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전봉석 2023. 1. 14. 05:40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잠언 7:24-26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47:6-7

 

 

 

‘때가 악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늙으신 장모에게 묻자, 거짓말하는 것이나 남을 해코지하는 것으로 말하였다. 오늘 지혜자는 ‘음녀의 길로 치우치는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하여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하고 덧붙인다. 나는 이를 확장하여 세 가지를 생각하였다. 하나는 게임 곧 가상현실에 빠져드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만족 곧 신발이나 가방을 필요 이상으로 사거나 값을 치르는 것은 물론 인형이나 어떤 모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동물을 사람보다 더 사랑함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서 ‘음녀’와의 관계를 찾고, 사람과 사람에 맺어야 할 ‘인격적인 관계’가 허물어지면서 가정마다 애완동물에게 사랑을 준다. 게임에 빠지고 자신을 위해 허영과 물질에 젖어드는 일도 흔하게 되었다. 가령 신발을 꿀단지처럼 귀히 여기고, 인형을 엄청난 값을 들여 산다. 이 모두는 때가 악한 증거다. 동물을 사랑함에 있어 그 도를 지나쳐 유전자변형을 시켜 작은 모양 큰 모양으로 개조하기도 한다. 주거환경에 맞추기 위해 성대수술이나 정관수술 등을 서슴지 않는다. 물건이나 동물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저와의 관계를 맺음으로 사람과의 관계는 회피한다.

 

이는 나아가 사람 사랑하기를 잃었다. 온갖 퇴폐업소가 난무하는 것도 그래서인데, 그 원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롬 1:21-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이를 설명하며 현재 집에서 기르던 개가 병들어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에둘러 설명하였다. 말씀이 비축되지 않으면 그 속에 거짓 사랑이 채워지게 되어 있다. 오늘 잠언은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1).” 하고 간곡한 어조로 시작한다. 이는 단번의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2-3).”

 

곧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이 긴 시간을 택하셨다. 우리가 거역하여 죄를 범하였을 때 더 간단하고 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었는데, 이는 당신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릴 사랑하심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에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격적인 관계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신 게 아니다. 가상의 게임 세계도 아니고, 어떤 사물을 애지중지하는 자기만족의 결과도 아니다. 나아가 애완용으로 다루기 위한 생명도 아니다. 그런 관계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그와 같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곧 오늘 우리가 말씀을 이처럼 귀하게 여겨 되새기며 그 관계를 원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하여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곧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이에 어제 나의 친구는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녀가며, 하루 종일 우리가 나눈 이야기 가운데서 서로가 나누고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8-19).”

 

우리가 안다는 것,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으로가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우리는 찾고 같이 하고 나눈다. 사람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말씀의 의미를 더욱 알고자 하고 그 뜻을 같이 하는 데 있다.

 

곧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7:4-5).” 오늘 잠언은 그리하여 왜곡될 수 있는 관계에 대해 경계한다. 바라고 구하면 그리 닮아간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서 어니스트는 맞은 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저도 이를 맞을 준비를 하며 자랐다. 후에 그럴듯한 유명인사들이 온다. 그러나 모두 어딘가 아니다. 한 시인이 어니스트를 보고 오히려 그의 모습에서 큰 바위 얼굴이 보인다고 하였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함은,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9).” 현재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하나님을 마주하는 데 있어 우리 영혼이 그 심령이 주를 바람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2).”

 

어제 친구와의 긴 시간 대화에서 이런저런 상황과 사건을 두고 우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시는가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였다. 어떤 사람에 대해, 또는 상황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119:47-48).

 

그럴 수 있는, 마음껏 그래도 되는 ‘천국연습’의 시간이었다. 우리의 만남 곧 우리가 서로 맺어가는 인간관계 역시 인격적인 관계 형으로서 ‘하나님과 나, 우리’와의 영원한 나라를 구축해가는 일이다. 한데 이를 훼방하고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세월을 아끼라.’ 하심도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허송세월을 보낼까 하심인데,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잠 7:18).” 하는 음녀의 꾐이 달콤하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인격적인 관계의 시간에 홀리곤 하는지(21).

