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전봉석 2023. 1. 7. 04:5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40:6-8

 

 

 

하나님과 변론하고 답변할 수 있다던 욥은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 하고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하는 회개에까지 이른다. 하여 스스로 했던 말을 거두어들인다.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6).” 이에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다. 욥은 비로소 말하기를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2).” 어떠하시든지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는 우리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하여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곧 우리의 한계와 주의 무한하심은 견줄 수 없다.

 

오늘 욥의 태도에서 구차한 변명보다 자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가장 빠른 구제의 길인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할 때 우리의 어떤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곧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게 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나는 요즘 이러한 하나님의 표현 앞에서 은근히 안도한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번복하실 수 없다. 만일 내가 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결과였다면 어땠을까? 나 하기 나름이라면 얼마나 끔찍할까? 한데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9-1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안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최소한 내가 나 자신을 안다면 이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하고 귀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내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주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이는 나를 봐서 그러시는 게 아니다. 오직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이 놀라운 은혜는 확장하여, 내가 주 앞에 설 때 사탄은 나를 고발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그때에 하나님은 나의 더러움이 아니라, 나를 더럽다 하는 사탄을 책망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사탄은 나의 허물과 나의 죄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이 더럽다고 공격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은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3-4).”

 

아무리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이나 주가 이미 그 죄 값을 하여 모든 죄를 사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나는 이제 어떠하든지 더럽지 않다. 만일 나를 더럽다 하시고 내치시면 그의 아들 예수를 부정하시는 일이 된다. 하여 오늘도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죄로 버려짐을 당하면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의 십자가의 죽음을 부정하시는 일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놀라운 은혜를 산다. 가정예배에서 장모에게 이와 같은 사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이를 설명하느라 긴 시간이 필요하였다. 우리의 어떤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넓으시다. 나의 어떤 악한 것의 길이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길다. 나의 교만과 아집이 아무리 높고 깊다 해도 하나님은 그 이상을 초월하시는 사랑이시다. 햇수로 일흔다섯 해를 우상을 섬기는 일에 봉사하며 생을 허비하였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훨씬 더 넓고 깊고 높고 길어서 그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3-14).”

 

이 놀라우신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하였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할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하심을.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입을 가리고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우린 참 할 말이 많다. 노인을 상대하는 일 가운데 저의 말을 듣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했던 말 또 하는 것은 물론 하려던 말을 에둘러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을 가로막기는 쉽지 않다. 부쩍 드는 생각이 유치원이 필요하듯 노인학습도 필요한 것 같다. 열에 아홉은 또 얼마나 고집이 센지,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노새의 등엔 채찍뿐이라고 평생의 완고함이 고분고분하기란 쉽지 않다. 어제 나는 이를 하나님께 일일이 말씀드리는 연습을 강조하였다. 자식들이 멀어지고 손자들이 피하는 것을 서러워할 게 아니라, 숱한 할 말을 주 앞에 쏟아내고 살면 굳이 긴 말도, 고집도 부릴 게 없다. 그러므로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7).”

 

쉽지 않다. 태어나 자라는 것도 그랬듯이 나이 들면서 늙어가는 일도 그러하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5-7).” 이를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길은 말씀을 마음에 담는 묵상뿐이다. 오늘 4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4).” 이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38:3, 40:7).”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하시는 데 따른 것으로 우리는 말씀 앞에 앉고 듣고 이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를 솔로몬은 예리하게 표현하여,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우리는 장모와 같이 예배드릴 때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저의 말문이 터지면 온 세월을 다 뒤져 겅중거린다. 이를 어찌 끊을까… 하다 내가 주 앞에서 그러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에 이를 극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19:97-100).

 

누구를 붙들고 이런저런 하소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께 아뢰고 고하는 시간이 적다는 뜻이다. 남 앞에서 눈물을 찍어가며 푸념도 아닌 서러움도 아닌 고백도 아닌… 지나고 나면 후회할 말들의 나열은 하나님과 그만큼의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아뢰고 고하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산다면 굳이 사람 붙들고 긴 말 할 것 없다. 저 앞에 눈물 흘리며 위로를 받을 게 없다. 저의 충고로 돌이킬 게 아니다. 왜냐하면 저나 나나 우린 모든 시간이 처음이다. 내 나이 쉰 중반이나 장모의 나이 아흔의 시간이나 서로가 처음인 것은 매한가지여서 서로도 모른다. 모두가 처음 가보는 길이다. 하면 우리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2-3).

 

주를 갈망함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1).

 

하나님은 기어이,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신다. 하면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 하여 우리의 인생연습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이에 우리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어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겠나? 그 비결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곧 우리 안에는 그만한 역량이 있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3).

 

달리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96:1-2).

 

새 노래, 날마다 매일 다시 또 허락하신 새 날을 찬송함으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98: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44:9).

 

그러므로 우린 지나간 날을 이야기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장래의 소망에 대하여 그 나타날 일을 찬송하며 산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0:4-5).

 

이는 묵상으로 다지고 더해지는 것이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7-8).

 

부디,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3).

 

하면,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