 앞에 서서 당당히 묻고 따질 수 있겠나?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그저 두렵고 황송할 따름이다. 나로서는 누굴 위해 아뢰고 기도할 뿐, 갚을 길이 없다. 늘 사랑에 빚진 자로 산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38:1).

 

주 앞에 엎드린다는 것,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4).

 

이를 알면 알수록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참으로 귀하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이로써 나는 혹시 몰라 누구의 이름을 적고 저의 사연과 그에게 받은 사랑을 주께 되돌린다. 주가 배로 갚아주지 않으시면 나는 염치가 없다. 그러므로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도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