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전봉석 2023. 1. 25. 05:33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언 18:10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편 58:11



밤이 깊을수록 별이 빛나듯 악이 악할수록 선은 감출 수 없다. 악은 스스로 갈라져 지혜를 배척한다. 오늘 잠언의 첫 구절이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1).” 자기 소욕을 따르고자 하는 욕구는 서로의 유익을 도모하지 못한다. 독선은 이기적이고 지혜를 견제한다. 서로에 반목은 그래서 풀릴 길 없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육을 입고 사는 동안 서로에 대한 마음이 그러할 때, 그 마음을 돌이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그러니 이를 풀 수 있는 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종종 누구에 대한 미움도 사랑도 나의 의지로는 감당이 안 된다. 실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동생의 일로 그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었다. 저이는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그 분노가 ‘목사’에게로 분출된 것 같다. 이를 돈으로 여겨 일을 부풀리고 확대 재생산하는 게 또한 소위 말하는 로펌인 셈이고.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3).” 저로 인한 파장이 온 물결을 요동치게 하는 격이다. 그러할 때 우리 믿는 자의 도리는,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 18:4).”

주를 바라고 주가 하실 일을 신뢰하는 것,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은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우린 그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신뢰한다. 이를 분별하고 바라는 일,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0-11).”

우리가 주 앞에 힘쓰는 것은 어떤 결과를 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3).” 그러니 우릴 더럽히는 것은 덩달아서 더러운 말을 할 때이다. 그럴 거 없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혹여 이 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 하나님의 관심은 저들이 아니라 오롯이 주의 자녀들이다.

그저 저를 멀리하는 것은 그것이 거짓 일이어서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출 23:7).” 그런 거 보면 일장일단이 있는 게 세상의 법이지 싶다. 오죽하면 그런 법이 필요하겠나 싶다가도 법대로 할 때 이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돈이었다. 가령 아이의 주장이 그러하다 할 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게 우리 입장이라고 하니… 세상이 악한 것을 생각하면 오죽하면 그럴까 싶다가도 이를 또 교묘하게 돈벌이로 삼는 것들을 보며 개탄스럽다. 그러니 재판부를 믿어본다고는 하나 서로가 그 놈이라, 문제란 문제를 만들려고 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은 군사독재보다 검찰과 사법부의 독점이다. 그야말로 걸면 걸린다.

나는 동생 입에서 ‘유전무죄무전유죄’ 말을 들으며 뭐라 할 말이 없는데, 주가 행하실 일이라… 오늘 시편의 심정으로 듣는다. 곧 우리의 호소는 주께로 향할 뿐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58:6-9).

어찌 이런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까? 이를 상대하여 저들에게 말하면 독이 되나 주께 아뢰면 기도가 된다. 이 놀라운 효력,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0).

이러한 기도가 다윗의 심정으로,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11).

하나님은 이를 알게 하시려고 애굽으로 이스라엘을 박해하게 하셨고 저들이 풀려나기까지 열 가지의 재앙을 퍼부으며 주의 살아계심을 알리었다. 오늘 잠언의 요지는 시편의 주제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잠 18:5).” 오늘 우리 사회의 말도 안 되는 현상들을 보며 악의 득세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누구는 말 해 놓고 이를 녹음하여 틀었다고 악의적이라 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누구는 돈을 받고도 이것이 드러났는데도 여러 모양으로 둘러댄다. 악의 대결이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

그럴수록 우리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저들을 상대함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하나님은 하나님을 드러내실 뿐이다. 동생은 가족들과 이미 최악의 결과까지도 예상하며 이를 훈장이라 여긴다고 말하였다. 시작 전에 이와 같은 각오라면 어떤 결과인들 우리를 꿇릴 수 있겠나? 세상 그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8).” 오늘 잠언의 이 말은 우리 속에 왜 그처럼 악이 가득한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를 역으로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왜 하필 배일까? 하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 소위 다들 자기 뱃속 채우느라 여념이 없는 죄악 중에서 우리로 오히려 선을 도모하는 길을 잠언은 제시한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11:13).” 하여 오늘 시편에서 다윗도 이를 하나님께 털어놓고 할 말 못할 말 다 아뢴다. 그리하여 잠언은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17:9).” 심지어 그런 자를 멀리하라 이른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20:19).”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남의 말은 쉽고 자신의 변명은 정당하였다. 이에 그 현상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9).” 그런 현상은 저들이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어쩌겠나?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 5:13).” 그야말로 살만해서 그런다. 적당하니 작당을 하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고생을 저울질하고 수지타산을 먼저 생각하는 동안에는 어림도 없다. 누가 개척을 하네 마네 질질 끌면서 여전히 했던 말이 되풀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알았다. 그만큼 절실하지가 않은 것이다. 주의 일에서 한 영혼을 대하고 위하여 생각하고 기도하는 데서도… 그러다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15).” 그리 끌려간 자들이 어디 한들이었던가?

두려운 마음으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 2:9).” 건실하고 간절함으로 주 앞에 서는 이도 있다. 상대적으로 그런 자는 고요하고 심지어는 평안하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3).” 주가 아시는 일, 더는 뭘 더 바랄 게 있겠나?

오늘 잠언의 핵심어절이 되겠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10).” 다른 데 기웃거리며 살던 사람이라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에 안도한다. 억울하고 분할 것도 없다. 주가 다 아심으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2).

그러하다면,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3).

우린 그 결말이 어떠하든지 결국에 대해 알고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런 세상을 살면서 무얼 더 걱정할 게 있을까? 사람이라,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에 대하여는 오늘 시편과 같이 하나님께 내뱉듯 고하고 아뢰어 사람에게 향한 공격적인 언사는 대신하는 것,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11).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61:3-4).

곧 세상이 그럼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뢰하고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깊어간다. 역설적이게도 밤이 깊을수록 아침은 곧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후 13:11-12).” 우린 다만 서로를 위해 ‘문안함으로’ 기도하고 묻고 같이 들어주며 위하여 또 기도하는 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이 줄이 참 기이한 것은 현실은 암울해도 서로의 문안이 서로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한다. 그저 담장을 높이 쌓고 혼자 들어앉아 면벽수도나 하는 수행의 삶이 아니었다. 서로 찾고 위하고 마음 쓰며 주의 이름을 같이 부르는 일, 그러할 때에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32:8).

하여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32).” 이는 잠언의 교훈과 같이 모든 성경은 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되뇌는 말씀이기도 하다. 주가 인도하신다. 백날 계획을 세우느니, 나는 주어진 한 날을 사는 것으로 족하다. 그래서도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한두 번 말하다 서로 바라는 바가 다르면 어쩌겠나? 그저 다만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20).” 하는 오늘 잠언의 말처럼 내 입으로는 무얼 말하고 바랄까?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21).” 그래서도 가만히 주 앞에 앉는다. 결코 친구 많은 게 좋은 게 아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24).” 저들을 일일이 마음 쓰느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렘 6:10).” 저들을 상대하기란 고단하여서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슥 7:11).” 됐다. 그러해서도 주를 바란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58:11). 아멘.