 

이와 같은 ‘홀림과 끌림’은 악한 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칫 애완동물에 대해 죄의 결과로 다루면 이에 발끈하며 반발할 위인들이 넘쳐난다. 게임은 물론이고 자기 좋을 대로 끌려 이제 사람과 똑같이 생긴 자기 이상형의 ‘아이돌’도 만들어서 버젓이 성인샵에서 판매하고 성교를 한다. 동물과의 교접도 예로부터 없었던 게 아니다.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레 18:23).” 이런 자를 죽이라 하신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자칫 요즘은 동성애에 대해 잘못 말했다간 돌팔매질 당하기 십상이다. 성적소수자나 어떤 취향에 대한 개인의 생각이 문화가 되고 사회가 이를 허용하는 것을 선진화된 관계로 생각한다. 미국 어느 주에서는 동물과의 결혼도 합혼이 되었다. 동성애의 결혼이 합법화된 곳은 허다하다. 이제 더는 ‘개인의 취향’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를 두고 ‘미개한 일’로 취급한다. 성도와의 교제도 사라지고 점점 더 대형교회는 기업형으로 커져간다.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 서로의 관계를 회피한다. 오늘날 개척교회 시대는 끝났다는 표현이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서로가 친밀한 과계를 원하지 않는다. 친절한 타인을 바랄 뿐이다. 이것으로 “때가 악하니라.” 하신 말씀이 점점 더 확실해진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9:9-10).

 

우린 이제 무장하지 않으면 방어할 수 없다. 안이하게 굴다 방관자가 되고, 태평하다 방주의 문은 닫힌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6-17).” 오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 아니 일상이 되어버린 악한 때에 과연 우린 어떠한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자 이제 우린 어쩔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고 말씀은 붙드신다(딤후 3:2-5). 그런 가운데 오늘 시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한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47:1).

 

이는 자발적인 즐거움으로 내가 주로 기뻐할 때 주는 나로 영광을 받으신다. 결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우리가 돌아갈 곳,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이르러서는 늦는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가령 친구의 아내는 기독교 대안학교 교장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려 남은 생을 걸었다.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 왜 없겠나만, 이번에도 선생을 구하는 일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명감 없이 누가 그 일에 동참하겠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심을 알면서도 우리는 점점 더 영혼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나는 누구 생각이 나서 저에게 바로 연락을 해두었다. 교회도 점점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사람을 쓰다 보니 말씀으로 가르치고 관계를 원하지만 주어지는 주 업무가 행정간사 일이라…. 나는 저의 갈급함을 오래 전부터 듣고 알고 있었다. 주가 어찌 관여하실지는 알 수 없으나 서로 기도하고 연락하기로 하였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 그럴 수 있는 마음과 그 관계가 인격적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는 곧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세상의 여러 현상도 한 눈에 보인다.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이를 안다는 건, 주가 나를 아심 같이 나도 주를 앎으로 가능하였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2-4).

 

곧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우린 다 이긴 싸움을 산다. 하여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44:5-6).

 

곧 우리 자신도 낡아져 늙어 병들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요즘 우리 장모에게 이를 말씀드리느라 안간힘을 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5:1).”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부디 정신 차리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아차, 하다 훅, 간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47:5-7).

 

점점 더 찬양할 능력은 사라지고 변죽만 울리는 감미로운 멜로디만 남는다. 서로에게 주를 자랑할 게 없다. 사느라, 그저 사는 이야기에 급급해서 누구의 간증에 구름 떼처럼 몰려간다. 어디 용한, 특이한, 아니 별난 목사의 교회가 뜬다. 유명 연예인 한둘 나와 주면 성도의 숫자는 금세 는다. 타는 목마름으로 다들 누구의 간중에 목말라 있다. 말씀은 고리타분하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0-31).” 부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