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언 6:22-23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우리에겐 냉철한 판단과 온전한 분별이 필요하다. 이는 주가 주시는 지혜로밖에 알 수 없다. 이를 가로막느라 감정이 앞선다. 마귀가 이를 틈탄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그러므로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3-24).” 성령으로가 아니면 이와 같은 판단과 지혜를 갖기 어렵다.
누구의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18:13).” 이에 따른 인내가 필요하다. 우선은 듣기가 필요하고, 판단에 앞서 저를 헤아리는 마음도 필요하다. 어떤 일을 두고 저의 사정에 마음이 어렵다.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 마음도 아프다. 감정의 동요도 느낀다. 그러나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시간이 점점 가속이 붙는 것 같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 그야말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것이 오늘의 현상으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믿는다는 자의 마음이 안 믿는 자의 마음보다 강퍅하고 조급할 때는 이때다. 하나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나는 사실 요즘 여러 갈등으로 긴장한다. 노인을 모시자니 아내가 힘에 겹다. 아내의 마음을 아니까 뭐라 하기도 어렵다. 어제는 벼르다 반 강제적으로 물리치료라도 받게 했다. 정신적으로는 늙으신 모친의 눈에 띄는 변화가 마음을 어렵게 한다. 육적으로는 저를 건사하는 데 손목과 팔이 시큰거리고 통증을 호소하였다.
서로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희한한 것은 말씀을 나눌 때의 화기애애함이다. 틀니를 빼고 있는 노인이 환하게 웃는다. 성경에 있어 뭐라 설명한 부분을 듣고 ‘부자인 하나님이 그 정도는 이해하시겠지….’ 하는 식의 말에 웃음이 터진다. 모처럼들 웃고, 두어 시간 가까운 동안 말씀을 다양하게 풀어 접근하면서 오히려 내게 더 은혜가 큰 것을 느낀다.
우리의 부지런함은 한 영혼을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오늘 본문 6-11절에서 게으름과 개미의 부지런함을 두고 설명한다. 우리는 무엇에게도 배울 게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6).”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이 어렵다가도 말씀을 나누면서 성령이 재해석하시는 것에 놀란다. 영적 게으름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그게 왜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으로,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전 10:18).” 사는 게 분주한 것은 벌인 일이 많아서일 수 있다. 어수선한 책상 위처럼 정돈되지 못한 마음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하시는 오늘 시편의 구애가 유효하다. 나름 애쓰고 수고 한 게 많은데 저는 늘 그래서 억울하다. 너무 바쁘고 돌아서도 또 할 일이 있다. 왜 그러고 사나 보았더니 두서가 없다. 마치 어린왕자에 나오는 ‘지리학자’ 같다. 아는 게 많은데 그래서 더 알아야 할 게 많다고 하면서 정작 일어나 가질 못한다. 또는 ‘가로수 켜는 자’로 켜면 곧 꺼야 할 거 같고 끄면 또 켜야 할 것 같아서 연신 가로수 등을 켰다 껐다 하느라 정신이 없다. 저의 날이 무의미하다. 일이 늘 많은데 정작 하는 게 없다. 왜 그럴까? 시편을 이어서 보면 답이 있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0).
과연 오늘의 나는 얼마나 주를 높이며 살까? 여기서 욥의 고백이 진귀하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는 일 외에 모든 일은 가치가 없다. 맞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여기서 우린 비틀어 듣기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인데 이는 감상적인 고백일 뿐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공식을 정립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더러 사랑하라는 것이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안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으로 우릴 치시기도 한다. 세상과 같이 정죄당할까 하여 징계하시기도 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는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무엇도 개의치 않을 때까진데, 때론 내 생각과 다른 부당한 현실을 두고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전제를 잃지 않는 것,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라고 한다면 우리를 그 아들과 같이 죽이기도 하신다.
하여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나름은 믿는다 하면서 일상에서 희미한 ‘하나님의 사랑’을 각색하여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로 둔갑시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관점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지만 하나는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하나는 자신을 전제로 한다. 나는 요즘 어떤 일로 또는 누구와 ‘소모적인 긴 이야기’에서 숨을 몰아쉬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대명제를 알아듣겠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못하실 게 없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곧 하나님은 자신의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단순한 희생의 사랑이 아니다.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겔 20:22).”
