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전봉석 2023. 1. 9. 05:09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잠언 2:5-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오늘 잠언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새김’과 ‘바른 알림’을 약속한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하고 시작하는 것으로(1),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2-4)” 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면, 하고 이어지는 말씀에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게 될 것과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을 약속하면서 지혜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게 한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러고 우리에게 ‘완전한 지혜’와 ‘온전한 행실’이 가능하게 하실 것을 확언한다.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5-6)” 그리하여 하나님의 목적은,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7-8).”

 

우리 생활의 ‘보호와 보전’은 결국 우리로 ‘온전한 행실’과 ‘완전한 지혜’로 이끌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경외하게 한다.’ 이에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즉각적으로 이를 마음에 새겨 생활로 실천할 때 그 경험은 확실하게 보장된다.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는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조건이 아니라 마땅한 행사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32:11).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90:14).

 

곧 하나님 안에서보다 더 기쁜 것은 없고 영원한 것보다 오래 가는 것은 없다. 곧 우리의 기쁨은 명령이신데, 이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 곧 지혜를 통해 가능하였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이를 즉각적으로 앎으로 더는 나의 죄에 대한 정죄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러므로 더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율법의 매임에서 놓였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러한 자유, 그 놓여남의 놀라운 기쁨을 만끽하며 살라 하시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그러니 더는 죄로 인해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시로 범하는 죄로 인한 죄에 대해 이를 인지하고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이는 정죄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 기쁨’을 소유하고 잃지 않기 위한 것이다. 가령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면 빨리 사과하고 화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은 틀어지고 서로의 골이 깊어지면서 기쁨을 잃는데, 나아가 하나님과의 기쁨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일로든 감정이 상하여 기쁨을 잃으면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도 사라지게 되는데… 그런 날은 저녁 밥상을 같이 하기도 불편하고, 가정예배도 민망하게 된다.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눅 12:58).”

 

사람과 사이는 물론 어떤 시련과 역경으로 마음이 상할 때도 ‘이러한 문제’에서 빨리 놓여나는 것이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함을 잃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사는 게 지옥 같다는 말’ 그 속엔 살면서 빠져든 ‘죄로 인한 죄’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죄함은 없어졌지만 수시로 범하게 되는 죄는 우리 안에 구원의 기쁨을 앗아간다. 하나님으로 인한 충만함, 그 만족함을 상실하게 한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그러느니 주의 인자하심, 기쁨을 잃고는 죽는 게 낫다는 소리로 들린다. 사는 게 지옥인 세상에서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러니 우리는 즉각적인 새김과 실천이 필요하다. 어제는 장모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같이 생활하던 개가 이제 열 살인데 치매가 오고 무슨 병에 걸린 모양이다. 자신의 신세와 동질화되어 그러시는가, 그럼에도 어찌하든 살려야 한다는데, 매달 치료비로 드는 비용이 백만 원이 넘는 모양이다. 어디 편안한 데(?) 입양보내자 해도, 그만 안락사를 시키시라 해도 안 된다고 하는데, 당장 당신은 5만원을 7만원을 아끼느라 도수치료나 발마사지도 받지 못하면서…. 아내는 어찌하면 좋겠나? 하고 자꾸 장모를 설득하려 든다. 나는 어머니가 여기 계시는 동안 형님과 의논하여 병원에 맡겨 고통을 덜어주는 게 낫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보면 정들면 것도 지옥이라. 늙으신 장모의 마음은 이해가 되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기쁨을 앗아간다. 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모든 우리의 생각이 지나치면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죄가 된다. 수시로 범하게 되는 이와 같은 죄는 어디에 자꾸 얽매이게 한다. 그와 같은 얽매임은 우리 안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 하여 지혜서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곧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무엇도 참 기쁨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선행(?) 또는 의로운 마음(?) 이를 성경은 모두 다 ‘요란한 소리’일 뿐이라고 단정하였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심지어 자신을 희생하는 구제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곧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다!’ 그렇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 그러니 키우던 개를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돌보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는데, 개는 개 대로 그리 살아있는 게 지옥일 것이다. 그러니 모든 생명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는 게 지옥이라!

 

그리하여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우리로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 결국 하나님의 기쁨도 우리가 주로 말미암아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이를 오늘 시편으로 이어보면,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1).

 

그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잃어버리면 살 수가 없어 그 마음이 지옥인 것을 알기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2).

 

수시로 나를 돌아보고 또한 즉각적으로 새겨 말씀 안에 거하기를 바라는 삶으로, 이제 더는 하나님을 한 시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리 살다 하나님의 기쁨을 알게 된 자는 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그게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다. 키우던 개에 정이 드는 것은 물론 피땀 흘려 모은 물질에 대한 애착이든지, 나아가 가족간의 끈끈한 정과 사랑도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으로가 아니면… 사랑도 지옥이라! 누굴 내 의지로 사랑한다는 것, 자식에 대한 사랑도 부부간의 정도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의 것이었으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3).

 

심지어는,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

 

곧 내가 하려던 것, ‘지나치게’ 내가 의롭게 하려고 했던 일도 실은 그게 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속이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다. 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내 생명보다 귀한 게 주의 인자하심이었다는 것을 찬송하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오늘 시인도,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42:8).

 

곧 우리가 ‘낮의 아들들’로 살면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느끼고 만끽하며 사는데, 인생에서 ‘밤에는’ 별 수 없다.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지혜자도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인생의 이 두 원리를 알면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 기쁨을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다. 자녀나 부부 사랑도,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으로 한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나는 그래서 이렇게 아침마다 말씀을 열어 보여주시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왜냐하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9-11).” 오늘도 나는 물 댄 동산 같은 날의 기쁨, 하나님으로 인한 이와 같은 만족함을 잃지 않고 지내기를 소망한다. 결국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더 좋은 기쁨은 없다. 영원하신 사랑보다 더 오래가는 것은 없고, 하나님 안에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에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9).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또는 한들? 저나 나나 사람일 뿐인 것을.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지옥은 하나님의 기쁨,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0).

 

그럴 때 당황할 거 없다. 오늘 시편은 이를 풀 수 있는 놀라운 답안을 알려준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