오늘 우리의 일련의 상황은 모두 하나님을 알게 한다. 한데 이것이 영육간의 게으름에 빠지면 자기설득에 사로잡힐 뿐이다. 오늘 지혜서 10, 11절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스스로에게 여유를 준다. 좀 더 자자한다. 영적인 잠에 빠지면 구제할 길이 없다. 태만이 저로 저의 삶을 느긋하게(?) 이끈다. 혹은 ‘잠시’라는 변명과 같이 좀 더 졸자, 하고 뒤로 미룬다. ‘나중에…’ 하는 소리보다 어리석은 게 없다. 그 나중이 영영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혜자는 간곡한 것이다. 그러다 빈궁이 강도 같이 올 것을 말이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노인이 되었고, 운신이 어려운 육신이 되었다.
어떤 난감함 앞에 누가 우울감을 호소하였다. 그러면서도 저는 자기 이야기로 가득하다. 들을 기회를 또 잃는다. 나는 통화 중인데 전화기를 멀리 뗀다. 잠시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며 주를 부른다. 뭘 대체 어쩌란 것인지…. 다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명제로 들어가 보면, 실상은 잔인하기까지 하여 그 사랑을 위해 자기의 아들도 죽이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여기서 그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와 같은 감상적인 생각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린지 되새겨야 한다. 다시 욥의 고백으로 가져가 보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의뢰하겠다.’ 하는 말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그리 감히 할 수 있겠나? 정령 감당할 수 있겠나? 그의 사랑은 아들을 주신 것은 물론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53:4-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오금이 저려 와야 정상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9-11).” 인생 이제 중년을 살아보니 떠나는 것을 붙들 수 없고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우리 안에 악을 제어하지 않으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생각보다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개인적으로 난 애완동물을 키운다면서 사람들 좋을 대로 동물을 수술하고 꾸미고 돌보고 기뻐하는 일에 두려워한다. 아파트 생활에서 성대수술은 기본이고, 무슨 절개니 뭐니 하며 자신들 좋을 대로 동물 사랑을 사람 사랑보다 우선하는 것에 대하여, 악함의 또 다른 변형이라 단언한다. 더 나은 족보를 얻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 자행하는 일들이 실은 그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생기는 것으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아, 그 결과는 참혹하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8-31).”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는 그저 감정에 이끌려 그 마음이 좋을 대로 행할 뿐이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숨을 수 없다. 자신에게 쫓긴다. 이에 오늘 시편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1).
이것이 지혜의 결론이다. 그럼 어떡해야 해? 하고 누가 물을 때 나는 듣기 싫어할 걸 알면서도 ‘죽이세요!’ 하고 말했다. 차마 ‘죽으세요!’ 하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 자신이 죽지 않으면 결국은 희망이 없다. 너무 길다. 자기주장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한다. 어린왕자가 ‘술 취한 자’에게 물었다. 그럼 그만 마시면 되잖아요! 그러자 저가 대답했다. 술이 깨면 부끄러워서 다시 마신다! 우린 어쩌면 모두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자기변명으로 산다. 이에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33:20).
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곧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5).
아주 단순하지만, 내가 새벽을 깨우는 이유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08:2).
다소 병적으로 나는 이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마치 보화를 발견한 어느 농부처럼, 내가 발견한 것,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아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의 사랑이었을 텐데 한사코 외면하고 살던 때를 생각하면 끔찍하여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오늘은 원주에서 친구가 온다. 새벽 일찍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 내려서 다시 인천까지 두어 시간. 오고가고 왕복 여섯인데도 초등교사로 근무하며 방학 때면 온다. 저기 그처럼 기를 쓰고 오는 이유가 무얼까? 설마 내가 그리 보고 싶어서는 아닐 테고… 우리가 알게 된 공통된 은혜 하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나는 내가 간다, 내가 갈까 하는데 하나님은 아직 허락하지 않으시고, 나는 더 이상 이를 두고 속상해하지는 않지만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우리가 만나 주를 바라고 구하며 그간의 은혜를 나누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는 때로 잔인하고 혹독하다. 그러나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이 모든 게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0).
두 말 할 거 없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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